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그래! 좋아. 유언장 감별쯤이야 어렵지도 않은 부탁인걸.”
카트리나는 제라르가 제게 처음으로 도움을 청했다는 것이 기뻤다.
줄곧 그의 곁을 맴돌며 이 순간을 기다렸으니까.
그런데 뒤이어 들려온 말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고맙군. 도움을 주는 대신 대가를 지불하지. 원하는 것이 있나?”
꼭 무언가 바라고 수락한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네가 지금처럼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하지만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은 제라르다운 제안이었다.
오랫동안 지켜봐 온 바에 의하면 그는 정당한 값을 지불하지 않는 거래는 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카트리나는 잠깐 빤히 제라르를 쳐다보다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럼, 키스하게 해줄래?”
뻔뻔한 요구였을까.
침묵과 함께 푸른 눈동자가 잠시 가라앉았다.
카트리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너한테 뻔한 걸 받긴 싫거든.”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렸는데, 돈이나 귀금속 따위로 값을 치르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학우가 아닌 더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고 싶었다.
“참고로 다른 건 필요 없어.”
그렇게 못 박았다.
하지만 제라르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무표정한 시선으로 카트리나를 바라봤다.
“정말로 그거면 충분한가?”
“응.”
제라르는 카트리나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고.
카트리나는 주저 없이 양팔로 제라르의 목을 감싸 안았다.
마침내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정적이고 건조한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강렬하고 자극적이었다.
카트리나는 입맞춤 후에도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제라르. 정말로,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준 거야?’
대체 왜 받아 준 걸까?
그 이유에 대해 몇 번이나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그 고민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막상 제라르와 입술을 맞추고 보니, 자신이 그를 오랜 시간 짝사랑했다는 사실만이 절절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누군가 지금 카트리나의 얼굴을 본다면,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며 기쁜 나머지 귀 끝까지 붉게 물들이던 그 괴물 아저씨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고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자신과 괴물의 처지는 달랐다.
카트리나는 제라르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동일한지 도저히 질문할 수 없었으니까.
‘제라르, 사실은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야? 아니면, 내가 이걸 요구해서 그냥 한 거야?’
무엇이 진실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제라르가 ‘이 키스에는 거래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할까 봐 무서웠다.
그런 성격의 남자였다.
그래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다.
“제라르. 앞으로 내게 무언가 부탁할 때, 이것으로 지불해줘.”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그렇게 두 사람의 계약이 성립됐다.
카트리나는 그 관계에 만족했다.
제라르에게 키스를 받아 낼 수 있는 사람은 카트리나뿐이었으니까.
그 후, 제라르는 베르체스터의 가주로서 줄곧 바쁘게 지냈고, 카트리나는 그 곁을 맴돌았다.
그렇게 일 년, 이 년, 삼 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하지만 기나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지금의 카트리나였다.
이제는 길고 긴, 지독한 짝사랑을 끝내게 된 여자.
조금도 행복하지 않은 결혼을 준비해야 하는 신부.
‘망했어. 정말, 나쁜 남자에게 빠지면 이렇게 청춘을 버리게 되는 거구나.’
레스티아에게는 허세를 부리며 나쁜 남자를 사랑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돌아보니 온통 후회되는 일투성이였다.
한 번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걸.
하다못해 마안으로라도 제라르의 마음을 판별해 봐야 했다.
아니면 차라리 명료한 대답을 듣고 뻥 차여볼 것을.
애써 진실에 눈을 감았던 세월이 덧없어서, 카트리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웨딩드레스를 입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인제 와서 후회해봤자, 전부 부질없는 감정의 부스러기일 뿐인데.
카트리나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그리고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드레스를 벗어야겠어.”
그런데 하녀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카트리나에게 달려왔다.
“카트리나 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누구?”
올 사람이 없는데.
카트리나가 의문을 표하자, 하녀가 말했다.
“베르체스터 공작님이십니다. 분명 응접실에서 기다려 달라고 청했습니다만, 막무가내로 이곳에 들어오시겠다고…….”
“뭐?”
카트리나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귓가에 익숙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카트리나. 오랜만이다.”
“제라르……?”
잃어버린 시력 탓에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제라르가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서 있을지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졌다.
기나긴 시간 지켜봐 왔기 때문이겠지. 그게 기쁘면서도 두려웠다.
왜 나타난 거야.
마음은 이미 정리하기로 했는데.
“너…….”
카트리나는 곧바로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무례해. 옷을 갈아입고 있는 숙녀의 방에 멋대로 들어오다니.”
뚜벅.
제라르는 상관없다는 듯이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무례라. 이해가 안 가는 말을 하는군. 너도 항상 내 방에 이런 식으로 들어오지 않았었나.”
