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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125화 (125/132)

외전 15화

베르체스터의 혼담–마티어스 (2)

마티어스는 아침 일찍부터 레스티아를 찾아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리티, 리티! 그래서 꼬맹이가 나보고 뭐라는 줄 알아? ‘제가 레스티아의 친구라는 이유로 굳이 챙겨 주실 필요 없어요.’라는 거야.”

“네? 안젤라가요?”

레스티아는 당혹스러웠다.

마티어스가 선물 잔뜩 가지고 온 탓에 또 하루종일 마네킹 놀이를 해야겠구나 싶었는데, 뜬금없이 안젤라의 이야기라니.

둘이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마티어스와 안젤라는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면 둘은 항상 서로의 파트너가 되어 하루 종일 붙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친구의 오빠, 동생의 친구. 그 관계에서 좀처럼 변하지 않고 있었다.

레스티아는 그 점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남다른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언젠가는 두 사람이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마티어스의 말을 들어 보니, 마티어스는 여전히 안젤라를 동생의 친구로만 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혹시, 안젤라는 지친 걸까.’

하긴, 마티어스가 안젤라를 계속 동생 친구 취급만 했다면 그럴 만도 했다.

그 생각에 도달하자 레스티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하지만 마티어스는 그 사실을 조금도 모르는 듯, 레스티아를 괴롭힐 뿐이었다.

“리티, 듣고 있어? 그래서 말이야. 내가 대체 뭘 잘못한 거야? 나는 진짜로 이해하지 못하겠어. 여동생 친구한테 선물 사준 게 잘못이야?”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레스티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

“마티어스 오라버니. 정말로 안젤라를 제 친구로만 생각하고 계신가요?”

“어?”

레스티아의 질문에 마티어스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재빨리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최고로 좋은 오라버니는, 여동생의 친구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내가 꼬맹이도 챙기는 거지.”

“그런가요? 하지만 마티어스 오라버니. 이제 제 친구는 무척 많아요. 그런데 왜 안젤라만 챙기시는 거예요?”

“응……?”

마티어스는 레스티아의 지적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까 그랬다.

레스티아는 이제 과거와 다르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런데 마티어스는 계속 안젤라만 신경 쓰고, 따로 선물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마티어스 스스로에게도 안젤라가 특별하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마티어스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그 말을 부정했다.

“리티, 리티. 그야. 꼬맹이는 네 단짝 친구잖아? 단짝 친구니까, 내가 특별히 챙기는 거지.”

레스티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안젤라 문제로 레스티아에게 상담까지 하고 있으면서, 안젤라가 본인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니.

과연, 안젤라가 지칠 만도 했다.

게다가 마티어스는 언제나 레스티아부터 챙기는 시스터 콤플렉스를 가진 남자였다.

껍데기와 능력이 훌륭할지언정, 그건 정말로 매력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레스티아는 단짝 친구인 안젤라가 걱정스러웠다.

마티어스를 가족으로서 아끼고 사랑하고 있지만, 단짝 친구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겉돈다면 차라리 이쯤에서 서로의 관계를 정리하는 게 좋을지도.

그래서 마티어스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안젤라의 말이 맞아요. 제 단짝 친구라는 이유로 안젤라를 챙겨 주실 필요는 없어요.”

“응?”

레스티아가 안젤라와 똑같은 말을 꺼내자, 마티어스의 자색 눈동자에 곧바로 당혹감이 깃들었다.

“아셨죠? 제 단짝 친구라는 이유로 어젯밤처럼 불쑥 선물을 사 들고 찾아갈 필요도 없고, 무도회가 열릴 때마다 파트너로 삼을 필요도 없어요.”

무도회 파트너에 대한 이야기 나오자 마티어스의 말이 갑자기 더 빨라졌다.

“아. 꼬맹이랑 줄곧 파트너를 해온 건, 그냥 꼬맹이한테 춤을 가르쳐 준 게 나니까, 어쩌다 보니 계속 같이하게 된 거야.”

“네. 그러니까요. 이제 안젤라는 오라버니의 도움이 필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안젤라에게 이번 달에 열리는 가을 무도회에서는 다른 파트너를 만나 보라고 말할게요. 오라버니도 그렇게 하시고요.”

“뭐?”

“이제 안젤라도 다른 남자와 파트너를 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마티어스 오라버니와 파트너를 하게 된 건 ‘어쩌다 보니까.’잖아요. 서로에게 더 좋은 파트너가 있을지도 몰라요.”

레스티아의 말에 마티어스는 어젯밤처럼 또다시 굳어버렸다.

어젯밤, 큰 실수를 저질렀던 것 같은 그 불쾌한 감각.

그 감각의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안젤라가 자신을 거절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안젤라가 다른 사람을 파트너로 삼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리티, 미안해. 그건 하지 마.”

라며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그 후, 마티어스는 방금 전까지 수다스럽게 떠들었던 모습이 상상도 되지 않을 만큼 침묵했다.

마티어스가 그토록 싫어하는 제라르의 뺨을 두 번 치는 진지한 표정과 태도였다.

레스티아는 마티어스의 그런 태도와 표정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그래서 단짝 친구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알았어요. 마티어스 오라버니.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어요.”

* * *

안젤라 역시 어젯밤 마티어스와 그렇게 헤어지고 난 이후, 줄곧 기분이 좋지 않았다.

쓸데없이 속마음을 말한 걸까.

