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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106화 (106/132)

106화

매번 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라고 말했으면서, 종종 쓰러졌을 정도로 증상이 심했다니.

야속했다. 한 번쯤 몸 상태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해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마음보다 걱정이 앞섰다.

당장 리시언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온통 머릿속을 지배했다.

홀로 외롭게 고통을 견뎌내고 있을지 모를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제라르의 허락을 받아야겠다는 계획은 순식간에 잊혔다.

레스티아는 다급한 목소리로 세이튼에게 말했다.

“세이튼 님, 저 황궁에 가야겠어요.”

“예? 지금 말입니까?”

“네. 죄송해요. 배웅은 못 해 드릴 것 같아요.”

“아닙니다.”

세이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저도 마침 황궁에 가야 할 일이 있으니 말입니다.”

레스티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것을 수락했고, 두 사람은 함께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레스티아. 손님과의 만남은 이제 끝난 거니?”

문밖에는 조엘과 마티어스가 서 있었다.

아무래도 세이튼이 못 미더웠기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어라? 그런데 우리 리티 얼굴이 그 잠깐 사이에 왜 이렇게 어두워졌지?”

쌍둥이들은 레스티아의 안색이 더욱 나빠진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원인이 리시언의 소식 때문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고 헛다리를 짚었다.

“리티. 혹시, 저 사람이 괴롭힌 거야?”

“온리드라스 경. 내 동생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기 그지없던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자수정빛 눈동자가 단박에 비수처럼 변해 세이튼에게 내리꽂혔다.

“이건…… 정말……, 억울하군요.”

세이튼은 한껏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양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나름 최대한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하기 위한 몸짓이었다.

그동안 황후의 명령을 따른 탓에 지은 죄가 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잘못도 없이 매도당하는 것은 서러운 일이었다.

“맞아요. 세이튼 님은 잘못 하신 것 없으세요.”

다행히 레스티아가 곧바로 세이튼을 변호했다. 그러고는 쌍둥이들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오라버니들은 리시언 님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알고 계셨어요?”

그 말에 조엘과 마티어스는 동시에 눈을 끔벅였다.

“응? 리시언이 쓰러진 거 말이야? 얼마 전의 일을 말하는 건가?”

“아, 그건…… 알고 있었지만.”

종종 있었던 일이라 조엘과 마티어스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리시언의 병증은 레스티아를 제외한 베르체스터 형제들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쌍둥이들의 반응을 확인한 레스티아의 표정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역시, 저만 몰랐군요. 또.”

레스티아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저택의 출입구로 향했다.

곧바로 세이튼이 그 뒤를 따랐고, 조엘과 마티어스가 허겁지겁 레스티아를 잡아 세웠다.

“잠깐만 기다려. 레스티아. 혹시 지금 황궁에 가려는 거니? 큰 형님이 당분간 리시언을 만나러 가지 말라고 했잖니.”

“그래, 리티. 지금 황궁에 갔다가는 형이 정말로 너를 저택에 감금시켜 버릴지도 몰라! 옛날에 나도 당해봤어!”

하지만 한번 결심을 굳힌 레스티아의 행보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할래요.”

마침내 레스티아는 저택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오랜만에 느끼는 바깥바람이 차가웠다.

베르체스터 공작 영애로 살기 시작한 이래, 큰 오빠인 제라르 베르체스터의 말을 거역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게 두려울 만도 하건만, 두려운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베르체스터 영애. 그럼 제가 타고 온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파악한 세이튼이 손짓으로 마차가 세워진 곳을 가리켰다.

“고마워요. 세이튼 님.”

레스티아는 거절하지 않고 마차에 탑승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베르체스터 저택으로 돌아온 마차가 세이튼의 마차 앞을 가로막았다.

때마침 카트리나를 만나러 갔던 제라르가 돌아온 것이다.

제라르는 마차에서 미끄러지듯 내렸다. 그러고는 특유의 차가운 시선으로 베르체스터 형제들을 훑었다.

“무슨 일이지.”

그러고는 세이튼의 마차에 오르려는 레스티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레스티아. 외출할 생각인가?”

조엘과 마티어스가 화들짝 놀라 제라르의 앞을 막아섰다.

“윽! 형 왜 벌써 온 거야?”

“형님, 이건 말입니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쌍둥이들은 어떻게든 레스티아를 변호해볼 생각이었다.

이전처럼, 제라르가 레스티아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제라르 오라버니, 저 리시언 님을 만나러 갈 거에요.”

“……황궁에 가겠다는 건가?”

“네. 허락하지 않으셔도 가야겠어요.”

“그런가.”

제라르가 말없이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표정 없는 얼굴에서는 그 무엇도 읽히지 않았다.

레스티아는 그조차 상관없다는 듯, 자신의 뒤편에 서 있는 세이튼을 향해 말했다.

“세이튼 님. 죄송하지만, 아까 약속하셨던 것 지켜주실 수 있나요? 도움이 필요해요.”

