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베르체스터의 혼담–레스티아 (4)
결혼식까지 앞으로 한 달.
국혼은 큰 어려움 없이, 계획했던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리시언 역시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결혼식 날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곧 레스티아는 완벽하게 리시언의 곁에 있게 된다.
오랫동안 욕심부렸던 것이 마침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찾아온 뜻밖의 존재와 면담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모르카티움 제국의 새로운 황제여, 그대는 해석하는 자의 마법 부작용을 알고 있습니까?”
안개섬의 장로가 리시언에게 전할 말이 있다며 직접 리시언을 찾아와 해석하는 자의 마법 부작용에 대해 거론한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 말은 레스티아가 마법 부작용을 겪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정보에 리시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해석하는 자가 마법사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이미 오래전에 했었다.
하지만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레스티아가 성년이 되는 동안, 마법사 가문의 사람들이 가진 신체적 부작용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리시언처럼 불면증에 시달리는 일도 없었고 말이다.
그래서 내심 해석하는 자는 마법사들과 다를 거라고 여겼다.
그러니까, 레스티아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혹시, 라난테 가문처럼 마법을 쓰면 쓸수록 생명력이 고갈되는 것이라면…….
리시언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표정을 차갑게 굳힌 채 맹수처럼 장로를 노려봤다.
“제대로 말해.”
“허허. 역시, 모르는 눈치군요.”
장로는 길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차분한 시선으로 관찰하듯 리시언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모르카티움의 젊은 황제여.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그대는 특이한 마력을 가지고 있군요. 황금빛 홍채라. 금빛 마력은 고대 마법의 퇴색되지 않은 결정체지요. 그 힘을 모르카티움 황가가 가지게 될 줄이야. 그리고 해석하는 자를 반려로 맞이할 줄이야. 신기한 일이야.”
하지만 리시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당장 레스티아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데, 고대 마법이라는 케케묵은 이야기 따위가 전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마법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부수적인 것이다.
행복은 마법 따위에서 나오지 않는다.
리시언의 행복은 레스티아와 함께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헛소리 집어치워. 해석하는 자는 무슨 부작용을 가지고 있지? 그걸 말하라고.”
하지만 안개섬의 장로는 여유롭게 허허 웃으며 사람 좋은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역시, 레스티아가 황제 폐하께는 말해 주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 아이는 이미 부작용에 대하여 다 알고 있답니다.”
뜻밖의 말에 리시언의 눈이 커졌다.
“……레스티아가 알고 있어?”
“예. 레스티아는 제가 가르쳤던 아이지요. 안개섬에 왔을 때부터 알려 주었답니다.”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지?
레스티아, 설마.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여태까지 숨긴 건가? 걱정할까 봐, 미안해할까 봐.
그동안 수많은 마석들을 만들어 내는 동안 계속 숨겨 왔던 걸까.
레스티아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그 생각을 하니, 리시언은 미칠 것 같았다.
처음으로 불안감에 손이 떨렸다.
레스티아가 끼워 준 반지가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이런, 레스티아.”
눈앞에 있는 장로도,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자리를 박차고 곧바로 베르체스터 공작가로 향했다.
지금 당장 레스티아를 만나야 했다.
레스티아의 입으로 진실을 들어야 했다.
* * *
“레스티아는 어디에 있지?”
조엘과 마티어스는 갑작스레 공작가로 쳐들어오다시피 찾아온 리시언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야, 리시언. 분명, 함부로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황제 폐하, 국혼의 날짜가 잡혔다고 하여도, 아직 제 동생은 미혼의 귀족 영애입니다. 이건 무척이나 무례한 처사입니다.”
하지만 리시언은 지금, 평소처럼 베르체스터 형제들을 상대해 줄 심적 여력이 없었다.
이전처럼 남몰래 레스티아를 찾아갈 생각도 못 했을 만큼,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비켜서.”
리시언은 주저 없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조엘과 마티어스를 지나쳐 곧장 레스티아의 방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쾅.
갑작스레 리시언의 눈앞에 거대한 암벽이 나타났다. 마티어스가 마법으로 리시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리시언, 안 된다고 했잖아. 베르체스터에 왔으면 베르체스터의 규칙을 따라.”
“마티어스, 지금 너랑 장난할 시간 없어.”
리시언은 맹수가 낮게 울듯 살기를 내비쳤다.
“뭐? 장난? 네 눈에는 이게 장난 같냐?”
화가 난 자안과 금안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와 동시에 리시언이 마법을 사용해 그 암벽을 부숴 버렸다.
파스스스.
암벽은 고운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흩어졌다.
“하? 뭐야, 너. 진짜로 해보겠다는 거지?”
마티어스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는지, 이를 으득 갈고는 맞대응했다.
쾅. 쾅. 쾅.
곧바로 더 많은 암벽을 겹겹이 만들어 리시언의 앞을 막아섰다.
리시언이 곧바로 암벽들을 없앴으나, 마티어스는 지칠 줄 몰랐다.
“너.”
리시언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끝까지 해보자는 건가.
