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칼란드의 유언장 (4)
불은 주방에서부터 시작됐다.
어머니가 안나를 위해 호박 수프를 만들다가 사고를 낸 것이다.
빨리 대피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정신도, 다리도 불편했기에 그녀는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안나가 집 안에 들어갔을 때는 겨우 문가로 기어와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엄마!”
안나는 재빨리 어머니를 집 밖으로 끌어냈다.
“콜록, 콜록……!”
어머니는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셨고, 온몸이 화상 자국으로 울긋불긋했다.
어서 엄마를 데리고 의원을 찾아가야 했다.
안나는 사력을 다해 엄마의 몸을 업고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몸이 좋지 않은 상태였기에,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오빠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집도 외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이 하나 없었다.
안나는 스스로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엄마! 내가 사람을 불러올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정신 잃지 말고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안나가 신신당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어머니가 안나의 손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안……나…….”
“엄마?”
아주 오랜만에 안나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는 엄마의 목소리.
반가웠지만…… 마치 남은 생명력을 쥐어짜서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것 같았다.
이 모든 상황이 안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리쳤다.
“엄마! 억지로 말할 필요 없어! 조금만 견디면, 내가 어떻게든……!”
어떻게든 해 볼 거야.
하지만 어머니는 숨을 헐떡이며 안나의 손을 더 강하게 붙잡을 뿐이었다.
“쿨럭…… 우리 안나, 몸이 안 좋아 보여서 호박 수프를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쿨럭, 미안해…….”
이제 보니까 어머니는 한쪽 손에 빈 그릇을 꼭 쥐고 있었다.
안나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 같았다.
아프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그 마도서 따위에 욕심을 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저절로 눈에서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 호박 수프 같은 건 나중에 만들어 주면 돼.”
그러니까 살아만 있어 줘.
안나는 애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뻣뻣한 목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결심한 듯 빤히 안나를 응시했다.
“안나, 나는, 쿨럭, 네 엄마가 아니야. 이제…… 말을 해야 할 것 같구나. 시간이…… 없으니까.”
“엄마?”
안나의 어머니는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
가해자는 남편이었고, 다리를 못 쓰게 된 것도, 정신증에 시달리게 된 것도 남편 때문이었다.
그 폭력이 아들을 향했을 때, 그녀는 아들과 함께 도망쳤다.
하지만 불편한 다리로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삶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를 안고 깊은 강가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 우연히 강가를 지나가던 안나의 친모가 나서서 그녀를 구했다.
자신도 아이를 가진 입장에서 이런 죽음은 방관할 수 없다고 했다.
죽지 말고 자신을 위해 일해 달라고 말하며,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안나, 네 친모는, 언니는 숨어 있어야 한다고, 도망쳐야 한다고 했지……. 나보고 도와 달라고 했어. 쿨럭, 너를 낳고 잠시 맡겼는데…… 언니가 너를 찾으러 올 때까지 너를 지켜 줘야 했는데, 쿨럭, 나는…….”
모든 것을 털어놓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어, 엄마!”
친딸이 아니라고?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맡겨 두고 돌아오지 않은 친모 따위,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안나에게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눈앞에 있는 이 사람뿐이었다.
“……미안하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안나를 바라보며 희게 웃었다.
그것을 끝으로 안나의 손을 붙들고 있는 어머니의 손에서 힘이 스르륵 빠졌다.
“엄마! 안 돼, 안 돼! ”
안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꺽꺽거리며 울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들려주었던 말도, 몸도, 마음도, 지금의 상황을 지탱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어서, 안나는 오열하며 쓰러졌다.
* * *
“안나, 정신이 드니?”
안나는 자신이 일하던 식당 주인의 집에서 눈을 떴다.
“……사장님, 엄마는요?”
식당의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너무 오래 누워 있었어. 그사이에 네 오빠가 장례를 치렀단다.”
“그랬군요. 그럼 오빠는…….”
식당 주인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쯧. 이런 말 해서 미안하다만…… 네 오빠는 이렇게 된 게 차라리 후련하다며 술을 마시러 가서 소식이 없단다.”
“…….”
안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오빠는 어머니가 어떻게 오빠와 함께 가정 폭력으로부터 도망쳤는지 모르는 것이다.
알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됐다.
안나는 답답한 마음에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식당 주인은 그런 안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안나, 네가 며칠 동안 눈을 못 떠서 의사를 불렀는데…… 네가 임신을 했을 수도 있다던데…….”
“네?”
안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의사가 말하기를 네 몸이 무척 약해진 상태라 유산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전해 달라더구나.”
“…….”
“안나, 아이 아빠는 누구냐? 이건 중요한 문제란다. 너 혼자 이 문제를 해결하는 건 힘들 거야.”
“…….”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불행은 끊임없이 질척하게 찾아왔다.
희망을 품고 살다 보면 앞으로 나아지리라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것이 무색하리만큼 자꾸만 꼬여 갔다.