세이튼이 깜짝 놀라서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예? 말씀하십시오.”

“제가 저택 밖으로 빠져나갈 때까지 저희 오라버니들 좀 막아주세요.”

“네……?”

혼자서 베르체스터의 마법사 셋을 상대하란 말이었다.

지독하게 당혹스러운 부탁이었다.

하지만 기사로서 맹세한 이상 약속을 지켜야 했다.

전력으로 힘을 다 하면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세이튼은 곧바로 손에 마검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레스티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검이 되어 베르체스터 형제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리티, 지금 무슨……?”

“레스티아……?”

쌍둥이들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하지만 레스티아보다는 제라르를 나무랐다.

“형님, 레스티아를 그냥 보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맞아. 형, 리티가 저렇게까지 하는데, 꼭 막아야 할 필요가 있어?”

제라르는 레스티아와 자신의 앞을 겹겹이 가로막은 사내들을 보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무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리시언의 말대로 레스티아는 강한 사람이었다.

록베스트의 카트리나뿐만 아니라, 이렇게 온리드라스의 광검사까지 제 편으로 만들다니.

게다가 베르체스터의 쌍둥이들도 지금 가주인 제라르보다 그녀의 편이었다.

심지어 제라르 본인은 레스티아 덕분에 영원히 잃을 뻔한 소중한 존재를 다시 곁에 둘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제라르는 마냥 약하다고 생각했던 레스티아가 절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그래. 다녀오거라.”

제라르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형?”

조엘과 마티어스는 놀란 표정으로 제라르를 쳐다봤다.

정작 허락을 받은 레스티아조차 깜짝 놀라서 제라르를 바라봤다.

줄곧 완고한 태도를 보였던 제라르가 이렇게 단번에 허락을 할 줄 몰랐다.

“네가 강한 아이라는 것을 인정하마. 모든 것이 내 쓸데없는 걱정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너 또한 베르체스터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 아닌데 말이다.”

제라르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저택으로 향했다.

더 이상은 조금도 막아설 생각이 없다는 듯이.

“오라버니…… 고마워요.”

레스티아는 제라르를 바라보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세이튼이 안내한 마차 위로 몸을 실었다.

* * *

리시언은 며칠 전부터 악몽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의사가 대관식을 치를 때까지만이라도 절대 안정을 취하라 말하고 돌아갔기에 침대 위에 억지로 누워 있어야 했다.

수면을 돕는다는 향을 방안 가득히 피우고 강제로 잠을 자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간신히 눈을 붙여도, 매일 같이 더욱 심해져 가는 악몽을 막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고함.

아버지의 당부.

유모의 부탁.

그것들이 망가진 현악기처럼 머릿속에 기괴한 불협화음을 지속해서 만들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을 해결했는데, 왜 이 악몽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 걸까.

“허억…… 헉.”

리시언은 침대 시트를 쥐어 잡으며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온몸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차라리 몸이 피로해도 꿈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깨어나서 레스티아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그녀의 체온을 느끼면 조금이라도 편해지던데.

하지만 단념했다.

레스티아의 가족들로부터 그녀를 강탈해올 생각은 없었다.

인정받지 못한다면 괴로움만 있을 뿐이다.

그 정도의 이성은 남아있었다.

그래서 애써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시트를 잡아 비틀었다.

제발 꺼져.

그렇게 외치면서.

그런데 또 다른 환청이 들렸다.

“리시언 님! 괜찮으신 거예요?”

레스티아의 목소리가 침대 맡에서 들려온 것이다.

정말이지…… 구제 불능이라고 생각했다.

왜 의식이 흐릿할 때면 레스티아가 떠오르는 걸까?

그것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기뻤다.

고통과 체념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따스함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부드럽고 작은 손이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좋았다.

“……환청이 아니었군.”

리시언은 숨을 헐떡이며 꿈에서 깨어났다.

이렇게 따스한 손끝의 온기가 환청이고 환상일 리 없으니까.

정말로 레스티아가 자신의 옆에 와 있었다.

리시언을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는 은회색 눈동자.

그녀는 부드럽고 자그마한 두 손으로 피가 맺힌 손을 꼭 잡아주고 있었다.

“리시언 님. 정신이 좀 드세요? 며칠 전부터 이런 상태셨다고 전달받았어요.”

보고 싶었다고, 반갑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기랄! 누가, 너를 여기 들여보낸 거야?”

저도 모르게 화를 내고 말았다.

이런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예전부터 자신을 약하다고 생각하던 레스티아였다.

다시 만난 이후로는 강하고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너무 꼴불견이지 않은가.

약한 모습을 이용해 레스티아에게 다가가는 것과, 정말 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조금도 괘념치 않은 듯, 리시언의 손을 더 꼭 붙들었다.

그러고는 미완성의 반지가 끼워져 있는 리시언의 왼손을 꼭 붙잡고, 준비해온 마력 중화석을 끼워 넣었다.

딸각.

쇠붙이와 보석이 완벽하게 맞물리는 경쾌한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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