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제라르는 천천히 리시언의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모르카티움 귀족들을 읊기 시작했다.
“브레드 공작가, 더미스미트 후작가, 리스터너 후작가, 알렌 백작가, 메이플 백작가…… 네게 정치적 힘을 빌려준 이들이 문제다.”
뚜벅.
마침내 제라르의 걸음이 리시언 바로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그들은 결혼 적령기의 여식들과 너의 미래를 상상해보고 있는 것 같더군.”
리시언은 곧바로 코웃음을 쳤다.
“하하,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는 그들에게 조금도 관심 없어.”
“그래. 하지만 네가 레스티아를 선택하는 순간, 저자들은 모두 레스티아의 적이 될 수도 있다.”
그 말에 리시언은 곧바로 불편함을 드러냈다.
“적이라고? 감히, 누가 내 여자를, 베르체스터 공작가를 건드릴 수 있지?”
“물론, 두려워하겠지. 하지만 마냥 속 편히 안심할 수는 없다. 네 자리는 그런 자리다. 달콤한 독을 품고 있는 자리지.”
“…….”
“너는 그 독에 내성을 가지고 있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법도 알고 있지. 하지만 레스티아에게는 무엇이 있나?”
제라르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 애한테는 고작 너에 대한 애정밖에 없지 않으냐. 그것만으로 네 옆에 서기에는 위험하다. 나는 그 애를 그런 곳에 둘 수 없어.”
“아니야. 제라르.”
리시언은 단호한 목소리로 제라르의 말을 끊었다.
그의 생각은 베르체스터 형제들과는 달랐다.
“레스티아는 강해. 그리고 네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는 그 애정이 레스티아의 가장 큰 무기고.”
제라르의 미간이 곧바로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허튼소리를 하는군.”
“허튼소리는 네가 하고 있어. 지금 네 목에 걸려 있는 마력 중화석 목걸이는 누가 만들었지?”
지금 제라르의 목에 걸린 마력 중화석 목걸이는 레스티아가 베르체스터에 애정을 가지지 않았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물건이었다.
황후의 마력 증폭제를 막아내는 마석을 만들어서 베르체스터 형제들을 지켜낸 것 또한 레스티아였다.
“레스티아는 그 목걸이를 만들면서 분명 수많은 좌절을 경험했겠지.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어. 그건 레스티아가 가진 애정의 힘이야. 베르체스터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 낸 결과야.”
리시언은 줄곧 레스티아가 발휘하는 소중한 사람들을 향한 애정이 특별하다고 여겼다.
그 애정에서 비롯된 용기로 그녀는 많은 것들을 해냈다.
삭막하던 베르체스터 저택을 밝게 만들고, 서먹하던 형제들을 화목하게 만들었다.
리시언의 목숨을 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던 그의 마음을 움직여 이 자리에 오도록 했다.
마냥 무뚝뚝하던 제라르가 지금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며 성을 내는 것도, 모두 레스티아의 애정이 그를 변화시켰기 때문 아닌가.
리시언은 레스티아가 가진 용기와 재능, 무엇보다도 선한 애정이 장차 모르카티움 제국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식과 처세술은 학습을 통해 충분히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 조건 없이 사랑을 베푸는 마음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 리시언이 못해내는 일들을 레스티아가 도와줄 것이다.
자신이 있는 자리가 달콤한 독이 가득한 자리면 어떠한가.
레스티아는 애초에 독 따위에 당할 사람이 아니다.
처음에는 두려워하더라도, 결국에는 그 맹독도 제 것으로 만들어낼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애정밖에 없는 나약한 아이 취급이라니.
물론, 제라르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제라르는 장남이자 가주로서 동생들을 지키고자 하는 책임감이 컸으니까.
그리고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막냇동생은 유독 아픈 손가락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레스티아를 마냥 약한 아이 취급하고 무시하는 것을 계속 두고 볼 수 없었다.
“제라르. 레스티아는 어렸을 때부터 용감했고, 지금은 더 강해졌어. 왜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지? 언제까지 어린아이 취급할 셈이야.”
하지만 리시언의 말을 들은 제라르의 표정은 더욱 완고하게 변했다.
“궤변을 늘어놓는군. 그 애는 이제 막 성년이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허튼 애정 따위에 흔들려 위험을 자초하는 것뿐이고, 나는 연장자로서 바른길로 인도하려는 것이다.”
제라르는 더는 대화할 가치가 없다는 듯 축객령을 내렸다.
“돌아가거라. 레스티아에게 당분간 너를 만나지 말라고 했다. 방을 옮기고, 경비를 강화할 생각이다. 그러니, 밤에 몰래 창문으로 저택 안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이런…….”
역시, 어젯밤 일도 눈치챘던 걸까. 그래서 이렇게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것일지도.
“후……, 그래.”
리시언은 짧게 한숨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네 말을 따를게. 대신 나랑 내기 하나 할까?”
“내기?”
“레스티아가 네 생각을 바꾸게 할 경우, 그때는 군말 없이 레스티아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으로. 어때?”