이제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어떡하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이제 배 속의 아이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아이의 아빠라.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하룻밤을 함께 보냈던 그 남자에 대해 생각나는 것은 자신을 빤히 응시하던 붉은 눈.
그리고 살롱의 주인이 알려 준 공작이라는 대단한 신분뿐이었다.
안나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남자가 자신과 아이를 받아 줄 것 같지 않았다.
‘……아이를 지워야 할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못 해.’
돌아가신 어머니는 자신의 친모가 아닌데도 자신을 돌봐 줬다.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아픈 안나에게 호박 수프를 끓여 주기 위해 움직이다 사고를 당했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아이를 지울 수 있을 리가 없다.
안나는 자신을 맡기고 사라져 버린 친모처럼 책임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안나는 배 속의 아이를 낳기로 했다.
‘힘이 닿는 데까지 해 보고 싶어. 그동안 가족을 부양해 왔잖아. 그러니까 아이도 내가 키울 수 있어.’
그러나 마도서를 읽은 이후, 몸이 제대로 걸을 수 없을 만큼 약해져 있었다.
집도 불타 없어졌고, 오빠에게는 의지할 수도 없었다.
일도 제대로 못하는 와중에 언제까지 이렇게 식당 사장님에게 의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 뜻밖에도 코르티잔 살롱의 주인이 찾아왔다.
“아가씨, 안녕?”
안나는 잔뜩 경계했다.
“……갑자기 왜 찾아오신 거죠?”
“아가씨, 아가씨가 임신했다는 소문을 듣고 왔어.”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가씨를 진료한 의사와 친분이 있어서 말이야.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
사실 코르티잔 살롱의 주인은 줄곧 안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
“아가씨, 그런데 괜찮아? 지금 의탁할 곳도 딱히 없다고 하던데, 내가 도와줄게.”
호쾌한 어투였다.
하지만 안나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당신이 왜 저를 돕죠?”
“그야, 내 살롱에서 일어난 일은 내 책임이니까. 그 아이, 그날 밤에 생긴 거 맞지? 낳을 거야?”
“…….”
안나가 말없이 고개를 떨구자, 살롱의 주인은 음흉함을 감추며 사람 좋게 웃었다.
역시, 지켜보기를 잘했다 싶었다.
마법사 가문의 씨는 귀하다.
아이가 태어나면, 베르체스터 공작에게 값비싼 값을 받고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이 기회는 코르티잔 살롱을 운영하는 일보다 크게 한탕 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
안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살롱의 주인에게 물었다.
“당신이 저를 도우면, 저는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죠?”
“후훗, 그래. 정산은 중요하지. 하지만 그건 아이를 낳고 생각하는 게 어때? 지금은 도움이나 받아.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닌 거로 아는데.”
그 말이 맞았다.
안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 * *
추운 겨울날, 레스티아가 태어났다.
“응애―!”
안나는 땀범벅이 된 상태로 숨을 헐떡이며 자신이 낳은 아이가 목청껏 우는 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출산을 도운 산파가 아이를 안아 들고 안나에게 보였다.
“애 엄마, 아이는 건강해. 열 달도 못 채우고 태어나서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지?”
아이는 너무나 작았다.
하지만 언뜻 봐도 누구를 닮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솜털처럼 난 하얀 머리카락.
분명 눈을 뜨면 안나의 회색 눈과 똑 닮은 눈이 보일 것이다.
“이 아이는 애 엄마를 닮았나 봐. 보통 아버지를 닮기 마련인데. 하지만 커 가면서 또 달라질 거야.”
안나의 사정을 잘 모르는 산파가 오지랖을 떨었다.
하지만 안나는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임신 기간 동안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의사 역시 안나의 병명을 알지 못했다.
그 어떤 의사도 안나의 몸속에서 엉망이 된 마력의 흐름을 고치는 방법을 몰랐으니까.
“…….”
안나는 산파의 품에 안긴 레스티아를 지그시 응시했다.
이렇게 아이를 낳고 보니,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를 두고 생명이 다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난 이 아이를 더 지켜 줄 수 없구나.
그런 생각에 슬픔이 몰려왔고, 점점 숨이 가빠 왔다.
“잠깐, 애 엄마. 어디 아픈 거야?”
매파는 그제야 안나의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쳤다.
“세상에! 몸이 왜 이렇게 차가워! 의사를 불러야겠어!”
응급 상황으로 산실이 부산스러워졌다.
하지만 안나의 귀에는 이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해. 아가.
너를 낳은 건 내 욕심이었나 봐.
내가 다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럴 능력이 없었나 봐.
아가, 모든 불행은 내가 가져갈게. 그러니, 너는 나와 다른 인생을 살아가렴.
네가 힘들 때면 너를 도와줄 수 있는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너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를.
네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내 성취할 수 있기를.
그래, 행복해야 해. 반드시.
안나는 아이에게 전하지 못할 말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