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카트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거짓말.”
“아니, 진심이다.”
“그럴 리 없어. 곁에 있어 달라니,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믿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서로 맞닿지 않았던 마음이었다.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벽 같던 관계가 고작 몇 분 만에 바뀌다니, 도저히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카트리나는 제라르의 말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라르. 너는 울고 있는 나를 달래려고 거짓말을 한 거야. 그렇지?”
제라르는 한쪽 눈썹을 높게 올리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네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던가?”
그 말에 카트리나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맺혔다.
“맞아. 너는 한 번도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지금은 거짓말을 하는 거야?”
“……이런, 카트리나.”
제라르는 카트리나가 자신에게서 멀어진 거리만큼 다시 다가섰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눈물로 엉망이 된 눈가를 쓸어내렸다.
초점 없는 눈가가 온통 붉게 물든 것이 절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답답한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
카트리나가 마안을 쓸 수 있다면, 자신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쯤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을 텐데.
그녀가 실명에 이른 지금에서야 이토록 그 능력이 절실해지다니.
지금 품속에 레스티아가 만들어 준 마력 중화석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제라르는 주저 없이 카트리나를 품 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내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되겠지.”
“뭐?”
카트리나의 양쪽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제발 그만 놀려, 제라르. 내 마안은 이미 그 효력을 다 한 지가 오래됐어. 이제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아무것도 알 수 없는걸.”
“아니, 가능하다. 이것이 효과가 있다면.”
제라르는 카트리나의 왼쪽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그곳에 레스티아가 건네준 마력중화석 팔찌를 걸었다.
우우웅.
곧바로 수국 모양의 마력 중화석이 빛을 발하며, 카트리나의 몸속으로 보랏빛 마력이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건……?”
카트리나는 제라르에게 몸을 지탱한 채, 팔찌가 채워진 자신의 손목을 높이 들어 보였다.
잔잔한 마력이 그녀의 몸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며 활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끊어졌던 신경 세포가 다시 이어지는 것 같은 묘한 감각이었다.
“레스티아가 만든 마력 중화석이다. 네게 전해 주라고 하더군.”
“세상에. 꼬마 아가씨가? 이런 것을 만들 줄은 몰랐는데……. 저기, 제라르. 그럼 이걸 내게 전해 주러 온 거야?”
“그래.”
“하아…… 진작 물어볼걸. 나, 지금 엄청 쪽팔려.”
카트리나는 제라르의 널찍한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찾아온 이유도 묻지 않고 다짜고짜 감정적으로 굴었던 것이 새삼 민망했다.
하지만 제라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카트리나의 턱을 천천히 들어 올려 저를 바라보게끔 했다.
“괜찮다. 카트리나. 나를 봐주겠나.”
“제라르…….”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부탁해도, 나는 너를 볼 수 없는걸.
시력을 잃은 후, 온통 뿌옇게 변한 세상은 카트리나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두 번 다시 제라르의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
그런데 놀랍게도.
안개가 걷히듯이 제라르의 얼굴이 희미하게 시야에 담기기 시작했다.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형체를 알아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이건 기적과도 같았다.
레스티아가 만들어 준 마력 중화석이 카트리나의 인생에 기적을 일으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더 기적처럼 느껴지는 것은 눈앞에 있는 제라르였다.
일평생 차갑다고 느꼈던 그의 푸른 홍채가 잔잔하고 따스하게 카트리나를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이제야, 나를 보는군.”
제라르는 입가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카트리나의 시선이 제게 다시 돌아온 것이 기뻤다.
제라르와 카트리나는 이 순간의 감정을 눈빛으로 주고받았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 모두에게 무척이나 특별한 순간임이 분명했다.
“그럼, 이제 확인해 주었으면 한다.”
“응?”
“내가 거짓말을 했는지.”
“…….”
카트리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느릿하게 눈을 떴다.
카트리나의 홍채는 진실을 알리는 진녹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말도 안 돼……. 진짜로 말도 안 돼. 오늘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날이야.”
카트리나는 또다시 눈물을 쏟았고, 제라르는 그것을 또 말없이 닦아 주었다.
“그럼, 제라르. 정말로 내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 라는 제라르의 대답과 마안의 대답은 모두 진실이었다.
카트리나는 그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기뻐서 몇 번이나 마안을 발동시켰다.
그러고는 마침내 울음을 그치고 물었다.
“제라르, 키스해도 돼?”
“앞으로는 허락받을 필요 없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마음이 통하는 입맞춤을 나누었다.
오랫동안 길고 길게.
이제 막 가봉을 끝낸 웨딩드레스가 엉망으로 구겨졌지만,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 * *
“헤일록, 제라르 오라버니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건가요?”
