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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107화 (107/132)

107화

우우우웅.

반지에서 발한 새하얀 빛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번졌다.

리시언은 숨을 죽이고 반지로부터 흘러나온 빛무리가 자신의 몸속으로 서서히 스며드는 것을 바라봤다.

신기하게도 빛이 스며들수록 몸이 안정감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잔뜩 날이 서 있어서 찢어질 듯이 삐걱거리던 신경이 잘 드는 진통제를 흡수한 듯 무뎌지는 감각이었다.

“…….”

마침내 빛이 모두 스며들었다.

줄곧 자신을 괴롭혔던 고통이 희미해지자 리시언은 제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왼손을 바라봤다.

일전에 레스티아가 끼워 주었던 미완성의 백금 반지의 정중앙에는 꽃 모양의 작은 보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레스티아가 리시언을 위해 만든 마력 중화석으로, 여러 장의 풍성한 꽃잎이 겹겹이 둘러싸인 모양새가 하얀 장미꽃을 연상시켰다.

“이건, 장미……?”

무심코 잇새에서 생각한 바가 먼저 흘러나갔다.

그러자 레스티아가 쑥스러운 듯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장미가 아니라 리시안셔스예요. 어제 겨우 완성했어요.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이제 보니 새하얀 꽃잎 가운데 황금색 꽃술이 눈에 보이도록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이 장미가 아니었다.

“……리시안셔스, 라고.”

리시언의 얼굴이 생각에 잠긴 듯 어두워졌다.

그 예상치 못한 반응에 레스티아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꽃 이름이 리시언 님 이름이랑 비슷하기도 하고 의미도 좋아서 이 모양으로 만든 것뿐이니까요.”

“아니, 마음에 들어. 효과도 훌륭하고. 정말 고마워.”

리시언은 반대쪽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반지를 쓸어내렸다.

“그냥, 이 꽃 이름이…… 너무 오랜만에 듣는 거라 그래. 아버지의 이름이라서.”

뜻밖의 말에 레스티아의 눈이 커졌다.

“리시언 님 아버지의 이름이요?”

“응. 내 아버지는 이름조차 없는 고아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직접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더군. 심지어 내 이름까지 거기서 따왔지.”

리시언은 조금 전까지 악몽 속에서 조우했던 부모님을 떠올렸다.

괴로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그들에게는 깨나 로맨틱한 과거가 있었다.

고귀한 황녀와 출신 성분도 알 수 없는 마법 실험체의 사랑이라.

비록 그 끝이 불행으로 끝나긴 했으나, 아직도 음유시인이 노래를 지어 부르고 다닐 만큼 달콤하고 낭만적인 사랑이었다.

“애칭으로는 아서라고 불렸던 걸로 알아. 어차피 어머니 외에는 모두가 괴물이라고 불렀지만.”

리시언은 레스티아에게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가 알고 있는 것들은 전부 수하들을 통해 알게 된 정보들이기에 짧고 파편적인 이야기뿐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정말로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낳고 가정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하여간 사람 이름을 꽃에서 따오다니…… 어머니의 취향은 이해하지 못하겠어.”

그 외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궁금해도 알 수 없었다.

이미 부모님은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어느 날은 꿈속에서 그들을 향해 말을 걸어보았다.

하지만 악몽 속에 나타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리시언을 향해 도망치라고, 숨어서 살라고 소리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영원히 알지 못하리라.

그런데 리시언의 말을 듣고 있던 레스티아가 대뜸 대답했다.

“음, 저는 왜 황녀님께서 그 이름을 지었는지 알 것 같아요!”

상념에 잠겨 있던 리시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레스티아에게 향했다.

“알 것 같다고?”

레스티아는 머뭇거림 없이 답했다.

“네! 리시안셔스의 꽃말은 변치 않는 사랑이니까요. 정말로 아끼고 사랑해서 그 꽃에서 이름을 따온 것 같아요. 리시언 님에게도, 리시언 님의 아버지에게도.”

그 말을 들은 리시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네 말대로라면 내 어머니는 생각보다 더 감성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네.”

“그렇죠? 그런 멋진 뜻이 담긴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어 주다니, 분명 엄청 따뜻한 분이셨을 것 같아요.”

“…….”

리시언은 입술을 굳게 닫았다.

악몽 속에 나타나는 어머니는 따뜻함과 거리가 멀었다.

차갑고 냉담하게 돌아선 뒷모습. 그 구불거리는 흑색 머리카락이 매번 리시언의 숨을 턱 막히게 했다.

그런데 레스티아의 말을 듣고 보니, 새삼 부모님의 존재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꿈속에 나타나는 그 마지막 모습이 부모님의 전부가 아닌데 말이다.

레스티아의 말 덕분에 깨닫게 된 그 사실이 그동안은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형태라 낯설고도 신선했다.

“리시언 님도 무척 따뜻한 사람인데, 인제 보니 어머니를 닮았나 봐요.”

“……내가, 따뜻해?”

“그럼요. 얼마나 따뜻하고 다정한데요. 이름에 담긴 의미처럼 사랑스럽고 말이에요!”

레스티아가 활짝 웃는다.

조금 전까지 왜 찾아 왔느냐 소리치던 리시언의 태도가 밉지도 않았나 보다.

