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베르체스터의 혼담–레스티아 (7)
레스티아는 베르체스터 형제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네가 어디에 있어도, 무엇이 되어도, 우리는 언제나 네 편이야.
“오라버니들…….”
베르체스터 공작가에서 생활하는 동안 형제들의 관심과 애정 덕분에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강해졌다.
누군가 자신을 믿어주고 지지해 준다는 힘이 이렇게도 크다.
그러니까, 두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고마워요.”
감사의 말을 전하자, 이상하게도 괜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뭐, 뭐야. 리티 우는 거야?”
“이런, 레스티아. 좋은 날인데 눈물을 보이다니.”
레스티아가 눈시울을 붉히자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되려 허둥지둥거렸다.
“나도 참, 왜 이럴까요. 오늘따라 이상해요.”
“…….”
제라르가 말없이 손수건을 건넸다.
레스티아는 붉어진 눈가를 몇 번 꾹꾹 누른 후, 제라르, 조엘, 마티어스와 한 번씩 짧은 포옹을 나누었다.
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깊게 서로를 위하고 있는지 느껴져서 또다시 위안을 받는 순간이었다.
그 덕에 레스티아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럼 가볼까요?”
레스티아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형제들과 함께 오늘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저택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곧바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성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공녀님! 결혼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세요!”
베르체스터 공작저의 기사들과 사용인들이 레스티아를 마중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레스티아는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했다.
“축하해줘서 고마워요.”
집사 헤일록과 하녀 도라도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왔다.
“흐흑. 공녀님. 처음 만난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크셔서 결혼까지 하시게 되신 걸까요.”
“결혼 정말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아니 황후 폐하. 곁에서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레스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도라, 헤일록. 늘 곁에서 할아버지처럼, 친언니처럼 저를 돌봐줘서 고마웠어요.”
“저희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공녀님께서 스스로 다 하셨지요.”
“그렇지 않아요. 덕분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는걸요.”
그랬다. 베르체스터 형제들뿐만 아니라, 공작가에서 자신을 위해 일해준 이들 또한 레스티아에게는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레스티아를 레스티아 베르체스터로 만들어 준 것은 주변의 환경이었으니까.
그들이 모셔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더 노력하게 되는 부분도 많았다.
그 노력하는 모습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다.
레스티아를 둘러싼 배경이 베르체스터 공작가에서, 모르카티움 제국으로 더 커지는 것뿐이었다.
“자주 놀러 올게요.”
레스티아는 헤일록과 도라와도 짧게 포옹을 하고 마차로 향했다.
마차 주변에는 세 명의 호위 기사들이 바짝 긴장을 한 채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부로 황후궁의 호위 기사단으로 소속을 옮기게 되었다.
“여러분. 황실 기사단 옷이 꽤 잘 어울리는데요?”
“하하! 공녀님. 어색해 죽겠습니다. 공작가의 기사단 복장과는 다르게 장신구들이 조금 치렁치렁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익숙해져야겠죠. 이제 저희는 황후 폐하의 호위기사니까요.”
“결혼식에서도, 앞으로도 완벽하게 임무를 해내겠습니다.”
레스티아는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네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베르체스터 저택 밖으로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결혼식이 진행될 신전이었다.
* * *
리시언은 신전에 도착해 일찍이 결혼식 예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리사가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한 예복은 세련되고 기품이 넘쳤다. 리사는 이 예복을 만든 후, 자신이 역작을 탄생시켰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리사는 예복을 모두 갖춰 입은 리시언의 모습을 보고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이 너무 잘생기면, 잘 만든 옷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것을.
촘촘하게 박아넣은 보석도, 금빛 실로 정성껏 자아낸 자수도 리시언의 외모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았다.
오늘 리시언은 아름다웠다.
깔끔하게 드러낸 이마, 그 아래 자리 잡은 황금색 홍채가 오늘따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리시언은 자신이 어떤 모양새인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베르체스터의 마차는 도착했나?”
레스티아가 제대로 오고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마차가 도착하는 대로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벌써 몇 번째 묻는 질문인지 모른다.
대체 레스티아는 언제 오는 거지? 초조하다. 목이 바싹바싹 마르고 애가 탄다.
이상한 일이다. 오늘이면 완벽하게 레스티아를 곁에 둘 수 있게 되는데, 왜 이렇게 초조한 마음이 드는 걸까.
완벽하게 거머쥔 순간을 혹여라도 놓칠까 조마조마한 걸까.
그 두려움은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마차가 신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레스티아가 예복을 차려 입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리시언.”
레스티아를 이렇게 바로 눈앞에 두기 전까지 말이다.
“오래 기다렸죠? 신부는 준비 해야 할 게 참 많더라고요.”
마침내 레스티아가 모든 준비를 끝내고 리시언과 결혼하기 위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레스티아…….”
