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저 애가 제라르 베르체스터, 올해 아카데미 신입생 대표야.”
“그래, 수석 입학생이라지?”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장남이라던가? 물 속성 마법을 다룬다던데.”
“분위기 좀 봐. 엄청 어른스러워. 우리 또래 같지가 않아.”
제라르 베르체스터는 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서 주요 화젯거리였다.
카트리나는 신입생 대열에 섞여서 단상 위에서 축사를 전하는 제라르의 모습을 바라봤다.
‘으흠. 다들 한 번쯤 입에 올릴 만큼, 대단하긴 하네.’
제라르 베르체스터는 그 출신 성분과 입학성적 외에도, 모두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인 소년이었다.
반듯하다 못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목구비에 단정히 정리된 더티블론드.
그 모습이 고귀해 보이기도 하고 야성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더불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짙푸른 눈동자와 특유의 무표정은 진중하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단상에 서서 연설하는 목소리조차 호소력이 높아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대단한데. 하지만…… 저만큼 뛰어나다면 피곤한 일이 잔뜩 생기겠는걸.’
카트리나는 한참 동안 제라르를 구경하다가, 옆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입학생들 사이에는 황태자 에리히엔도 있었다.
카트리나는 어린 시절부터 황궁을 자주 출입한 탓에 에리히엔과도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카트리나. 두고 봐. 아카데미의 수석 입학자는 이 몸이 될 테니까.
라고 잔뜩 허세를 부리더니만.
황태자는 제라르 베르체스터에게 수석 자리를 빼앗겨 분한 모양인지 이를 으득으득 갈고 있었다.
‘역시나. 에리히엔한테 찍혔겠네.’
카트리나는 에리히엔이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소년을 향해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잘난 소년이여, 부디 별일 없이 졸업할 수 있기를.’
카트리나는 황태자의 성향을 잘 알았다. 그는 가학적이었으며,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를 시기했다.
얼마 전에는 검술 스승이 붙여준 시종이 자기보다 검을 잘 쓴다며 손을 못 쓰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래서 황태자의 눈에 띈 제라르가 마냥 불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딱히 나서서 제라르를 도울 생각은 없었다.
엮이면 피곤할 뿐이다.
카트리나는 어렸을 때부터 귀족 사회에서 온갖 못 볼 꼴을 다 봐온 탓에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질 줄 알았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 가능하면 제라르와는 엮이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입학식이 있고 나서 며칠 후, 에리히엔의 시종이 아침 일찍부터 카트리나를 찾아왔다.
“카트리나 님, 황태자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나를? 왜?”
“그게…… 카트리나 님의 마안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카트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에리히엔은 종종 카트리나를 불러 자신의 가학 행위에 마안을 사용하곤 했다.
괴롭힐 대상에게 곤란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하게끔 했다.
질문은 정말이지 유치했다.
-나를 존경하고 있나?
라는 자만심이 가득한 질문.
당연히 그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존경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제국의 황태자와 대적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황태자는 변태같이 카트리나에게 마안으로 그 대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하도록 했다.
대부분이 ‘거짓’이라는 판정을 받았고, 에리히엔은 주저 없이 채찍을 들었다.
-감히, 제국의 황태자를 존경하고 있지 않다니! 거짓말을 하다니!
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미친놈. 설마, 그 짓을 아카데미에 입학해서도 할 셈이야?’
이제 나이가 몇인데.
정말이지, 동참해주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카트리나의 표정이 좋지 않자 시종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저어…… 가, 가지 않으실 건가요?”
카트리나는 제 또래의 시종을 바라봤다.
에리히엔의 시종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남들이 다 볼 수 있는 얼굴도 멍이 들어서 얼룩덜룩했다.
하여간 쓰레기 자식 적당히를 몰라요.
분명 카트리나가 거절하면, 그녀를 데리고 오지 못한 이 불쌍한 시종에게 채찍질을 하겠지.
카트리나에게도 불충이다 뭐다 하면서 황제가 될 자신의 미래를 말하며 피곤하게 굴 것이다.
정말이지, 이 제국의 미래가 어찌 되려고 저런 개자식이 황태자인지.
예언자 가문인 글라리엔을 찾아가서 정말로 저자가 황제가 되는지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글라리엔의 예언은 애매모호하니까,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카트리나는 처세 빠른 결단을 내렸다.
“아니야. 갈게. 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니?”
그 대답에 시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안내했다.
에리히엔은 아카데미 검무장에 있었다.
멀리서도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어디 보자, 에리히엔이 괴롭히고 있는 불쌍한 상대는 누구지?’
카트리나는 황태자가 노려보고 있는 상대를 바라봤다.
입학식에서 단상 위에 있던 소년이 에리히엔의 맞은편에 한 폭의 그림 같이 서 있었다.
‘이런, 결국…….’
예상대로 에리히엔이 괴롭힐 대상으로 점찍은 건 제라르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라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초연해 보였고, 에리히엔만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뭐라고? 네가 이 몸을 질투하고 있지 않다고? 거짓말을 하는구나.”
