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제라르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소용없는 짓이다. 카트리나의 마안은 이미 그 힘을 잃었다.”
그녀는 시력을 잃고, 마안을 잃었다.
그래서 후계를 낳기 위해 결혼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제라르는 카트리나의 뜻을 존중했다.
대를 이어 마법의 명맥을 이어가야 하는 마법사 가문의 의무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레스티아가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아니요. 카트리나 님은 다시 마안을 쓸 수 있게 되실 거예요. 제가 카트리나 님을 위한 마력 중화석을 만들었으니까요.”
레스티아는 상자를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가느다란 팔찌가 담겨 있었다.
보라색 수국을 엮어낸 모양으로 만들어낸 마력 중화석이 우아하게 장식된 팔찌였다.
“이 중화석이 제대로 힘을 발하면, 카트리나 님은 억지로 결혼하실 필요가 없어질 거고, 제 편이 되어 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카트리나가 억지로 결혼하는 거라고?”
제라르의 말에 레스티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한 것 아닌가요? 카트리나 님은 제라르 오라버니를 오랫동안 좋아해 왔잖아요?”
“…….”
제라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카트리나가 오랫동안 애정 공세를 해오기는 했으나, 자신은 베르체스터의 가주였고, 카트리나는 록베스트의 가주가 될 운명이었다.
마법사 가문 간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었기에 애초부터 이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카트리나가 ‘이제 나는 결혼해야 해, 제라르. 점점 시력이 안 좋아지고 있어. 가문의 사람들이 다음 대를 이으라고 해.’라고 말하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을 때.
‘아, 벌써 그럴 때가 되었나.’
하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카트리나는 그날 이후 연락이 없었다.
그 마지막 모습이 계속 눈에 밟혔지만, 제라르는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가주로서 감정보다 각자의 의무에 더 충실히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여겼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억지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라고 줄곧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인제 와서야 흔들렸다.
“이 편지는 제게 온 것이에요. 카트리나 님의 결혼 상대가 정해졌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요.”
“…….”
제라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편지를 개봉했다.
누군가가 대필해준 것이 분명한 편지에는 결혼을 앞둔 카트리나의 심정이 담겨 있었다.
가문에서 정해준 약혼자는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와 마지막으로 제라르의 안부가 궁금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이라.
어째서인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오라버니. 이것 받으세요.”
레스티아는 제라르의 손 위로 마력 중화석 팔찌를 건넸다.
“제가 만든 이 물건이 효과가 있는지, 오라버니께서 록베스트에 가셔서 직접 확인해 주세요.”
레스티아는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제라르는 제 손 위에 올려져 있는 편지와 팔찌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예상치 못하게 그동안 줄곧 외면해오고 있었던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 * *
“어머나! 카트리나 님! 웨딩드레스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셔요!”
“정말요! 항상 교수들이 입는 정장만 입고 다니시더니, 이런 드레스도 이렇게 잘 어울리시네요.”
카트리나는 막 가봉이 끝난 웨딩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록베스트 백작가의 수하들은 항상 아카데미 정장 입고 다니던 카트리나의 모습이 새롭고 신기하다며 꺅꺅거리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카트리나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웨딩드레스가 아름답다고 한들 무슨 소용인가. 이미 실명한 두 눈으로는 볼 수 없는데 말이다.
거울 앞에 서도 사방이 온통 뿌옇게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일찍 결혼할 걸 그랬나.
그럼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 정도는 오래도록 추억해 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런 감상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정말 결혼하는 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오로지 아이를 낳기 위한 결혼을.
어렸을 때는, 이런 미래가 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카트리나는 록베스트 가문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걸음마를 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모르카티움 제국 이곳저곳으로 불려 다니며 마안을 사용해야 했다.
아버지는 이미 마안을 잃고 실명한 상태였고, 남동생은 마안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록베스트 백작가에서 진실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는 카트리나뿐이었다.
황가는 그녀를 자주 불렀다.
시시비비가 많은 곳이라 마안을 사용해야 할 일이 참 많았기 때문이다.
어린 카트리나는 그 일이 너무 괴롭게 느껴졌다.
질문을 듣고, 마안을 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나, 거짓말을 하는 어른들을 상대하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날은 어른들 몰래 도망쳤다.
화창한 날씨가 모험을 감행하게 만들었고, 황궁에 가득 피어 있는 장미꽃 덤불은 카트리나의 작은 몸을 숨기기에 너무 좋았다.
그래서 술래잡기를 하듯이 몸을 숨겼고, 그녀를 잃어버린 백작가 사람들은 당황해하며 목청껏 카트리나의 이름을 불러댔다.
“카트리나 아가씨! 어디 가셨어요!”
“아가씨! 대답해주세요!”
하지만 카트리나는 그것이 재미있어서 놀이라도 하듯이 더 깊이깊이 숨었다.
문제는 그러다가 깜박 잠이 들었고,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는 거다.
“으아앙! 다들 어디 간 거야?”
