외전 16화
베르체스터의 혼담–제라르 (1)
국혼이 있은 지 반년 후.
베르체스터 공작가에 또 다른 경사가 생겼다.
가주 제라르가 카트리나 록베스트와의 혼례를 결정한 것이다.
“히야……. 나는 형이 평생 장가 못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혼을 하겠다고? 그것도 그 여자랑?”
소식을 들은 마티어스는 세상 신기한 일이라며 감탄했고.
“형님께서 결혼을 하신다면, 이제 우리도 베르체스터에서 독립할 때가 된 것 같군.”
조엘은 미리 준비했던 것처럼 수도에 자신과 마티어스의 저택을 각각 구매했다.
“드디어! 우리 공작님께서 결혼을 하시는구먼!”
공작가의 가신들은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공작부인의 자리가 채워지는 것에 크게 기뻐했고 말이다.
“정말 경사야! 전대 공작님께서 정략결혼 상대도 정해주지 않고 돌아가신 데다, 공작님도 혼사에 도통 관심이 없으셔서 걱정했는데 말이지.”
귀족가의 후계자는 보통 어린 나이부터 정략결혼을 한다.
하지만 칼란드는 제라르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무관심해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결혼 생활을 자신과 가장 닮은 제라르가 반복하지 않기를 바랐던 걸까.
진실은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제라르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말이다.
“그런데 마법사 가문 간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지 않나?”
“아, 맞아! 마법사 가문끼리 결혼을 하면 후대에 마법사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뭐? 록베스트라면 진실을 보는 마안의 마법사 가문 아닌가? 이거 베르체스터와 혼사를 올려도 괜찮은 거야?”
“아니, 이 사람들아.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우리 공녀님. 아니, 황후 폐하께서 마법 연구를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셨다고 공표하셨는데.”
“역시! 우리 황후 폐하는 대단하셔!”
공작가의 가신들은 이제 마음 놓고 축하할 일만 남았다며 결혼식 준비에 혼을 불태웠다.
이 결혼에 열의를 불태우는 것은 카트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흠! 웨딩드레스 밑단에 레이스를 조금 더 추가해야겠어. 더 화려하게! 장신구도 거기에 맞게 다시 고르고 말이야.”
카트리나는 이제는 완전히 회복된 시력으로 자신의 드레스 상태를 꼼꼼하게 살폈다.
일전에 후계자 생산을 위해 억지로 결혼하게 되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새로운 마안의 마법사를 낳기 위한 결혼이 아닌,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라.
모든 예식 준비 과정이 전과는 다르게 정말로 설레고 즐겁기만 했다.
“결혼 축하드려요. 카트리나 언니!”
레스티아가 카트리나를 축하하기 위해 직접 록베스트 백작가를 방문했다.
“어머, 황후 폐하. 언니라니요. 제가 그 호칭으로 불려도 되나요?”
“물론 안 되죠. 하지만 사석에서는 그렇게 부르기로 해요.”
레스티아는 활짝 웃으며 작은 상자 하나를 카트리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결혼 선물이에요.”
“어머나? 선물까지?”
상자 안에는 카트리나를 위한 작은 마석이 담겨 있었다.
카트리나가 착용하고 있는 마력 중화석 팔찌에 끼워 넣을 수 있는 원형의 참 형태였다.
“어머머, 이건 뭔가요?”
“이걸 착용하고 있으면, 후대에도 마법을 쓸 수 있는 아이가 태어날 거예요.”
카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이게 전에 말했던 바로 그거구나! 대체 어떤 원리지?”
카트리나가 학자로서의 호기심을 내비치자 레스티아가 설명했다.
“혈통 마법사의 마법은 피로서 계승되잖아요? 마법사끼리 결혼하면 후대에 마법사가 태어나지 않는 이유는 피가 섞이면서 마력도 같이 섞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예요.”
“아하. 그러니까, 그 점만 마력 중화석으로 바로 잡으면 문제가 없는 거군요? 마법 부작용을 바로 잡는 것처럼.”
“네 맞아요! 물론 태어나는 아이가 어떤 마법을 가지게 될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요.”
“고마워요. 황후 폐하! 정말이지, 황후 폐하는 내 교수 인생 최대 아웃풋인 제자야!”
카트리나는 크게 기뻐하며 레스티아를 포옹했다.
카트리나는 내심 후사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마법은 가문의 상징이었으며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었다.
특히 진실의 마안은 오랜 역사 속에서 그 쓰임새가 특별했다.
자신의 이기적인 사랑 때문에 후대 록베스트에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은 가문의 오랜 전통과 가치를 스스로 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제라르가 가문의 의무를 걱정했던 것이다.
베르체스터의 경우, 조엘과 마티어스가 마법사의 명맥을 이어가면 됐지만, 록베스트의 경우는 카트리나가 유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레스티아가 깔끔하게 해결해준 것이다.
“후후후! 이런 선물까지 받았으니, 힘내서 황후 폐하께 하루빨리 조카를 만들어 드려야겠는걸?”
카트리나가 크게 기뻐하며 깔깔 웃었고, 레스티아는 수줍게 볼을 붉혔다.
“카트리나 언니. 행복해 보여서 무척 보기 좋아요.”
그러자 카트리나가 농담을 던지듯 말했다.
“맞아요. 행복하답니다. 제라르는 여전히 나쁜 남자지만 말이죠.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행복해.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
여전히 나쁜 남자라.