“말이 안 통하는군. 다짜고짜 찾아와서 무슨 시비지? 내가 너를 왜 질투하느냔 말이다.”
“그, 그야! 당, 당연히 내가 황태자니까! 모든 걸 다 가졌으니까, 네가 시기하는 것 아니냐!”
“어이없군. 네가 황태자라는 이유로 내가 너에게 경쟁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
“당연하지. 나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존재다. 너는 나를 이기고 싶어서 아침 일찍부터 검무장에 나와서 이렇게 검술 수련을 하는 것이 아니냐.”
“……말하지 않았나. 아침부터 검술 수련을 하는 건 가문의 오랜 일과일 뿐이다.”
제라르는 에리히엔을 상대하기가 피로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으흠.’
카트리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냈다.
분명 열등감 덩어리인 에리히엔이 쓸데없이 유치한 꼬투리를 잡은 것이 분명했다.
정말 끼고 싶지 않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에리히엔이 카트리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마침 오는군! 카트리나, 이리 와서 이 시건방진 자식에게 네 마안이 가진 능력을 보여주도록 해.”
카트리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는 에리히엔의 앞으로 다가가 살짝 무릎을 굽혔다.
“카트리나 록베스트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에리히엔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제라르. 너는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거야. 카트리나, 어서 이자가 나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진실이란 것을 깨닫게 해 주거라!”
아. 정말 유치한 질문 아닌가.
차라리 예전처럼 자기를 존경하고 있느냐고 물을 것이지.
카트리나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마법사가 마법을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실명을 감수해야 한다니 짜증이 났다.
하지만 상대는 제국의 황태자.
어쩔 수 없으니 마안을 써서 그 질문의 참과 거짓을 밝혀냈다.
당연하게도, 제라르는 황태자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결과값이 도출됐다.
에리히엔은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이이이익! 이건 말도 안 돼! 카트리나! 네가 마안을 잘못 쓴 거지!”
“예? 전하, 그게 무슨……?”
마안을 쓰는 것을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에리히엔은 카트리나가 잘못했다는 듯이 자신이 들고 있던 채찍을 카트리나를 향해 휘둘렀다.
“꺅……! 응?”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라르가 들고 있던 검으로 에리히엔의 채찍을 막아선 것이다.
“못 봐주겠군.”
제라르는 채찍을 신경질적으로 베어내며 말했다.
“차라리 결투를 하지. 네가 이기면 네 말이 진실이고, 내가 이기면 내 말이 진실이 되는 거다. 승낙하겠나?”
결투 판정.
결투를 통해 이기는 사람이 정의가 되는 룰을 가진 판정 싸움.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유행했다가 사라진 재판 방식이었다.
에리히엔은 화들짝 놀라 제라르의 검을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채찍을 내던졌다.
“으윽. 됐다! 피곤하군.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다.”
그러고는 분하다는 듯 씩씩거리며 물러났다.
아무래도 제라르에게 질까 봐 무서운 모양이었다.
제라르는 황태자가 물러나자, 더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하고 있던 검술 수련을 계속했다.
카트리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제라르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도와줘서 고마워.”
제라르는 대답하지 않은 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카트리나가 재차 말했다.
“있잖아. 너도 마안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해. 내가 도와줄게.”
그제야 제라르가 입을 열었다.
“필요 없어.”
“정말? 왜 싫어? 나 꽤 도움이 될 텐데?”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이라면, 그것이 거짓이어도 별로 상관없으니까.”
“……응? 그래?”
그 말을 들은 카트리나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항상 진실과 거짓의 양립된 가치관 위에 서 있던 카트리나에게는 그 대답이 신선했던 것이다.
“그리고 쓸데없는 일에 마법을 쓰지 마라. 록베스트. 너희 가문은 마력 중화석도 없지 않나.”
“설마, 방금 걱정해 준 거야?”
제라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트리나는 제라르에게 강렬한 호감을 느꼈다.
그동안 그 누구도 카트리나에게 마법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되려 제발 마안을 써달라고 재촉하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깨닫자, 카트리나의 시선에 계속해서 제라르가 담기기 시작했다.
신기하고, 재미있고, 멋진 남자애.
제라르와 엮이지 말아야겠다고 결정했던 과거의 결심은 온데간데없었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 내내 항상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교수가 될 정도로 공부를 했던 것도 제라르가 마력 중화석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좋으니 이 남자가 제 시선과 관심을 빼앗아 간 것처럼, 그 남자 또한 그러기를 바랐다.
하지만 제라르가 카트리나에게 도움을 청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겉돌고, 겉도는 사이에 어느새 길고 긴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은 어른이 됐다.
그리고 어느 날, 제라르가 처음으로 카트리나를 찾아와 부탁했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카트리나.”
때는 제라르의 아버지가 사망한 직후였다.
그는 품속에서 기밀문서를 꺼내 내밀었다.
“아버지의 유언장이다. 이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해 주었으면 좋겠군.”
리시언과 레스티아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는 문서다 보니, 이때만큼은 카트리나의 마안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