하지만 마티어스에게 언제까지나 동생의 친구로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품고 있는 이 호감을 고백할까 하다가도, 마티어스의 태도를 보면 받아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너는 그냥 내 동생 친구야.’ 하고 선을 그어 버리면 상처를 심하게 받을 것만 같았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안젤라는 꿈에서도 마티어스와의 미래를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레스티아가 만들어 준 마석 덕분에 이제는 보고자 하는 미래를 스스로 볼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마티어스 오라버니의 입으로 거절당하고 싶지 않아.’

그래, 그러니까 차라리 그냥 동생 친구로 남자.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휴.”

그럼에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분홍색 눈동자는 촉촉한 벚꽃처럼 물기가 어렸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글라리엔 부인이 말을 건넸다.

“안젤라. 걱정거리라도 생긴 거니?”

하지만 안젤라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는걸.”

“그래?”

“응. 엄마. 걱정 말아요.”

안젤라는 이제 엄마의 마음을 헤아릴 줄도 알았다.

예전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글라리엔 부인은 그 점이 괜히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래, 안젤라. 참. 이번에 열리는 추수감사절 무도회에는 무슨 드레스를 입고 갈 거니?”

글라리엔 부인은 안젤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딸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화젯거리를 꺼내 들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거든, 안젤라가 분명 드레스를 새로 사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 것이라 여겼다.

안젤라는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것도, 드레스를 골라 입는 것도 좋아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안젤라에게서 나온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엄마. 나, 이번에는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을래요.”

“뭐? 무슨 일 있는 거니?”

제대로 걷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춤추는 것을 좋아해서 무도회가 있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안젤라 아니던가.

“아니, 아니, 별거 아니야.”

어머니가 놀라는 모습을 본 안젤라가 재빨리 말을 첨언했다.

“그냥 피곤해서 쉬고 싶은걸.”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마티어스가 신경 쓰였다.

항상 마티어스를 파트너 삼아 무도회를 즐겼었는데,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파트너로 삼는 것도 별로고.

그냥 참석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글라리엔 부인은 속내를 감추는 딸 아이가 걱정스러웠지만, 안젤라의 뜻을 수용했다.

“그래. 안젤라. 그럼 이번에는 집에서 푹 쉬렴.”

“응. 그럴래요.”

안젤라는 그것으로 모든 일이 정리되었다고 여겼다.

이제 이대로 마티어스를 만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안젤라의 몸이 안 좋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마티어스가 곧장 안젤라를 찾아왔다.

안젤라가 밤 산책을 즐기는 와중에 말이다.

“야, 꼬맹이. 몸이 안 좋다며, 멀쩡해 보이는데?”

“꺅! 마, 마티어스 오라버니?”

마티어스의 방문은 마치 어젯밤의 데자뷰와 같았다.

“저, 정말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 그래, 내가 좀 무례해. 아무튼. 멀쩡해 보이는데 왜 무도회에 가지 않겠다는 거야?”

“……그냥 가기 싫어서요.”

“그런 거면, 그냥 같이 가. 나, 너랑 파트너 하고 싶단 말야.”

안젤라는 어이가 없었다.

막무가내로 찾아와서 막무가내로 파트너를 해달라고 요구하다니.

그래서 입술을 통통하게 부풀리며 말했다.

“싫어요. 이번에는 다른 파트너를 찾아보세요.”

그러자 마티어스의 자안이 평소와 다르게 짙어졌다.

“안 돼.”

단호한 목소리.

진지한 표정과 어투.

안젤라는 처음 보는 마티어스의 태도에 흠칫 놀랐다.

“안젤라. 나는 너 말고 다른 누군가를 파트너로 삼을 수 없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생각해 봤는데…… 나는 너랑 춤추는 게 제일 재미있는 것 같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말이었다.

하지만 안젤라는 그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야. 제가 레스티아의 친구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 레스티아는 이제 친구가 많잖아.”

마티어스는 어제 레스티아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을 응용해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넌 나한테 그냥 동생 친구가 아니야.”

“네?”

안젤라는 도통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 혼란스러움은 감춰지지 않고 얼굴에 바로 드러났다.

마티어스는 그 사실을 눈치채고는 안젤라에게 다가갔다.

“안젤라. 너는 어때? 나는 그냥 친구 오빠야?”

어둑한 밤하늘 아래 흩날리는 레몬빛 머리카락. 밤의 장막처럼 짙게 가라앉은 자색 눈동자.

“대답해줘.”

진중한 목소리가 마음을 흔든다.

마티어스가 진실해진 만큼, 안젤라 역시 진실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 것이다.

“제게 마티어스 오라버니는…….”

그래서 수줍게 고백하듯 대답했다.

“……그냥 친구 오빠가 아닌걸요.”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하지만 그 말은 목구멍에 콱 막혀서 쉬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티어스는 그것만으로 만족한다는 듯 활짝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밝고 명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앞으로는, 나를 남자로 생각해줘.”

“네?”

“난 아무래도 너를 여자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뭐, 뭐라고요?”

“그래. 네가 다른 놈 손을 잡고 춤을 춘다고 생각하면, 짜증 나. 무슨 짓을 해버릴 것 같아.

“말도 안 돼…….”

“그러니까 앞으로 나랑은 남자와 여자로 만나.”

마티어스의 뜻밖에 말에 안젤라의 다리가 풀렸다.

하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마티어스의 커다란 두 손이 안젤라를 붙잡았으니까.

두 사람이 처음 무도회에서 춤을 췄을 때처럼 말이다.

처음으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대화를 하지 않아도 알았다.

앞으로 열리는 무도회뿐만 아니라, 인생의 파트너는 서로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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