리시언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레스티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순백의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레스티아는 그 어떤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촘촘한 레이스가 자연스럽게 데콜테를 따라 흐르듯 내려와 우아한 느낌을 주었고, 구름처럼 하얀 머리카락 위로는 리시언이 그렇게 올려주고 싶었던 티아라가 반짝였다.
기다란 면사포가 드리워진 레스티아의 모습은 마치 여신의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신비롭기만 했다.
계속해서 리시언을 초조하게 만들었던 불안감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그 대신 리시언은 자신이 바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정말, 정말 아름다운데.”
멍청이가 된 것처럼 이런 말을 내뱉다니.
더 멋진 말을 해야 했는데,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지.
입에서 저절로 나온 말이 너무 머저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조금도 개의치 않은 듯 밝고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리시언도 오늘 무척 멋있어요.”
그 말에 리시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멋지다는 말을 듣는 게 왜 이렇게 기쁘지?
앞으로는 자주 이렇게 꾸미고 다녀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여전히 홀린 듯이 레스티아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는 리시언에게 레스티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갈까요?”
“……그래.”
리시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레스티아가 내민 손을 잡아 자신의 팔 위로 올렸다.
그리고 이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함께 식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신전의 야외에서 진행되는 결혼식은 성화에 묘사된 천국의 들판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 같았다.
향기로운 꽃향기와 잔잔히 울려 퍼지는 음악들.
세상의 모든 귀한 것과 화려한 것들을 모아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낙원의 풍경.
그 풍경 속에서 리시언과 레스티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결혼식에 참석한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들을 바라봤다.
세이튼 온리드라스의 주도하에 황실 기사단이 일제히 검을 올려 두 사람을 맞이했다.
레스티아와 리시언은 손을 꼭 잡고는 그 사이를 지나 한 걸음 한 걸음 신관을 향해 다가갔다.
그 모습은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할 만큼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레스티아를 조금 걱정하고 있던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이제 안심할 수 있었다.
레스티아가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무엇이 더 필요할까.
마침내 두 사람이 신관의 앞에 섰다.
“위대하신 신 앞에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을 선언하겠습니다.”
신관의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제 서로 사라질까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
욕심껏 서로의 곁에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레스티아와 리시언은 그 욕심이 영원히 메마르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서로를 욕망하지 않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레스티아.”
결혼 서약의 맹세가 끝나자, 리시언이 레스티아의 양손을 잡아 부드럽게 자신을 향해 끌어당겼다.
그리고 천천히 레스티아의 손가락에 제 입술을 찍었다.
“리시언?”
레스티아는 눈을 크게 뜨고 리시언을 바라봤다.
리시언의 주변으로, 식장으로 리시언이 마법으로 만들어낸 금빛 나비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황금 나비라니?”
“황제 폐하의 마법이군!”
“세상에 아름다워라!”
그 환상적인 모습에 결혼식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관객들 사이에서도 짧게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레스티아와 리시언을 방해할 만큼은 아니었다.
리시언이 레스티아를 바라보며 근사하게 미소 지었다.
“반지. 나도 네게 주고 싶어.”
“반지요?”
“그래.”
황금빛 나비들이 레스티아와 리시언의 주변으로 너울거리며 날아오르더니 환한 빛이 되어 레스티아의 손위로 태양 빛처럼 스며들었다.
곧바로 레스티아의 손가락 위로 가느다란 금빛 반지가 자리 잡았다.
쇠나 금으로 만든 반지가 아닌, 리시언의 마력으로 만들어낸 반지였다.
마치 레스티아가 만들어내는 마석처럼.
“리시언 이건……?”
“어설프지만 너를 따라 흉내 내 봤어.”
“그게 가능한 거예요?”
“해보니까 되더라. 하지만 너처럼 효능이 있는 마석은 못 만들어.”
하여간 대단한 남자.
레스티아는 이대로 가다가는 리시언이 못 다루는 마법이 뭐가 있게 될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리시언은 기쁜 듯 말했다.
“네가 내게 준 반지가 영원히 내 손에서 빛나듯. 이 반지도 영원히 네 손에서 빛났으면 해.”
이제 리시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레스티아가 만들어준 반지가.
레스티아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리시언이 만들어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과 사랑이 담긴 의미 있는 물건들이었다.
리시언은 다시 한 번 고백했다.
“사랑해. 레스티아.”
레스티아 역시 다시 한 번 답변했다.
“사랑해요. 리시언.”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를 감싸 안고 맹세의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그 어느 때 나누었던 키스보다 경건했지만, 뜨겁고 또 애틋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 축복을!”
“축하드립니다!”
사방에서 박수 소리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개섬의 마법사들이 이 결혼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수도 전체에 꽃비가 내리는 환상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하늘거리는 꽃잎이 사방으로 흐드러지며 두 사람을 축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