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칼란드의 유언장 (1)
……본 유언장은 적법한 절차로 작성되었으며, 현 베르체스터 가주의 사망 이후부터 즉시 효력을 가진다.
-칼란드 베르체스터
전대 베르체스터 공작의 유언장.
이 문서 안에는 칼란드 베르체스터가 사망했을 시, 베르체스터 공작가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제라르는 이 유언장이 군더더기 없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안에서 배다른 동생 레스티아의 존재를 기록한 내용을 발견하기 전까지 말이다.
“……황당하군.”
뜬금없이 이복동생의 존재가 튀어나오다니.
제라르가 알기로 아버지는 여성 편력이 있었으나, 가문의 일과 관련해서는 개인사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조용히 사생아를 낳고 여태까지 숨겨 두었을 줄이야.
그것도 이 아이는 칼란드의 본부인 아르멜다가 한창 병상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태어난 아이였다.
아르멜다가 이 사실을 모르고 세상을 떠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생아는 사생아.
제라르는 갑작스레 등장한 레스티아의 존재가 베르체스터 공작가에 골칫덩어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여자아이라.”
하지만 호기심이 동했다.
베르체스터 공작가에 여자가 태어나는 것은 무척이나 희귀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베르체스터의 피를 이었다면 마법사일 텐데, 어떻게 여태까지 숨길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러모로 의문점이 많은 유언장의 내용에 제라르는 생각에 잠긴 채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안나.
성조차 없는, 배다른 동생을 낳은 미천한 어미의 이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 * *
안나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녀에 관해 묻는다면, 모두가 한 번씩 씁쓸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안나는 박복한 아이로 유명했으니까.
그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홀어머니의 병시중을 들어야 했다. 게다가 유흥에 빠진 폭력적인 오빠를 대신해 가계를 꾸려 왔다.
하지만 천성이 밝고 심성이 착했기에, 모두가 안나를 구김살 없이 올곧게 잘 성장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안나와 다르게 개차반으로 자란 오빠는 날이 갈수록 그녀를 돈 나오는 주머니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다.
“안나! 돈이 필요해. 꿍쳐 둔 것 좀 내놔 봐.”
“무슨 소리야. 오빠, 돈은 지난주에도 가져갔잖아. 이제 없어.”
“이것 봐라? 누구를 멍청이로 알아? 오늘 네가 식당에서 일하고 급료 받은 것, 다 알고 있어.”
“그건 안 돼.”
철썩.
거부의 의사를 밝히자마자 커다란 손이 안나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오빠가 손찌검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안나는 굴하지 않고 오빠를 사납게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를 때려도 그 돈은 절대 안 돼. 엄마 약값에 쓸 돈이란 말이야!”
“약값? 정신도 온전치 못한 짐 덩어리 노친네 목숨은 연장해서 무슨 쓸모야? 노친네는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게 너나 나나 팔자 펴는 일이야.”
“뭐? 오빠! 그렇게 말하지 마. 오빠의 엄마이기도 해!”
“시끄러워! 지긋지긋한 집구석. 재수 없는 계집애.”
안나가 돈을 내줄 생각을 하지 않자, 안나의 오빠는 늘 그랬던 것처럼 화풀이를 하듯이 집 안의 물건들을 몽땅 바닥에 내던지고는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안나는 얼얼한 뺨을 쓸어내리며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움직였다.
이런 일은 일상이었다.
그런데도 속상해서 저절로 눈물이 맺혔고, 어느새 눈물은 뚝뚝 떨어져 손등을 적셨다.
‘최악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때, 따뜻한 두 손이 안나의 양 볼을 어루만졌다.
엄마였다.
“언니이, 왜 아직도 도망치지 않았어?”
“……엄마, 나, 안나예요. 언니가 아니에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안나의 어머니는 정신연령이 아주 어린 나이에 멈추어 있었고, 안나를 항상 언니라고 불렀다.
안나는 매번 그 사실을 정정해 주었지만,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미소를 만들어 보이며 그 사실을 부정했다.
“아니야, 언니 맞아. 이렇게 예쁜 회색 눈을 가진 사람은 언니뿐이야.”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엄마가 더 예뻐. 나도 엄마를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자신의 외모는 엄마와 달랐다.
회색 눈도, 하얀 머리카락도, 갈색 눈에 밤색 머리를 가진 어머니와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안나는 막연하게 자신이 아버지를 닮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이라 봐도 좋았다.
“언니, 언니. 빨리 도망가.”
아주 오래전부터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엄마, 왜 자꾸 나보고 도망가라는 거야?”
이 집에서 도망치라는 말일까?
하지만 안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엄마를 두고 어디를 가.”
“글치만, 언니가 말했잖아. 언니는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고, 큰일 난다고.”
“…….”
엄마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래서 안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엄마가 있으면 나는 하나도 안 위험해.”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도, 안나는 어머니를 버릴 수 없었다.
그래, 열심히 살다 보면, 오빠도 언젠가 정신을 차릴 것이다.
