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제라르와 리시언이 내기를 했다는 말에 레스티아는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내기요? 무슨 내기요?”
“그게 말이지.”
리시언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일전에 제라르와 했던 내기 내용을 레스티아에게 설명했다.
레스티아의 자질을 인정하거든,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을 들은 레스티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황궁으로 오기 전, 제라르가 길을 비켜 주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기쁨을 감추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제라르 오라버니! 제 결혼을 축하해 주시는 거죠?”
제라르는 쯧, 혀를 한번 찼다.
허락해 달라는 말보다, 축하해 달라는 말을 먼저 꺼내다니.
이미 레스티아는 그의 허락을 구하고 있지 않았다.
“알았다. 대관식이 끝나는 대로 결혼식 날짜를 논의해 보도록.”
이제는 무어라 막아설 명분도 없었고 말이다.
“형님! 정말 허락하시는 겁니까?”
“형! 진짜? 상대는 리시언인데?”
쌍둥이들은 기겁했다.
리시언과 레스티아의 만남을 가장 반대했던 제라르가 이렇게 쉽게 결혼을 승낙할 줄 몰랐다.
“고마워요. 제라르 오라버니!”
레스티아는 뛸 듯이 기뻐하며 제라르를 안았다. 그러고는 축 처진 눈썹을 한 채, 쌍둥이들을 돌아봤다.
“저어, 제라르 오라버니도 축하해 주신다는데……. 오라버니들도 축하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레스티아, 이런.”
“윽. 리티.”
조엘과 마티어스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결국 이렇게 될 것이란 걸 알았다.
베르체스터 공작가에서 레스티아를 이길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속 좋게 그냥 승낙할 수 없었다.
조엘이 베르체스터 형제들을 대표해서 협상을 시작했다.
“그래. 반대하지 않을게. 하지만 결혼식 하기 전까지, 오늘처럼 말없이 외박하는 건 안 돼. 우리가 엄청 걱정했다는 것, 알아주겠니?”
“아, 그건 정말 죄송해요. 생각이 짧았어요.”
레스티아는 아차 싶어 재빨리 사과했다.
“휴, 알았어. 리티. 명심해. 혹시 이 녀석이 너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거든 이 오라버니한테 언제든 말해야 한다.”
마티어스는 이를 으득으득 갈며 첨언했다.
“이런,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리시언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유지할 뿐이었다.
“…….”
세이튼은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레스티아의 말처럼 그녀의 오라버니들은 리시언에게 위험한 존재였다.
감히 황제가 될 남자의 멱살을 잡아 쥐고, 매서운 눈길로 그를 훑고, 살기를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지 않나.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레스티아를 이길 수는 없을 것 같다.
레스티아가 리시언의 곁에 있다면, 그는 베르체스터 형제들로부터 안전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세이튼의 도움은 필요치 않았다.
세이튼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베르체스터들과 리시언을 바라보며, 뽑아 들었던 새빨간 마검을 거두어들였다.
* * *
대관식은 모르카티움 제국과 제국 밖의 모든 귀빈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화려하게 진행됐다.
리시언은 황제의 제복을 갖춰 입은 채로 황좌 앞에 서 있었다.
얼마 안 가 황제의 관을 든 대신관이 리시언을 향해 걸어왔다.
황관이 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그것은 일전에 황후의 쿠데타로 망가진 탓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옛 황관에 장식되어 있던 보석들을 활용해 다시 만들어진 관은 이전보다도 그 위용과 기개가 높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모르카티움 제국의 새로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대신관이 짧게 허리를 숙였다.
리시언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숙였고, 대신관은 직접 황제의 관을 리시언의 머리 위로 올리며 축사를 전했다.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주신의 뜻을 받고 태어난 그대에게, 응당한 제국의 적법한 절차에 따라 황제의 관을 내릴지니, 그대의 자비와 뜻이 전 대륙에 빛나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황제의 관을 쓴 리시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제좌에 앉았다.
이전부터 저 자리에 앉아 왔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모습.
오만한 황금빛 눈동자가 찌릿 살을 죄어 올 정도로 공간을 장악했다.
그 범접할 수 없는 모습이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해서, 그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짐의 모르카티움 제국은 지금까지와 다를 것이다.”
리시언은 제좌에 앉아 짧은 연설을 했다.
새 군주의 위용과 야망이 담긴 메시지가 모든 이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가 흡, 하고 숨을 죽였다.
오만하고 무자비한 성정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황제가 지어 보인 그 미소는 마음의 벽을 한 번에 허물어 낼만큼 온화하고 다정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귀족들과 외국인 귀빈들은 단번에 그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 미소의 원인이 레스티아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베르체스터 형제들 사이에 있던 레스티아가 남몰래 엄지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리시언의 멋진 모습을 칭찬했기에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미소였다.
