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베르체스터의 혼담–레스티아 (2)
황궁에서 나온 시종장이 레스티아에게 국혼의 의례적인 절차를 알려 주었다.
“……해서 국혼의 기본 절차는 모두 설명해 드렸습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모든 절차를 베르체스터 공작 영애의 뜻에 따라 진행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시종장은 그 말을 끝으로 필요한 것은 황실에서 모두 처리할 것이니, 언제든지 자신을 불러 달라고 말하고 물러났다.
‘어떻게 한다.’
레스티아는 정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자신이 어떤 결혼을 하고 싶은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몇 가지 계획을 세워 둔 다음, 리시언과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지.’
전통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리시언과 자신에게 어울리는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목표였다.
‘의복은 이렇게 처리하면 좋을 것 같고. 의장은 이 정도로면 될 것 같은데……. 절차는…… 이렇게 하면 될까?’
처음에는 엄두도 안 나던 계획들이었으나, 막상 해 보니 재미있게 느껴졌다. 이미 오래전에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승전 파티를 관리해 본 경험 때문일까.
하지만 이건 공작가의 파티가 아니다. 국혼이니만큼 나라 안팎에서 손님이 많이 올 것이다. 승전 파티보다 준비하고 생각해 볼 것이 많았다.
한참 서류를 붙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포르르.
서류 위로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어?”
평범한 나비가 아니었다.
“이건.”
곧바로 익숙한 만큼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레스티아.”
고개가 자연스럽게 목소리의 방향으로 향했다.
“리시언?!”
레스티아는 화들짝 놀라 큰 목소리로 리시언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 나야.”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레스티아와는 다르게, 리시언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느릿한 걸음으로 레스티아를 향해 다가섰다.
“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요?”
“흠, 글쎄.”
리시언은 한참 전부터 멀찍이 서서 레스티아가 고민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무언가를 연신 쓰기도 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신경 쓰는 모습이 질투가 나서, 슬쩍 마법으로 나비를 만들어 보낸 것이다.
만약 나비를 모른 체했다면 무척이나 서운할 뻔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자마자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예쁜 미소를 제게 지어 주었다.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그 행동이 못 견딜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이렇게 자신을 찾아온 리시언이 걱정스럽기만 했다.
“오라버니들이 결혼 전까지는 이렇게 집에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레스티아, 그 말에 곧이곧대로 따르다가는 우리는 결혼식 때까지 얼굴 한번 못 볼 거야.”
“……그렇겠죠?”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리시언과 레스티아를 쉽게 만나게 두지 않았다.
리시언이 레스티아를 만나려면 저택의 문 앞에서부터 베르체스터 형제들의 취조에 가까운 질문을 받아야 했으니까.
언젠가는 꼼짝없이 붙잡히는 바람에, 리시언은 12시간 가까이 응접실에서 레스티아를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간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몰래 만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만나는 거, 오라버니들이 알면 화낼지도 몰라요.”.
“그래, 알게 되면 말이지.”
리시언은 단언했다. 마치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리시언의 방문을 결코 알지 못하리라는 것처럼.
“앗! 그러고 보니까! 여기까지 오시는데 마력은 어떻게 숨기신 거예요?”
마법을 써서 이곳까지 들어왔다면 마력이 느껴졌을 텐데. 레스티아는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리시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해 보니까 됐어.”
“네? 정말요?”
그게 가능한 건가?
레스티아가 리시언에게 마력 중화석 반지를 선물한 이후, 리시언의 마력 활용 능력은 감히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그렇다고 해도, 사용한 마력을 숨기는 것까지 해내다니.
리시언은 여러모로 대단한 능력을 갖춘 마법사였다.
“레스티아.”
레스티아의 곁으로 리시언이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허리를 가볍게 숙이곤 유혹하는 듯한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는 어때? 너도 네 오빠들처럼 내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면 싫어? 돌아갈까?”
그리고 허락을 기다리는 커다란 강아지처럼 우두커니 서서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기품 있고 차가운 미남자가 마음이 아릴 정도로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레스티아는 새삼 자신이 리시언의 이런 표정에 한없이 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저 예쁜 금색 눈.
꿀이 떨어질 것 같은 저 눈으로 레스티아를 빤히 바라볼 때면, 레스티아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싫을 리가 없잖아요.”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리시언은 입꼬리를 근사하게 말아 올리며 양팔을 슬쩍 벌렸다.
“그럼, 이리 와.”
레스티아는 결국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 리시언에게로 다가갔다.
리시언은 커다란 손으로 레스티아의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당겼고, 레스티아는 거의 끌려가듯 리시언의 품 안에 깊숙이 안겼다.
“저기, 리시언. 갈수록 능구렁이 같은 거 알아요?”
“어쩔 수 없어, 레스티아. 나는 너를 이렇게 품에 안을 수 있다면, 난 뭐든 할 수 있으니까.”
하여간. 예전에는 다가갈 때마다 더 멀어지는 나쁜 남자였는데, 언제 이렇게 변한 걸까?
