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칼란드의 유언장 (2)
“네? 정말로요? 제가 귀족가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그래, 아가씨. 내가 방금 듣기로는 식당에서 서빙 일을 했다지? 비슷한 일이야. 상대가 귀족으로 바뀔 뿐이지.”
“서빙이요?”
귀족가의 주방에서 일하게 되는 걸까?
“그래. 싫어? 아가씨가 싫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고.”
여자가 안나로부터 등을 돌렸다.
안나는 다급하게 여자를 불러 세웠다.
“시켜 주세요. 저, 서빙이라면 자신 있어요!”
“후훗. 그럼 아가씨, 깨끗이 씻고 내일 밤, 이 주소로 찾아오도록 해.”
“네! 고맙습니다!”
안나는 순진하게 여자의 말을 믿었다.
아니, 마도서에 반쯤 홀려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작은 가능성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해석하는 자가 마도서에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안나는 자신이 해석하는 자라는 것을 몰랐다.
그 사실을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위험하다는 생각을 차마 하지 못한 채, 본능에 이끌리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 * *
여자가 말했던 약속 장소는 작은 규모의 저택이었다.
귀족의 저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규모의 저택이었고, 흔히 장식해 두는 가문의 인장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나?’
안나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저택 앞에는 귀족들이 타고 다닐 만한 고급스러운 마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제대로 온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안나는 쭈뼛거리며 저택의 문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안나에게 일자리를 주선해 주었던 여자가 나타나 안나를 저택 안으로 끌어당겼다.
“잘 왔어, 아가씨! 소개가 늦었네. 나는 이곳의 주인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고 안나에게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내밀었다.
“일을 시작하려면 먼저 이 드레스로 갈아입도록 해.”
촘촘한 레이스, 결이 부드러운 고급스러운 원단. 이런 드레스는 안나가 평생 입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어, 이 드레스는 주방 일을 하기엔 너무 불편해 보이는걸요?”
주방 일을 하다가 무어라도 묻혔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은 드레스였다.
“아가씨, 난 주방 일이라고 한 적 없는데? 비슷한 일이라고 했지.”
“네? 하지만 분명…….”
“시간 없으니까 일단 갈아입고 나와. 나머지는 그다음에 설명해 줄 테니까.”
안나는 떠밀리듯 탈의실로 들어가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난생처음 치장이라는 것을 했다.
“역시 꾸미니까 너무 예쁜데?”
거울 속의 안나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안나는 자신의 모습이 아름다워질수록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됐어.’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오자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자신과 비슷한 옷을 입은 여자들이 저택 복도에 쭉 늘어서 있던 것이다. 모두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한 상태였다.
안나는 그중 한 여자를 붙잡고 질문을 건넸다.
“저기, 여기는 무슨 일을 하는 곳이지요?”
질문을 받은 여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뭐야? 신참이야? 아니면 순진한 척하는 거니? 여기는 코르티잔 살롱이야.”
“코르티잔 살롱이요?”
“그래. 높으신 분들이 찾아오는 곳이지. 이제 파티가 열릴 거야. 그럼 우리는 그분과 어울려서 즐겁게 놀기만 하면 돼.”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안나는 깜짝 놀라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코르티잔 살롱의 주인이 다가와 안나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며 말했다.
“걱정 마. 빈민가에서 몸을 파는 데와 이곳은 격이 다르니까.”
안나는 말문이 막혀서 멍하니 살롱의 주인을 바라봤다.
살롱의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안나를 설득했다.
“이제부터 아가씨는 비싸고 귀한 액세서리 같은 존재야. 어렵지 않아. 그냥 파티장에 서서 네가 가장 예쁘게 웃을 수 있는 미소를 짓고 있으렴.”
안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는 그런 것은 할 수 없어요!”
“왜? 귀족 나리들과 만나고 싶다며. 이런 화려한 생활을 하고 싶었던 것 아니야?”
안나는 기가 막혔다.
“저는 그런 목적으로 귀족가에서 일하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이만 가 볼게요.”
하지만 안나는 저택 밖으로 벗어날 수 없었다.
덩치 큰 문지기들이 안나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어디를 가려고. 일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해야 할 거 아니야. 장난해?”
말을 어기면 당장이라도 커다란 주먹을 휘두를 것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안나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지만, 코르티잔 살롱의 주인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원래 첫날은 어색한 법이지. 그래, 오늘은 첫날이니까 그냥 파티장에서 웃고만 있도록 해. 그것만 해도 좋아. 하지만 도망가는 건 안 돼. 파티를 장식할 꽃들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리고 안나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하지?’
안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적당히 일하는 척하다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시작된 코르티잔 살롱의 파티.
안나는 그 저택에서 자신이 경험해 본 적 없는 별천지를 목격했다.
화려한 파티장, 아름다운 여자들. 그 모든 것을 당연하다는 듯 누리는 남자들.
그 사이에 서 있는 자신이 이질적이기만 했다.
웃고만 있으라고?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특히.
“이봐, 너, 예쁜데? 처음 보는 얼굴이군. 이름이 뭐야?”