스쳐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레스티아는 그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리시언이 레스티아에게 솔직하게 혹은 과할 정도로 애정 표현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제라르는 여전히 무뚝뚝했으니 말이다.
제라르도 애정 표현만큼은 솔직해지면 좋을 텐데.
그럼 제라르와 카트리나는 서로 더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레스티아는 이번만큼은 제라르에게 한마디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공작 부부의 결혼식 당일, 레스티아는 제라르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그래. 할 말이 있다고.”
제라르는 카트리나가 손수 고른 하얀 결혼식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그 복장은 제라르의 더티블론드와 차가운 푸른 홍채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 날카로움과 차가움 탓에 공작가의 가신들 또한 흠칫 몸을 떨었으나, 레스티아는 조금의 떨림도 없이 제라르에게 말했다.
“네. 제라르 오라버니.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사실 걱정되는 부분이 하나 있어서요.”
“걱정?”
“네. 제라르 오라버니는 워낙 무뚝뚝하시잖아요. 저는 그게 걱정이에요. 카트리나 언니에게 애정 표현 많이 해주세요. 아셨죠?”
“…….”
제라르는 잠시 턱을 매만지더니 대답했다.
“카트리나는 진실을 볼 수 있는 마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굳이 애정 표현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
레스티아는 목소리에 힘을 줬다.
“그러니까! 애정 확인만큼은 마안을 쓰지 않도록 해야 해요. 진심을 말로, 행동으로 꼭 전해주세요. 이건, 먼저 결혼을 한 입장에서 드리는 조언이에요!”
“그런가.”
제라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그래. 명심하마.”
제대로 이해한 걸까?
레스티아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누르며 맹세의 서약을 나누는 제라르와 카트리나의 모습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레스티아의 곁에 앉아있던 리시언이 레스티아의 어깨를 슬며시 감싸 안으며 물었다.
“레스티아. 무얼 걱정하고 있어?”
“아. 제라르 오라버니가 무뚝뚝해서 걱정이에요. 두 사람, 별일 없이 잘 지내겠죠?”
“걱정 마.”
리시언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슬며시 레스티아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그 제라르가 직접 결정한 결혼이잖아?”
“그렇겠죠? 제가 괜히 걱정했나 봐요. 분명, 두 사람. 달콤한 신혼 생활을 즐길 거예요.”
……하지만 베르체스터 공작 부부의 신혼 생활은 달콤하지 못했다.
“아악!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제라르가 문제가 아니었다.
카트리나가 정신없이 바빴다.
신혼을 즐긴다고?
차라리 결혼 전이 더 신혼 생활 같았던 것 같다.
‘하여간. 내가 너무 유능해서 탈이야!’
그 생각 그대로 카트리나는 유능했다.
그녀는 록베스트 백작가의 수장이자, 진실을 볼 수 있는 마안의 마법사이자, 아카데미의 마법 연구 교수였다.
‘지도 교수 일은 잠시 휴가를 썼다고 쳐도.’
모르카티움 제국과 안개 섬의 마법 연구 교류를 전담하는 역할에서는 도저히 빠질 수 없었다.
신혼이랍시고 몽땅 모르는 척할 수도 있었지만, 카트리나는 애초에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학자로서의 호기심과 궁금증 자체가 무척이나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콤한 신혼이 무색하리만큼 업무에 뛰어들었다.
새신랑은 내버려 두고, 밤새 서재에 틀어박혀 있거나 안개섬으로 출장을 다녀오는 나날이 이어졌다.
‘내가 너무 제라르를 방치하고 있는 거 아닌가 몰라.’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카트리나는 제라르가 이 상황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다.
일정을 소화하는 몇 주 동안 별다른 말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래. 제라르는 사적인 일보다 공적인 일을 더 중시하는 사람인걸.’
그 사실이 조금 섭섭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카트리나는 차라리 제라르가 그런 성격인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다.
분명 그랬는데.
늦은 밤, 제라르가 불쑥 카트리나의 서재를 찾아왔다.
흐트러진 차림새로.
“카트리나. 오늘 밤도 바쁜가?”
라고 물으면서.
“응? 제라르?”
카트리나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살펴보고 있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한 채 대답하고 말았다.
“아, 미안해. 먼저 자. 나는 이 문서를 마저 정리하고 자야 할 것 같아.”
늘 하던 대로 하던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 말과 행동이 제라르의 심기를 건드린 듯했다.
“카트리나.”
제라르가 미간을 찌푸리고 카트리나가 앉아있는 책상으로 성큼 걸어왔다.
그러고는 카트리나가 읽고 있는 서류를 빼앗아 들었다.
“제라르? 무슨 짓이야?”
카트리나는 항의를 하기 위해 제라르를 바라봤다.
하지만 제라르는 단단한 팔뚝으로 카트리나를 그대로 책상 위로 안아 올려 강제로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두꺼운 책들과 서류들이 바닥으로 밀려 떨어져 나뒹굴었다.
“왜, 왜 그래? 갑자기?”
카트리나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자, 제라르가 짧게 답변했다.
“키스하려고.”
“뭐?”
“분명 키스는 허락받지 않기로 했었지. 잊었나?”
카트리나는 더 이상 항의할 수 없었다.
제라르의 입술이 카트리나의 입술 위로 포개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