“알겠다.”
제라르는 대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적당히 대답하며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 내기에서 네가 이길 확률은 없어 보이는군.”
리시언은 그저 양쪽 입꼬리를 작게 말아 올렸다.
제라르의 말과는 반대로 리시언은 내기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레스티아의 빛나는 능력은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이 아니니까.
다만, 제라르가 그것을 깨달을 때까지 레스티아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쓰라리기만 했다.
‘그래도, 안개 섬으로 돌려보낸다는 말은 하지 않아서 다행이군.’
리시언은 베르체스터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단정하게 목에 매여있던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이제부터 다시 인내심을 발휘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레스티아는 초조한 표정으로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제라르가 리시언에게 모진 말이나 거친 행동을 취했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내가 부족한 것이니까, 모난 말들은 나만 들어도 되는 건데…….’
속이 상했다.
누가 봐도 황후의 재목으로 보였다면, 제라르의 말에 당당하게 반박할 수 있었을 텐데.
부족함을 자신도 알았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더 속상한 건, 자신의 처지를 자각했음에도 리시언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내가 이기적인 걸까.’
리시언 님은 더 훌륭한 여성과 좋은 인연을 맺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리시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불꽃 나비를 만들어 주고, 품을 내어주고, 입맞춤해준다고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레스티아, 너무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야.”
“그래, 리티! 내가 나가서 어떻게 되고 있나 보고 올게!”
쌍둥이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레스티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그들도 줄곧 리시언을 반대해왔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감정적인 것이었다.
이제 성장한 여동생을 마냥 어린아이처럼 품 안에 둘 수 없다는 섭섭함 정도의 통과 의례였다.
막상 집안의 결정권자가 논리정연하게 반대 의견을 밝히고, 레스티아가 상처받아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이니 안타깝기만 했다.
“리티! 리시언은 잘 돌아갔어. 싸움 같은 것은 없었대!”
결국 마티어스가 응접실의 동태를 살피고 돌아왔다.
“……다행이네요.”
레스티아는 그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레스티아.”
“……리티.”
레스티아는 쌍둥이들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오라버니들 죄송해요. 피곤해서 조금 누워 있고 싶어요.”
“으응. 알았어. 좀 쉬어.”
“그래, 레스티아. 필요한 것이 있으면 꼭 말하고.”
조엘과 마티어스는 안절부절못하며 당부의 말을 건네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레스티아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어떻게 하면 제라르를 설득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러나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나, 한심해.’
아직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피로감이 몰려와서, 레스티아는 그날 온종일 침대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건,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아가씨, 몸이 안 좋으세요?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하실래요?”
“미안, 도라. 오늘은 별로 생각이 없는걸…….”
레스티아는 아침 식사도 거부하고 침대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쌍둥이들은 난리가 났다.
“형님, 레스티아가 충격이 큰 모양입니다.”
“형. 이러다 우리 리티 잘못되면 어떻게 할 거야!”
하지만 제라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단 하루 만에 베르체스터 저택이 삭막하게 돌변했다.
“…….”
레스티아는 침대에 누웠다가, 앉았다가를 반복하다가 자신이 만들어낸 마석들을 꺼냈다.
하지만 도로 집어넣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의미 없게 느껴지고,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이게 책에서 읽곤 했던 실연의 고통이라는 걸까.
그저 계속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방문 밖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스티아! 나, 놀러 왔어!”
안젤라는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레스티아의 상태를 보다 못한 마티어스가 레스티아의 친구인 안젤라를 저택으로 초대한 것이다.
“안젤라?”
안젤라를 마주한 레스티아의 눈이 커졌다.
안젤라는 평소와 달리 휠체어를 타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장미목으로 만들어진 지팡이 하나에 두 다리를 의지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제 걸을 수 있는 거야?”
“응응! 나 최근에 걷기 연습을 하고 있었거든! 짜잔! 걸을 수 있게 되면 보여주려고 이제야 왔어. 놀랐지?”
안젤라가 발산하는 밝은 에너지가 순식간에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레스티아의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다 네 덕분이야 레스티아. 네가 선물해준 마력 중화석이 효과가 있는 것 같아. 이제 잠을 자도 두렵지 않고, 내일이 기다려져.”
안젤라는 그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떠들었다.
마력 중화석을 계속 몸에 지니고 있었더니, 꿈과 현실의 경계가 뚜렷해졌다는 이야기였다.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다.”
레스티아가 희미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그제야 안젤라는 레스티아가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마티어스가 빨리 레스티아를 만나 달라고 독촉하더니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뭐야? 레스티아 무슨 일 있어?”
“그게…….”
레스티아는 그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안젤라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안젤라는 분홍색 눈을 깜박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레스티아. 왜 그걸 걱정해? 예전에 네가 검은 독수리를 길들일 거라고 예언했던 것 기억나?”
“응?”
“이제 확실히 말할 수 있어. 그 독수리는 진짜 독수리가 아니라, 키시어스 대공인걸. 그는 결국 네 것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