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베르체스터의 혼담–레스티아 (1)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 이후, 모르카티움 제국은 정치, 사회적으로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라 안팎으로 살펴야 할 일이 많았기에, 황제의 최측근인 베르체스터 공작가 또한 그를 보좌하기 위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 바쁜 와중에도 베르체스터 형제들의 중요한 일과는 변하지 않았다.
그건 바로 온 가족이 함께하는 아침 식사 시간이다.
“오라버니들! 좋은 아침이에요!”
레스티아는 식당으로 들어서자마자 명랑한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넸다.
“레스티아, 어서 오렴.”
조엘이 제일 먼저 레스티아를 반겨 주었다.
조엘의 에메랄드 빛 시선은 오늘도 변함없이 따뜻한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레스티아를 응시했다.
레스티아는 배시시 웃으며 눈인사를 건네곤 곧바로 조엘의 곁으로 향했다.
“어? 조엘 오라버니, 커피 향이 너무 좋아요. 평소와 다르게 무척 고소한 향기가 나네요?”
“역시 내 동생은 날카로워. 그래, 이 커피는 헤이즐넛 향이 가미된 것이란다. 얼마 전에 남부에 갔을 때 사 왔지. 한번 시음해 보겠어?”
“네! 좋아요!”
레스티아는 냉큼 조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곧바로 레스티아의 앞에 커피 잔이 놓였다.
푸른 넝쿨무늬가 멋스럽게 수놓인 커피 잔 안에는 방금 내려서 뽀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암갈색 커피가 담겨 있었다.
레스티아는 그것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는 곧바로 기분 좋게 눈꼬리를 접었다.
“와아……! 고소하고 쌉싸름해요!”
“그렇지? 여기 스콘이랑 같이 곁들여 먹어 보겠니?”
레스티아는 조엘이 건넨 접시에 담긴 갓 구운 스콘을 입속에 넣고는 다시 한번 커피를 마셨다.
스콘이 사르르 혀끝에서 부서지며 담백한 향기가 입속에 감돌았다.
레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특유의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와아!”
“하하, 레스티아. 뭘 그렇게 놀라?”
“조엘 오라버니는 정말 미식가예요! 어떻게 늘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을 찾아낼 수 있는 거죠? 이 커피, 스콘이랑 너무 잘 어울려요!”
조엘은 대답 대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오래전부터 레스티아의 간식을 챙겨 주던 조엘이었다.
이제 레스티아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고르는 일쯤은 일도 아니었다.
‘내 여동생은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 주는 독특한 향미를 좋아하는 편이지.’
하지만 조엘은 이 사실을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가장 맛있는 간식을 챙겨 주는 미식가 오라버니의 자리를 독점하는 건 상당히 즐거우니까 말이다.
레스티아가 자신이 건네준 음식을 이렇게 방긋방긋 웃으며 먹는 모습이 어찌나 보람찬지. 다른 형제들에게 이 자리를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속내를 알 리 없는 레스티아는 조엘이 준비한 음식을 다른 형제들과 나누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제라르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드셔 보셨어요? 이 커피 엄청 맛있어요!”
레스티아가 건너편에 앉아 있는 제라르에게 살갑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래.”
언제나처럼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변함없이 서늘하고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푸른 눈빛은 대화를 이어 갈 수 있는 조금의 틈도 내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레스티아는 제라르의 눈빛에서 미묘한 감정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
오늘따라 제라르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왜 오늘은 신문을 안 읽고 멀찍이 치워 놓으신 거지?’
제라르는 조금이라도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침 식사 시간에도 항상 신문을 읽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늘은 신문이 담긴 트레이가 식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제라르 오라버니, 오늘은 신문을 안 읽으시나요?”
“그래.”
“왜요?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무 일도 없다.”
아무 일도 없다지만, 어쩐지 노기가 느껴지는 듯한 목소리.
레스티아는 본능적으로 신문이 제라르의 심경을 거슬리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시 베르체스터 공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쁜 기사로 실리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베르체스터의 이야기가 신문에 실린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온갖 뜬소문과 가십으로 범벅된 기사도 숱하게 많았다.
제라르는 항상 그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세간이 무어라 떠들어도 하찮은 것일 뿐, 그 무엇도 베르체스터 공작가에 작은 흠집 하나 낼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확인해 봐야겠어.’
레스티아는 신문의 내용을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럼 오늘은 제가 신문을 봐도 될까요?”
하지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라르가 곧바로 스콘을 포크로 콕 찍어 손수 레스티아의 입가로 가져갔다.
“제, 제라르 오라버니?”
레스티아는 어리둥절해졌다.
그 무뚝뚝한 제라르가 직접 이렇게 레스티아의 입속에 음식을 넣어 주다니.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조엘 역시 조금 놀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신경 쓰지 말고, 스콘이 식기 전에 더 먹거라.”
“네? 네……!”
레스티아는 당황한 나머지 얼떨결에 대답하고는 스콘을 받아먹었다.
하지만 제라르의 기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커피도.”
“고, 고마워요. 제라르 오라버니.”
레스티아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조엘을 곁눈질로 힐끗 바라봤다.
제라르가 이런 기행을 하는 이유를 조엘이 설명해 주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조엘은 빙그레 웃으며 놀란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사용인들에게 커피를 더 내려오라 지시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따라 이상한 것은 제라르뿐만이 아니었다.