얼마든지 상대해 줄 수 있지만, 이대로라면 곧 조엘까지 마티어스를 도울 기세였다.
그렇게 되면 레스티아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시간만 늦춰질 뿐이었다.
한시 한때가 급한데.
“그래.”
리시언은 조급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대화를 시도했다.
자신이 미칠 것 같아도,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레스티아의 가족이니 존중할 필요도 있었다.
“그만둬. 싸울 시간 따위 없어. 한시라도 빨리 레스티아한테 해석하는 자의 마법 부작용이 나타났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뭐? 마법 부작용?”
리시언의 말에 조엘과 마티어스가 동시에 얼어붙었다.
“안개섬의 장로가 나를 찾아왔어. 해석하는 자에게 마법 부작용이 있다는 말을 하더군.”
“리시언, 그게 무슨 말이지?”
“뭐? 리티한테 뭐가 있다고?”
조엘과 마티어스의 반응을 보니, 레스티아는 자신의 가족들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희도 몰랐나.”
“리, 리티! 마, 말도 안 돼!”
마티어스가 충격을 받은 듯 제일 먼저 레스티아가 있는 곳으로 달려 나갔다.
조엘과 리시언 역시 거친 걸음으로 레스티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레스티아는 방에 있었다.
“리티!”
마티어스가 방문을 부수다시피 열어젖히려고 할 때였다.
도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티어스 도련님! 이게 무슨 짓이세요! 지금 들어가시면 안 돼요! 아가씨는 드레스를 가봉하는 중이란 말이에요! 가봉이 끝날 때까지 밖에 계세요!”
세 남자들은 애가 탔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고 있는 와중에 불쑥 들어갈 수는 없으니 어쩌겠는가.
레스티아의 가봉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방 밖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세 남자는 레스티아의 방문 앞에서 초조하게 서 있었다.
일 분 일 초가 천년만년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온갖 상상을 하게끔 하는 시간의 늪.
지옥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레스티아의 방문이 열렸다.
“자, 도련님들 이제 들어오셔도 좋아요.”
세 남자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새로 맞춘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레스티아가 눈에 들어왔다.
레스티아가 뒤를 돌아보자, 드레스에 달려 있는 고급스러운 백진주 장식이 아름답게 흔들거렸다.
하지만 그 장식보다 살랑거리는 레스티아의 머리카락이 더욱 아름다웠다.
“리시언? 오라버니들? 다 같이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밖에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는데 설마 싸우신 건 아니죠?”
자신보다 남을 걱정하는 레스티아의 모습이 익숙했다. 레스티아는 늘 그랬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닫고 나니 리시언을 비롯한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여태까지 자신의 마법 부작용도 숨기고 저렇게 밝게 지냈단 말인가.
그것도 모르고 자신들은 레스티아가 만들어 준 마석들의 효능을 신나게 누리고 있지 않았나.
세 남자들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왜 마법사로 태어났을까. 그 사실이 미치도록 역하게 느껴졌다.
“저기, 다들 표정이 왜 그래요?”
세 남자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레스티아는 곧바로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이거 피로연에서 입을 드레스인데, 혹시 저한테 안 어울리나요? 너무 과한가요?”
새 신부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조엘과 마티어스가 곧바로 드레스를 칭찬했다.
“아니야, 레스티아. 정말 잘 어울려.”
“그래요?”
“그래. 리티, 정말 예뻐!”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그래, 정말 예쁘단다.”
레스티아는 방긋 웃으며 가봉을 끝낸 리사에게 피로 회복 마석을 건넸다.
촉박한 일정을 맞추느라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면서.
그러자 리시언이 레스티아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하지 마. 이런 거.”
“네?”
“이런 거 만들지 말라고, 앞으로는.”
레스티아는 당황해서 리시언을 올려다봤다.
이런 표정의 리시언은 처음이었다.
리시언뿐 아니라 조엘과 마티어스의 표정에서도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 느껴졌다.
레스티아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무슨 일이지?
왜인지 리시언도 화가 나 있고, 마티어스와 조엘도 화가 나 보였다.
레스티아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가봉을 도와주던 이들을 방 밖으로 물러나게 했다.
“대체 무슨 일이죠? 다들 왜 이래요?”
“레스티아.”
리시언이 레스티아의 양어깨를 꽉 잡고 시선을 맞춰 왔다.
“……나한테, 우리한테 숨기는 거 없어?”
“네? 숨기는 거요?”
레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조엘과 마티어스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쳤다.
“그래! 리티! 리시언에게 말할 수 없는 거라면 이 오라버니에게라도 털어놔!”
“그래, 당장 리시언을 나가게 할 테니까. 가족들에게는 이야기해 줘, 레스티아.”
레스티아는 이게 무슨 일이지 싶어서 눈을 깜박였다.
다들 걱정 어린 시선으로,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잔처럼 레스티아를 대하고 있지 않은가.
“저기, 저는 다들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이제 숨기지 않아도 돼, 레스티아.”
리시언이 거칠게 한숨을 내뱉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레스티아, 해석하는 자에게도 마법 부작용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
레스티아는 뒷걸음치며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