제라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카트리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드레스를 입은 카트리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두 사람의 성년제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왜 볼 수 없었던 거지? 제라르는 새삼 자신이 무척 바쁘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가주의 직위를 얻은 후부터 동생들을 살피고, 황가의 명을 받아 전쟁터를 돌아다니고, 리시언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래서 한껏 단장한 카트리나와 파티를 즐길 기회가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보니 조금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제라르. 인정해. 내가 예전에 네 방에 멋대로 들어가곤 했다는 거. 하지만 이제는 안 돼.”
카트리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축객령을 내렸다.
“미안하지만, 돌아가 줘. 결혼을 앞둔 와중에 불필요한 스캔들을 만들고 싶지 않아. 신랑이 아닌 다른 남자와 한 공간에 있는 건 귀부인의 소양이 아니라고들 하잖아?”
그 말에 제라르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아졌다.
카트리나가 이렇게 자신을 거절한 적이 있었던가?
매번 ‘나를 보러 와준 거야?’라고 말하며 배시시 웃던 카트리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점멸한 등불처럼 차게 식은 눈빛도 낯설기만 했다.
날이 갈수록 시력을 잃어가던 카트리나의 눈이었지만, 제라르는 항상 그녀의 초점이 제게 맞춰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왜 자신은 그동안 카트리나의 그런 모습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일까.
아니, 사실 제라르에게는 모든 것이 당연한 것들이었다.
모두가 탐내는 것들을 당연하게 거머쥐고 가진 자로 태어나, 지배하는 자로 자랐다.
모든 이들이 가만히 있어도 제게 관심을 요구하며 다가왔고, 카트리나 역시 제 주변을 맴도는 사람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녀는 곁에 두기에 유용한 존재였다는 점이었다.
카트리나와 키스를 한 것도 단순하게 그것이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키스를 할 정도로 가깝게 지낸 여자는 카트리나가 유일했다.
그런데, 이제부터 카트리나가 곁에 없을 거라 생각하니……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라르는 카트리나를 자신이 알던 익숙한 존재로 돌려놓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레스티아의 말대로 그녀가 원해서 하는 결혼이 아니라면,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물었다.
“카트리나. 이 결혼, 정말로 네가 원해서 하는 것이 맞나?”
“그래.”
카트리나는 짧게 대답하고 등을 돌렸다.
“…….”
제라르는 자신이 더 이상 카트리나의 시선을 붙잡아둘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품속에는 레스티아가 넘겨준 편지와 팔찌가 남아 있었다.
마지막 명분이었다.
“이상하군. 레스티아에게 쓴 편지에는 나를 보고 싶다고 쓰지 않았나.”
“휴…….”
그제야 카트리나가 다시 제라르를 돌아봤다.
“꼬마 아가씨가 그걸 전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좀 쪽팔리네.”
카트리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는 하녀들을 방 밖으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어떻게 보면 꼬마 아가씨가 내게 너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준 걸지도 모르겠어.”
카트리나는 제라르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곧장 결심한 듯 말했다.
“제라르. 이제야 말하지만, 나는 너를 정말 많이 좋아했어. 아카데미 시절 때부터 계속.”
그래, 차라리 고백하자.
이 자리에서 고백하고, 깔끔하게 미련을 벗어 던지자.
“하지만 이제는 안 좋아할 거야. 네 마음을 얻기 위해서 계속 주변을 맴도는 일에 지쳤어.”
담담하게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갈수록 떨렸다.
용기를 내서 처음으로 하는 고백인데, 그게 이별 선언이 될 줄 몰랐다.
“이제 너를 어떻게 유혹해서 마음을 얻어야 할지 도통 모르겠어. 보다시피 나는 마안을 잃어서 네게 도움도 안 되잖아. 이제 키스하게 해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어.”
어느새 목소리는 잠기고, 초점을 잃은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러니까.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돌아가 줘.”
겨우겨우 뱉어낸 말에 목이 멨다.
“나는 나를 원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 거야. 이제 이렇게 의미 없는 관계는 싫어.”
평범하게 살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그러니까 가.”
카트리나는 저절로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카트리나!”
제라르가 곧바로 카트리나를 부축했다. 하지만 카트리나는 그것을 거부했다.
“놔 줘.”
“…….”
제라르는 카트리나의 고백을 듣고 많은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동안 자신은 왜 카트리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을까.
아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줄곧 외면했다.
그녀와 자신의 관계보다 우선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고 둘 사이의 감정이나 관계보다 마법사 가문의 의무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어리석게도.
하지만 이것을 구구절절 카트리나에게 설명하기에는 구차하고 또 조잡했다.
하지만 이대로 카트리나를 놓아줄 수는 없었다.
전투를 통해 단련된 본능이 이것이 지금이 카트리나를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토록 잘 어울리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너를 원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살고 싶다 했지. 그럼, 내가 너를 원한다면?”
“뭐?”
“결혼, 하지 마. 여태까지처럼 내 곁에 있도록 해. 마법사 가문의 의무 따위는 천천히 생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