그러니까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밤낮으로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안나의 인생에 더 큰 불행이 찾아온 것은 어느 날이었다.
“안나! 오늘도 고생 많았다. 오늘따라 식당에 손님도 많았는데 네 덕에 잘 끝났어.”
“아니에요! 이렇게 일할 수 있어서 좋은걸요.”
“하하, 하여간 성실하다니까. 우리 딸도 너의 반의반만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조심히 들어가거라.”
“네! 사장님! 내일 봬요!”
늘 일하던 식당에서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익숙한 퇴근길.
익숙한 서점.
그리고 익숙한 서점 주인.
그런데 익숙하지 않은 책이 서점 주인의 품속에 있었다.
‘어?’
안나는 홀린 듯이 그 책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방금 저 책? 황금색으로 빛나지 않았나?’
서점 주인이 품속에 안고 있는 책이 금빛 찬란하게 빛나면서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았다.
“저, 저기요!”
안나는 충동적으로 서점 주인을 불러 세웠다.
“그 책은 뭔가요? 혹시 제가 잠깐 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서점 주인은 정색하며 표정을 굳혔다.
“뭐야, 너는 글도 못 읽을 것 같은데 왜 책에 관심을 가지지?”
“죄, 죄송해요. 책이 무척 특별해 보여서……. 잠깐만 구경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안 돼. 이 책은 귀족 나리께서 구해 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흠집이라도 났다가는 큰일 나.”
서점 주인은 무안하리만큼 안나를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안나는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저기, 그럼 그 책 제목이라도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집요한 아가씨군. 하지만 제목은 나도 몰라. 마법 연구자들이나 알겠지. 이 책은 마도서니까.”
“마도서요?”
“그래.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비켜!”
서점 주인은 안나를 상대도 해 주지 않고 서점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마도서. 그게 뭐지?”
그날, 안나는 마도서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고대의 마법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라니.
그래서 그렇게 황금색으로 빛이 난 걸까?
안나는 그 마도서라는 것을 한번 보고 싶다는 감정에 휩싸였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강렬한 욕망이었다.
하지만 서점 주인이 말했던 것처럼 마도서는 귀한 서적으로, 황실이나 귀족 가문에서 모으는 사치품에 해당했다.
성조차 없는 평민 출신인 안나가 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날 서점에서 마도서를 보게 된 것은 정말 아주 우연한 일이었을 뿐이었다.
“에잇, 그 책이 뭐라고! 쓸데없는 일에 집착하지 말자.”
안나는 마도서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욕망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갈증이 심해질 뿐이었다. 머릿속에 온통 마도서 생각뿐이었다.
‘어떡하지? 진짜 미쳤나 봐. 정말 딱 한 번만 펼쳐 보고 싶어.’
읽을 수도 없는 책인데.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실낱같은 희망으로 방법을 고안했다.
‘귀족들이 모으는 책이라면, 귀족가에서 일을 하게 되면 우연히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큰맘 먹고 큰돈을 수수료로 건네주면 좋은 직업을 소개해 주는 직업소개소에 찾아갔다.
하지만 직업소개소의 직원 역시 안나의 남루한 차림새를 비웃을 뿐이었다.
“으하하, 아가씨가 귀족가에서 일하고 싶다고? 그런 차림새로는 면접도 못 볼 거야.”
“저, 허드렛일이라도 좋아요. 무엇이든지 잘할 수 있어요!”
“마음은 알겠는데, 그건 곤란해. 귀족 나리들은 사람 하나를 쓰더라도 신분이 제대로 보장된 사람을 선호한다고.”
제대로 된 성도 없고, 경력이라고는 식당에서 서빙만 했던 안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저기, 어떻게 안 될까요?”
“안 돼. 방법이 없어, 아가씨. 내가 충고해 주지. 사람은 분수에 맞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 법이야.”
“분수에 맞는 일이요…….”
안나는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직업소개소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냥 포기하면 되는 건데, 왜 이번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걸까.
속상한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몸에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고혹적인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안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으흠, 아가씨. 잠깐 나 좀 볼까?”
“네? 누구세요?”
“좋아. 역시 얼굴이 제법 예쁜데. 어디 보자.”
여자는 곧바로 입에 담배 하나를 물고 불을 붙이고는, 안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게다가 머리카락 색이 특이하네. 이렇게 희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잘 없지. 나리들의 취향에 맞겠어.”
“네?”
“이목구비도 예쁘고, 꾸미면 꽤 괜찮겠어. 몸매도 합격이야. 허리가 가늘어서 드레스가 잘 어울리겠어.”
마치 상품을 보는 듯한 외모 평가에 안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다짜고짜 뭐 하시는 거예요?”
여자의 말과 시선이 불편했다. 특히 담배가 타며 나는 매캐한 냄새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 모든 것들과 상반되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가씨, 귀족 나리들 곁에서 일하고 싶다며? 내가 자리를 소개해 줄 수 있는데.”
달콤한 유혹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