안나를 보고 대놓고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을 상대할 때면 저절로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하지만 다행히 남자들도 안나가 반응이 없자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시간을 대충 보내며 탈출 기회를 노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뜻밖에도 안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물건이 파티장에 등장했다.
“짜잔! 이게 뭔 줄 알아?”
어떤 남자가 마도서를 꺼내 든 것이다.
“뭐야? 이 낡아 빠진 책은?”
“마도서야! 마도서!”
기대에 차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재미없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마도서? 뭐야, 시시하잖아.”
“참나, 그 골동품을 여기에는 왜 가지고 왔어?”
“이봐, 이 마도서는 말이야, 사랑의 묘약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마법이 담긴 마도서라더군! 궁금하지 않나? 모두가 이 마법의 노예가 된다는데!”
“궁금하긴 한데, 그걸 어디에 써요? 해석이 안 된 마법은 쓰지도 못하잖아요.”
“으으, 그런가?”
“그리고 그 마도서가 진짜라면 황실에서 가만히 있었겠나? 회수했겠지.”
“맞아요. 차라리 술이나 드세요.”
“이런. 그럴까?”
남자는 결국 마도서를 내려놓고 술잔을 받아 들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금세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안나만 제외하고 말이다.
‘이상해. 왜 다들 저 책을 시시하다고 평가하지? 저렇게 황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데.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운데.’
마도서가 금빛으로 보이는 것은 해석하는 자로 태어난 안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안나는 사람들의 반응이 의아할 뿐이었다.
‘……읽고 싶어.’
오로지 그 욕망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안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마도서 앞으로 걸어갔다.
향락을 즐기는 이들 중,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낡은 책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안나는 어렵지 않게 마도서를 가지고 파티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건 도둑질하는 게 아니야. 그냥 잠깐 본 다음에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거야.’
심장이 쿵쿵 뛰었다.
드디어 마도서를 읽을 수 있다.
안나는 저택의 구석에서 남몰래 마도서를 펼쳤다. 그와 동시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 내가 어떻게 이걸 읽을 수 있는 거야?’
믿을 수 없었다. 마도서에 적힌 내용이 저절로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이 마도서의 주인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 마도서는 말이야, 사랑의 묘약을 만들 수 있는 마법이 적혀 있다더군!
아니,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마도서 안에는 몸 안의 마력을 담아내서 증폭시키는 마법이 담겨 있었다.
마력, 마법, 이게 다 무슨 내용이지? 이런 것들과 연이 닿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 접해 보는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마도서를 소리 내 읽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현기증과 함께 온몸에 생경한 열기가 감돌기 시작했음에도 말이다.
‘어지러워.’
마치 술에 취한 것 같은 아찔한 감각이었다.
안나는 마도서를 모두 읽고 나서야 책을 덮을 수 있었다.
하늘이 핑그르르 돈다.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정신력으로 간신히 몸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이걸 원래 있던 곳에 돌려놔야 해. 도둑이 될 수는 없어.’
안나는 가까스로 마도서를 다시 원래 있던 곳에 돌려놓았다.
하지만 그때부터 몸이 점점 더 뜨거워졌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몽롱하고, 갈수록 숨이 가빴다.
‘아, 안 되겠어. 집에 가야겠어.’
안나는 간신히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비틀대며 건물을 빠져나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한참 파티가 무르익은 저택 안에서 안나를 막아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안나는 저택 밖으로 나가는 문을 도통 찾을 수 없었다.
분명 들어올 때는 작은 저택이라고 생각했는데,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는 이제 너무나도 넓게 느껴졌다.
걸음 한 번 떼는 것이 이리도 괴로운 일이었던가.
‘나가는 문이, 여기, 여기인가?’
안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커다란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곳은 출구가 아니라 침대가 놓여 있는 넓은 방이었다.
‘……여기도 아니었어.’
하지만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정신력으로 버티며 겨우겨우 걷고 있던 안나에게 침대는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와 같았으니까.
‘……힘들어. 잠깐, 잠깐만 눕자. 조금 쉬다가 나가자.’
안나는 저도 모르게 침대 위로 걸어가 풀썩 쓰러졌다.
칼란드 베르체스터가 그 방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여력은 조금도 없었다.
“……분명 피곤하니까 오늘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칼란드는 미간을 좁힌 채, 갑작스레 자신의 침대로 쓰러진 여자를 빤히 내려다봤다.
이런 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앳된 얼굴에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순백의 머리카락이 이질적이다.
하지만 여자는 살롱에서 일하는 코르티잔들이 흔히 입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봐.”
“……으응.”
“정신없이 취한 모양이군.”
칼란드는 안나가 술에 잔뜩 취해 침실에 들어온 코르티잔이라고 결론 지었다.
파티는 무르익은 상태였고, 이 살롱 안에 파티를 즐긴 코르티잔이라면 독한 술을 먹었을 테니까.
“성가시게도.”
칼란드는 안나를 내칠 생각으로 그녀의 한쪽 팔을 잡아당겼다.
안나의 마른 몸은 너무나도 쉽게 들어 올려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안나가 몸을 돌려 칼란드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