게다가 대뜸 사랑스럽다는 말까지 하고, 과분할 정도로 위로가 되는 말과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따스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리시언은 너무 많이 비틀려 있었다.

그래서 부정했다.

“아니.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뿐일 거야.”

그럼에도 레스티아는 포기하지 않고 볼을 부풀리며 부정했다.

“아니에요! 어머니가 보셨으면 분명 동의하셨을 거예요.”

“글쎄. 난 부모님이 내게 남긴 유언도 지키지 못했는걸.”

리시언은 자신을 조소하듯 입매를 비틀었다.

“부모님이 내게 남긴 유언은 도망치라는 거였어. 그런데 나는 도망치지 않았지. 유언조차 지키지 못한 못난 자식이야. 그래서 아직도 그들이 악몽 속에 나오는 걸지도 몰라.”

“악몽이요?”

“매일 밤 돌아가신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을 봐. 이 나이가 되도록 말이지.”

리시언은 이제야 솔직하게 자신의 병증을 레스티아에게 고백했다.

마력 중화석 덕분에 무뎌진 감각 때문일까, 레스티아의 다정한 위로의 말 덕분일까.

이 순간만큼은 멋있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솔직해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모든 과거를 털어놓았다.

“리시언 님…….”

한참이나 리시언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레스티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동안 리시언에게서 느껴졌던 고독함과 외로움, 어두웠던 기운이 이제야 모두 이해가 된 것이다.

마음이 아팠다.

그 모든 것을 혼자 견뎌냈다니.

레스티아는 삼촌과 지냈던 불우한 과거를 모두 잊은 지 오래였다.

가족에게 받은 상처는 새롭게 만난 가족으로 치유했다.

하지만 리시언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분명, 리시언은 그 모든 것을 견뎌낼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리시언의 몸에 흐르는 마력이 그를 벗어날 수 없는 수렁 속에 빠뜨리고 있었다.

레스티아는 눈물을 삼키며,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악몽,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악몽에 나타나는 것들은 진짜 리시언 님의 부모님이 아니니까요.”

“……내 부모님이 아니라고?”

“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차분한 은회색 눈동자가 리시언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리시언 님의 몸속에 흐르는 마력은 무척 복잡해요. 그 마력이 가진 외로운 특성이 몸과 정신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뿐인 걸요. 그건 제가 앞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울게요. 그러니까 그런 나쁜 꿈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조금도 없어요.”

리시언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마치 자기 일처럼 흥분한 듯 씩씩거리며 대신 화를 내주는 레스티아의 말투가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이런 모습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아왔던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그리고 그런 만큼. 더욱 가지고 싶고, 놓아주고 싶지 않고, 독점하고 싶었다.

“레스티아.”

리시언은 나직한 목소리로 레스티아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아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이 작고 보드라운 손을 붙잡고 애처롭게 애원해본다.

“나는 평생 이렇게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할지도 몰라, 한심하게도. 그런데도 곁에서 도와줄 수 있겠어?”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조금도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네! 당연하죠. 그리고 리시언 님은 한심하지 않아요. 얼마나 멋있는데요.”

리시언의 볼에 닿아 있는 레스티아의 손은 그녀의 눈빛처럼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되려 제가 리시언 님께 부족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앞으로 계속 리시언 님 곁에 있고 싶어요. 그러기로 했어요. 어울리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거예요.”

그 말에 리시언이 미간을 좁혔다.

“네가 왜 내게 부족해? 넌 내게 과분해.”

그러자 줄곧 정면을 응시하던 레스티아의 눈꺼풀이 수줍게 내리깔렸다.

“제라르 오라버니의 말처럼, 황후가 되기에는 부족한걸요. 그것쯤은 저도 알아요.”

황후라는 말에 리시언 역시 조금 놀란 듯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빠르게 여유를 되찾았다.

“너……,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영원한 사랑’이라는 의미가 담긴 꽃 모양의 반지를 내 손에 끼운 거였나?”

레스티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리시언에게 반지를 선물하면서 그 안에 담긴 의미까지 전달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전부 이야기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레스티아는 부끄러움을 참고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그건, 이제부터 매일 끼고 다니실 거니까, 의미 있는 걸 선물하고 싶었어요. 말했다시피 리시언 님의 이름이랑도 닮았고, 예쁘잖아요?”

리시언은 더 이상 입가에 맺힌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청혼은 내가 먼저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너한테 선수를 빼앗길 줄 몰랐어.”

청혼이라는 말에 레스티아는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네? 청혼이요?”

“방금 그거 청혼 아니었어? 평생 같이 있겠다고, 황후가 되겠다고 했으면서. 다 거짓말이었나.”

리시언의 목소리가 실망한 듯 순식간에 가라앉자 레스티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그냥……그 말이 청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뿐이에요.”

“그럼, 다행이야. 선수를 빼앗긴 건 아닌가 봐.”

리시언은 제 뺨에 머물고 있던 레스티아의 손을 부드럽게 끌어내려 그녀의 손가락에 느릿하게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시선을 레스티아에게 똑바로 맞춘 채, 그 어떤 때보다도 엄중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결혼해. 네 말처럼 평생 내 곁에 있어 줘.”

그리고 맹세하듯 속삭였다.

“레스티아, 너는 내게 조금도 부족하지 않아. 내게 과분한 사람이야. 나야말로 네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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