* * *
대관식이 끝나자마자 곧이어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의미가 깊은 날이니만큼, 한껏 즐기라는 것이 황제의 마지막 말이었다.
모두가 그 말을 기다렸던 것인지, 다들 한껏 즐거워 보였다.
레스티아 역시 연회장 한쪽에 앉아서 베르체스터 형제들을 천천히 바라봤다.
제라르는 카트리나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카트리나 님. 결혼은 취소하셨다고 소식을 전해 오셨지.’
록베스트 백작가가 갑자기 진행하고 있던 혼사를 취소했다는 소식은 제국의 사교계를 시끄럽게 했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왜 카트리나의 결혼이 갑자기 취소됐는지는 지금 제라르의 모습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전처럼 카트리나가 제라르에게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이 아니었다.
‘역시, 두 사람. 잘 어울리는걸. 더 늦기 전에 마음이 통해서 다행이야.’
한편, 조엘은 사교적인 모습으로 귀족들을 응대하고 있었다.
여전히 수많은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조엘 오라버니의 인기는 여전한걸. 특별히 마음에 두고 계신 아가씨는 없는 걸까?’
레스티아는 다음에 기회가 생기거든 꼭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마티어스는 안젤라와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안젤라는 이제 제법 완벽하게 걸을 수 있어서, 특별히 몸을 의지해야 하는 지팡이가 필요치 않았다.
‘앗. 그러고 보니, 이 무도회. 엄청 크잖아? 뭐야, 안젤라. 정말 예언대로 마티어스 오라버니와 춤을 추고 있네.’
아무래도 이 연회가 끝나면 안젤라와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렇게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레스티아는 내심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자신이 가진 힘으로 눈앞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 내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그렇게 결심했을 때.
“레스티아. 여기서 뭘 하고 있어?”
이제는 황제가 된 리시언이 레스티아 곁으로 다가왔다.
리시언은 휘황찬란한 황제의 제복을 벗고 그보다 가벼운 연회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레스티아는 새삼 그가 어떤 옷을 입어도 참 근사하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항상 로브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그의 특별함은 숨겨지지 않았으니까.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레스티아가 방긋 웃으며 예를 갖춰 리시언을 맞이했다. 그러자 리시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 돼. 그새 또 다른 호칭을 익혀버리면, 지난밤이 의미가 없어지잖아.”
그러고는 레스티아의 뺨에 입술을 맞추며 속삭였다.
“단둘이 있을 땐 편히 불러.”
레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리시언.”
“잘했어.”
리시언은 레스티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그럼, 레스티아. 우리도 한 곡 출까?”
“네. 좋아요.”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무도회장으로 나아갔다.
순식간에 연회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저기를 보게나. 폐하께서 춤을 추실 모양이야.”
“어머나, 상대는 역시 베르체스터 영애군요.”
“두 사람 참 잘 어울리지 않나요?”
무도회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레스티아에게로 집중됐다.
경외심, 두려움, 호기심, 부러움, 존경, 질투.
다양한 감정이 담긴 눈빛들.
이 자리에 모인 제국의 귀족들과 외국인 손님들은 단박에 레스티아가 황제의 반려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리시언이 대공이었던 시절부터, 저렇게 다정하게 웃어주며 곁을 내어주는 이는 레스티아뿐이었으니까.
레스티아는 쏟아지는 시선과 마주하고 짧게 숨을 골랐다.
리시언의 옆자리가 어떤 것인지 피부로 와 닿았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제라르의 걱정대로 힘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눈보라가 흩날리는 오두막집 앞에 쓰러진 채로, 무기력하게 폭력배들에게 끌려가야 하는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그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성장했다.
소중한 가족들이 많은 것을 알려줬다.
마티어스 덕분에 유쾌하게 하루하루를 즐기는 방법을 배웠고, 조엘 덕분에 사람을 아껴주고 위해주는 방법을 배웠다.
제라르에게는 베르체스터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배웠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리시언 덕분에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어떤 일도 현명하게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어쩌면 그녀가 오랫동안 느끼고, 익히고, 배워왔던 모든 능력이 빛을 발해야 하는 순간은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
“레스티아.”
“리시언.”
두 사람은 무도회장 정중앙에 서서 나직한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리시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게 긴장되는걸. 너와 춤을 추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레스티아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래도 우리, 잘 해봐요.”
두 사람은 서로를 독려하듯,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일전에도 몇 번 이렇게 무도회장에서 함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미묘하게 어긋났다.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불안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레스티아는 더는 리시언이 자신의 곁을 떠날까 봐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리시언은 그녀가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러니 그들은 마침내 얻게 된 이 행복을, 지금 꼭 맞잡고 있는 두 손처럼 놓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음악이 울려 퍼지고, 두 사람은 함께 무도회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어느새 긴장감은 사라지고, 레스티아와 리시언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랬어야 했던 것처럼.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