식당에 마티어스가 안 보였다.
항상 매일 아침 누구보다 먼저 식당에 도착해서는 레스티아의 인사를 요란스럽게 받아 주던 마티어스가 아니던가.
“저기, 마티어스 오라버니는 아직 안 오셨나요? 늦잠이라도 주무시고 계신 걸까요?”
“아, 마티어스는 일이 생겨서 잠깐 밖에 나갔어.”
“밖에요? 아침 식사도 안 하고요?”
“걱정할 필요 없단다. 식사 시간까지는 돌아오기로 했으니까.”
“네?”
조엘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콰르릉.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며 저택의 건물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마티어스가 거친 걸음으로 식당에 들어왔다.
밖에서 무엇을 하고 온 것인지, 묘하게 흐트러진 차림새에 숨이 차 보이는 모습.
아침 햇살을 투영하는 자색 홍채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폭력성이 뚝뚝 묻어 나오고 있었다.
“마티어스 오라버니?”
“리티, 리티! 좋은 아침이야!”
하지만 그 폭력성은 레스티아를 마주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자취를 감추었다.
“아, 배고파. 빨리 밥 먹자!”
그리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레스티아의 옆자리에 개구쟁이처럼 풀썩 앉았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목격하고 말았다. 마티어스가 입고 있는 외투 끝자락에 살짝 튄 듯 묻어 있는 검붉고 수상한 자국을…….
“마티어스 오라버니! 옷에 이상한 얼룩이 묻어 있어요. 이게 뭐죠……?”
“아?! 별거 아니야. 아무래도 시럽이나 소스를 흘렸나 봐.”
마티어스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말하며 히쭉 웃었다.
천진난만해 보이는 표정이 방금 전과는 다르게 무해해 보였다.
“소스가 묻은 거라고요? 방금 식당에 들어오셨잖아요?”
“으흠~ 그러게? 아무래도 어제 흘린 건가 봐!”
“네? 하지만.”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세탁물 관리를 그렇게 허투루 할 리가 없는데.
하지만 마티어스는 레스티아가 외투를 관찰하지 못하도록 시중을 드는 사용인에게 건네 버렸다.
“리티, 리티! 나, 배고프다니까!”
그렇게 시작된 아침 식사.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 갔다.
그 시간은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레스티아는 오라버니들의 조금 수상했던 행동들에 더 이상 의문을 표하지 못했다.
게다가 레스티아는 요즘 정신없이 바빴다.
“공녀님, 방금 황실에서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식사가 끝나셨으면 바로 준비시킬까요?”
“아! 맞다! 네, 준비해 줘요.”
국혼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일은 가문의 웃어른이 도맡아야 할 일이지만, 베르체스터 공작가에는 그 일을 맡을 만한 어른이 없었기에 모든 것들을 레스티아가 처리해야 했다.
오늘은 황실에서 시종장을 보내기로 한 날이었다.
황실 법규에 맞게 이것저것 의전을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오라버니들, 저 먼저 일어날게요!”
“그래, 레스티아. 어서 가 보렴.”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식당 밖으로 나서는 레스티아를 배웅해 주고는, 그제야 레스티아가 결코 알 리 없는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마티어스, 일은 잘 처리하고 왔겠지?”
“당연하지. 괘씸한 것들을 그냥 둘 수 없잖아? 다시는 그딴 저급한 글귀들을 쓸 수 없게 만들어 주고 왔어.”
“잘했다.”
세 형제들의 시선이 동시에 신문이 담긴 트레이에 닿았다.
신문의 첫 면이 모두 황가와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혼사에 대한 이야기로 뒤덮여 있었다.
[황제 폐하의 반려는 베르체스터 공작 영애! 국혼은 초읽기!?]
[베르체스터 공작 영애, 그녀는 누구인가!]
이렇게 혼사에 대한 기사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레스티아 베르체스터! 베일에 싸인 그녀의 수상한 소문 999가지.]
[베르체스터 공녀는 진짜 베르체스터가 맞는가! 사실은 가짜?]
이처럼 자극적이거나.
[황제 폐하를 유혹한 요부는 누구인가.]
[수년간 묘연했던 베르체스터 영애의 행방. 유학은 거짓말?]
[황립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않은 황후? 그녀는 자격이 있을까.]
억측성이 짙고, 비방하는 듯한 자극적인 내용도 거침없이 담겨 있었다.
레스티아가 마석을 다룰 줄 안다는 사실을 모르는 대중들에게는 레스티아가 가문을 등에 업고 황후가 되려는, 껍데기만 아름다운 여자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진실과는 별개로, 레스티아는 황립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못한, 사생아 출신의 공작 영애라고 묘사되고 있었다.
어떤 신문의 한구석에는 레스티아가 어린 시절부터 고아원에 장난감과 옷가지를 기증해 왔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선행은 자극적인 뜬소문을 덮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선행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안개섬에서 지냈던 시절에 대한 공백기가 수많은 루머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차피 리티가 공식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 사라질 이야기들이지만.”
“명백하게 지켜야 할 선이 있는 법이지.”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이런 헛소문을 떠벌리는 자들을 감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의 막냇동생은 헛소문으로 얼룩진 신부가 아닌,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되어야 하니까 말이다.
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