카트리나는 엉엉 울다가 훌쩍훌쩍 대기를 반복하며 수풀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황궁은 너무나도 넓었고, 카트리나가 숨은 곳은 무척이나 외진 곳이었다.
해가 점점 저물어 가고 있었고, 그림자가 길어질 때마다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때, 카트리나는 리시언의 아버지와 처음으로 만났다.
나무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남자는 카트리나를 발견하자마자 그녀 앞으로 내려왔다.
“길을 잃었나 봅니다. 꼬마 아가씨.”
눈앞에 불쑥 나타난 미남자는 상냥하게 웃었다.
황혼을 등진 금안이 선명하게 빛났다.
“아, 아저씨는 누구야?”
카트리나는 남자의 금안을 보고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록베스트의 마안은 진실과 거짓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력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정말이지 낯선 것이었다.
무언가 외롭고, 슬퍼서, 가까스로 멈추었던 눈물보가 금방이라도 다시 터질 것 같은 기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입가에 평온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가 가진 특유의 마력 탓에, 카트리나는 훗날 리시언이 괴물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는 록산느 황녀님의 기사입니다.”
그 소개에 카트리나의 눈이 커졌다.
“아. 아저씨가 그 괴물이구나?”
카트리나는 온갖 시시비비를 가리는 장소에 다 끌려다닌 탓에, 황궁에 떠도는 소문에도 능통했다.
눈앞의 이 남자는 록산느 황녀가 거느려 데리고 다닌다는, 그 괴물이라는 남자가 분명했다.
“똑똑한 꼬마 아가씨였네요. 맞습니다. 제가 바로 그 괴물이랍니다.”
남자는 괴물이라고 불렸음에도 조금도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없었다.
“음. 꼬마 아가씨는…… 그 예쁜 눈동자를 보니 록베스트 영애이신 것 같군요. 이리 오세요. 제가 길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괴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점잖고 다정한 남자.
카트리나는 그의 손을 잡고는 어두운 풀숲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상해.
왜 이 사람이 괴물이라고 불리는 걸까.
카트리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태까지 황궁에서 만났던 사람 중에서 제일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정작 괴물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나쁜 어른들인데.
그래서 카트리나는 그에게 사과했다.
“아저씨. 괴물이라고 해서 미안해요.”
“하하, 저는 상관없답니다. 꼬마 아가씨. 모두가 저를 그렇게 부르는 걸요.”
남자는 대수롭지 않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어린 카트리나의 양심이 콕콕 찔렸다.
“흠흠! 그래도 미안한걸요.”
그래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주기로 했다.
“아저씨. 아저씨는 궁금한 거 없어요? 제가 록베스트의 마안으로 무엇이든 봐줄게요. 물어봐요.”
남자는 물어볼 것이 없다며 단칼에 제안을 거절했다.
“정말? 정말?”
카트리나는 두어 번 더 물었다.
남자는 두어 번 모두 거절했다.
결국 카트리나는 자리에 풀썩 앉아 땡깡을 부려야 했다.
“뭐야! 이대로는 못 가! 안 물어보면, 나,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거야!”
남자는 당황해하다가 마지못해 질문했다.
“……그럼, 꼬마 아가씨. 내가 연모하는 분이 나와 같은 마음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귀 끝까지 붉어져서는, 엄청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아저씨, 이상한 질문을 하네요.”
정말로 이상한 질문이었다.
카트리나는 그동안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그동안 만나왔던 어른들은 주로 재산이나 정치에 대해 물었다.
종종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냐’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같은 마음이냐’라고 묻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역시, 이런 질문은 좀 그런가요?”
남자는 겸연쩍은 듯이 흠흠,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니, 아니. 록베스트의 마안은 무엇이든 알 수 있는 걸!”
카트리나는 곧바로 마안을 사용했다. 곧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진실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 사람도 아저씨랑 같은 마음이네요.”
카트리나의 대답에, 남자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하. 고마워요. 꼬마 아가씨.”
남자의 미소가 보기 좋았다.
자신이 알려준 진실을 듣자마자,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의 모습은 처음 봤다.
“아저씨. 그게 그렇게 기뻐요?”
괴물이 붉게 변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더니 말했다.
“그럼요. 꼬마 아가씨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기분을 알 거랍니다.”
정말일까?
그럼 나도 마안을 쓴 후에 그 기분을 알 수 있을까?
카트리나는 조금 설렜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도 저런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멀리서 카트리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카트리나 아가씨! 여기 계셨군요!”
“아가씨, 이리 오세요! 저 괴물 같은 자와 가까이하시면 안 됩니다!”
카트리나를 발견한 백작가의 수하들이 몰려와 그녀를 괴물과 떼어놓았다.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모양새였으나, 괴물은 화내지 않고 끝까지 웃어주었다.
“그럼, 꼬마 아가씨.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카트리나는 그 괴물이라는 남자와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카트리나는 종종 괴물 아저씨가 보여주었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꽤 오랫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처음 제라르 베르체스터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