하지만 레스티아는 변한 리시언이 싫지 않았다.
품 안의 온기는 익숙한 만큼 따뜻했고, 정말 신기하게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그리움을 주었으니까.
그것은 리시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레스티아를 더 강하게 품 안에 붙잡았다.
“……결혼식 꼭 해야 해? 그냥 이대로 나랑 황궁으로 가자.”
레스티아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황제 폐하, 그건 안 돼요. 부디 체통을 지키세요.”
“……넌 너무 단호해. 그래서 나는 가끔 속상해.”
또 상처받은 표정.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표정 지어도 안 돼요.”
레스티아는 단호했다.
“알았어. 네 말을 따를게.”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목덜미에 잠시 깊게 얼굴을 묻었다가, 아쉬운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혼례 절차가 담긴 서류를 바라봤다.
“결혼 준비, 복잡하고 힘들지 않아? 꼭 네가 직접 할 필요는 없어. 그래서 사람을 보낸 거야.”
레스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복잡해도 제가 하고 싶어요. 우리 결혼식이잖아요.”
“……그래. 우리 결혼식이지.”
리시언은 ‘우리 결혼식’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속으로 되새김질했다.
그 말이 불러오는 행복감이 왜 이렇게 큰지.
“그래서 말인데요, 리시언. 제가 생각해 봤는데 이 절차는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
레스티아는 내친김에 결혼식 절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떤 결혼식이 하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별다른 의견 충돌 없이 서로의 생각은 간략하게 좁혀졌다.
우리를 위한 결혼식인 만큼, 의미 있는 것으로 채우고, 소중한 사람들의 축복을 받는 것.
“저는 그거면 충분해요.”
“그래?”
“네!”
“음.”
리시언은 기뻐하는 레스티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레스티아, 결혼식 이후 일정은 내게 맡겨 줄 수 있어?”
“결혼식 이후 일정이요?”
“응. 그건 내가 따로 준비하고 싶은 게 있어서. 네가 싫다면 안 할 거지만.”
레스티아는 시종장이 말해 주었던 결혼식 일정을 떠올렸다.
결혼식이 끝나면 피로연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
뭘 따로 준비한다는 거지?
의아했지만, 리시언이 결혼식에 관해서 이렇게 직접 원하는 것을 말한 적은 처음이라 레스티아는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알았어요. 리시언에게 맡길게요.”
“고마워.”
리시언은 그저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 * *
“리사! 제발 다시 우리 푸른 리본 의상실로 돌아와서 일해다오! 우리는 네가 필요해!”
성년제 이후, 리사는 매일같이 자신을 찾아오는 푸른 리본 의상실의 수석 디자이너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그러나 리사는 다시 푸른 리본 의상실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끈질기게 늘어지는 수석 디자이너를 뻥― 걷어찼다.
“아, 진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저리 가세요!”
이 정도로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거부의 의사를 전했으니 포기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으윽! 리사! 원한다면 반대쪽 발로도 차거라! 네가 우리 의상실에서 일해 주기만 한다면, 나는 너만을 위한 발 닦개가 될 거야!”
수석 디자이너는 집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 성년제 이후, 리사의 명성과 몸값이 말도 안 되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베르체스터 공작 영애와 글라리엔 백작 영애의 성년제 옷을 맞춘 디자이너가 바로 리사였다.
두 영애가 입고 왔던 드레스들이 모든 이들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았던 것이다.
고급스러운 소재를 잔뜩 사용했음에도 천박하게 느껴지지 않는 고매한 디자인.
세간은 리사를 ‘고급스러움을 절제하여 더욱 고급스럽게 표현하는 기품 있는 디자이너’라 평가했다.
보면 볼수록 드러나는 숨겨진 화려함. 그 신선함이 제국의 모든 귀족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 결과 리사는 단숨에 수도의 패션계에서 떠오르는 샛별이 되었다.
이제 푸른 리본 의상실은 다시 그녀를 의상실에 데려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리사는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하지만 수석 디자이너가 벌써 몇 날 며칠 동안 스토킹이라도 하듯이 찾아오고 있었다.
지긋지긋하게도.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세요! 저는 제 의상실을 차릴 거라고 했잖아요! 푸른 리본에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리사는 바닥에 엎드린 푸른 리본 의상실의 수석 디자이너를 가뿐하게 지나쳤다.
그러고는 이제 새 출발을 시작하게 될 빈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은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빈 공간.
리사는 이곳에 의상실을 차릴 생각이다.
“이제 여기가 내 의상실이야.”
이곳에서 어려서부터 꿈꿔 왔던 오랜 소원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나한테 이런 기회가 올 줄 몰랐어.”
리사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고아다. 성격도 음울했고 시력도 좋지 못해서, 고아원 내에서도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레스티아가 고아원에 기부해 준 인형 두 개가 리사의 인생을 바꿨다.
―이건 뭐지? 너무 예쁘다.
인형이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옷, 레이스, 촘촘한 자수, 장인이 깎아 만든 상아 단추.
그 의상에 한눈에 반하고 만 것이다.
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