레스티아는 초조했다.
록베스트 백작저로 걸음한 제라르가 나흘이 지나도록 베르체스터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예. 아가씨. 공작님께서는 며칠간 록베스트 저택에 머물겠다고 전해 오셨을 뿐입니다.”
“그 외에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요?”
“네. 따로 전해오신 말씀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카트리나를 위해 만든 마력 중화석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는지 궁금한데, 소식이 없어서 답답했다.
하루빨리 제라르에게 인정받고, 어서 리시언을 만나고 싶었다.
레스티아는 종일 초조하게 제라르의 귀가를 기다렸고, 조엘과 마티어스는 그런 레스티아를 걱정했다.
“리티, 형도 없는데 저택 밖으로 놀러 나갈까?”
“그래. 레스티아. 새로 생긴 과자점이 무척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하지만 레스티아는 쌍둥이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괜찮아요. 오라버니들, 저는 제라르 오라버니가 돌아오시길 기다릴래요.”
쌍둥이들은 저택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레스티아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아가씨. 온리드라스의 세이튼 경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세이튼 경이요?”
쌍둥이들은 인상을 썼다.
“그자가 왜?”
“맞아. 무슨 염치로 우리 리티를 왜 만나러 와?”
세이튼은 일전에 레스티아를 공격했던 자였다.
황후에게 조종당해서 그랬다고 해도,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그를 용서치 않았다.
레스티아가 만류하지 않았다면, 살려서 곱게 돌려보낼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세이튼 님께 마력 중화석을 보냈는데,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찾아오신 것 같아요.”
“뭐? 리티. 그 녀석한테도 그걸 만들어 줬다고?”
“레스티아, 굳이 그럴 필요 없었는데. 너를 죽일 뻔한 사람이지 않니.”
쌍둥이들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담담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걸요. 저는 마법을 그렇게 쓰고 싶어요.”
* * *
세이튼은 응접실에 들어선 레스티아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베르체스터 영애. 고맙습니다. 보내 주신 물건 덕분에 많이 나아졌습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세이튼의 목에는 검은색 가죽 목걸이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레스티아가 선물해준 노란 수선화 모양의 마력 중화석 브로치가 가슴팍에 달려 있었다.
온리드라스의 광기 어린 마력을 막아 줄 수 있는 마력 중화석이었다.
“선물해 주신 이 브로치 덕분에, 요즘은 허튼 생각도 안 들고 몸도 무척 편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제 힘이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레스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무언가 바라고 해드린 일은 아니었는걸요. 혹시라도 몸에 이상이 생기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레스티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세이튼이 곤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오늘 이후로 따로 찾아오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혹시 부탁드릴 일이 생기면 서신으로 전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시겠습니까?”
“네?”
“그…… 대공 전하께서 저와 베르체스터 영애가 따로 만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그렇군요.”
레스티아는 조금 민망했다.
자신의 연인이자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사실 유별난 질투쟁이라는 것을 들킨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세이튼은 그를 이해하는 것을 충성의 증명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저는 앞으로는 대공 전하께서 싫어하시는 일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제 주군이 되실 분이니까요.”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세이튼 님.”
레스티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세이튼은 그럼 이만 가 보겠노라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스티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세이튼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세이튼 님. 잠시만요.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예. 말씀하십시오.”
“요새 다시 황궁에 출입하고 계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대관식을 앞두고 이것저것 재정비해야 할 것이 많아서 황실 기사단도 무척 분주합니다.”
“그럼…… 리시언 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그 질문에 세이튼의 눈이 커졌다.
리시언과 그 누구보다 긴밀한 관계인 레스티아가 그의 안부를 왜 제게 묻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예? 두 분이 따로 연락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게……. 사정이 있어서 요즘 만날 수가 없었거든요.”
그러자 세이튼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하긴, 그렇겠군요. 대공 전하께서는 지금 안정이 필요하시니 말입니다.”
뜻밖에 말에 레스티아의 눈이 커졌다.
“안정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정이라는 게, 며칠 전 대공 전하께서 과로로 잠시 쓰러지셨던 일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
세이튼은 목덜미를 긁적였고, 레스티아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리시언 님이 쓰러지셨다고요?”
금시초문이었다. 아무도 레스티아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리시언도 딱히 연락해 오지 않았고 말이다.
세이튼은 레스티아의 반응에 자신이 무언가 잘못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르체스터 영애.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종종 이런 일이 있긴 했습니다만, 대공 전하께서는 항상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복귀하셨습니다. 원체 강하신 분이니까요.”
하지만 레스티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