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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99화 (99/132)

99화

헤일록은 제라르의 날 선 질문에 곤란함을 내비쳤다.

“죄송합니다. 너무 놀란 바람에, 손님께서 왜 오셨는지 묻지 못했습니다. 다만…… 마차 가득 선물을 싣고 오셨으니, 아무래도 직접 만나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선물이라고?”

조엘과 마티어스는 인상을 찌푸리고 동시에 창밖을 내다봤다.

저택 앞마당에는 황가의 문양이 새겨진 수많은 짐마차가 정차되어 있었는데, 한 눈으로 보아도 저 안에 온갖 귀한 물건들이 가득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엘은 리시언의 의도를 단박에 간파할 수 있었다.

“……약혼이라도 허락받으러 온 건가.”

모르카티움 제국에서 연인이 된 자가 이렇게 많은 선물을 가지고 찾아온다는 것은 남녀 간에 혼사를 논의하겠다는 의미였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마티어스가 버럭 소리쳤다.

“뭐? 어디서 그런 개수작을?”

그와 동시에, 쌍둥이들은 제라르를 바라봤다.

“형님,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형, 리티를 벌써 시집보낼 생각은 아니겠지? 이제야 온 가족이 겨우 같이 지내게 됐는데!”

리시언이 이렇게 나온 이상 가주인 제라르의 뜻이 중요했다.

귀족들에게 있어, 혼약이란 남녀의 사랑을 떠나서 가문 간의 중요한 결탁이니 말이다.

게다가 제라르는 꽉 막혔다 싶을 정도로 귀족적인 삶을 살아가는 남자였다.

조만간 제국의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될 리시언은 지금 귀족들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매력적인 혼처였고 말이다.

쌍둥이들은 제라르가 약혼도 건너뛰고 당장이라도 리시언과 레스티아를 결혼시킬까 봐 걱정스럽기만 했다.

“…….”

제라르는 쌍둥이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레스티아. 손님을 맞이하러 가기 전에 먼저 묻겠다. 언제부터 리시언이 네 연인이 되었지?”

질문을 받은 레스티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미 연인 사이임을 당당히 밝혔지만, 새삼 그 과정을 오라버니들에게 설명하려니 낯 뜨겁기만 했다.

게다가 쌍둥이들이 방금 전에 약혼이라든가, 결혼이라든가 하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들을 꺼낸 탓에 민망함이 컸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제라르는 리시언을 맞이하러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리시언을 이대로 계속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어제 그렇게 사라져 버리더니만, 이렇게 아침부터 찾아온 이유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레스티아는 겨우겨우 입술을 움직여 질문에 응수했다.

“그게…… 얼마 되지 않았어요. 얼마 전에 겨우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그렇게 된 거예요.”

간신히 뱉어낸 대답이었다.

그러나 제라르는 또다시 물었다.

“마음은 언제부터 있었지?”

이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레스티아는 시리도록 푸른 제라르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요.”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단호하고 사랑스러워서, 조엘과 마티어스는 또다시 깊게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

하지만 제라르는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더니만 뜻밖의 말을 꺼냈다.

“역시, 어렸을 때 괜히 가까이 지내게 했군. 그가 네게 독이 될 줄도 모르고.”

“네?”

레스티아의 은회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제라르 오라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독이라니요?”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레스티아에게 리시언은 독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양분이고 토양이고 이상이었다.

그런 사람을 마음대로 평가하는 제라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라르는 단호했다.

“레스티아. 얼마 후에 키시어스 대공의 대관식이 있을 거다. 그런 직위를 가진 자의 연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그건.”

레스티아는 말문이 막혔다.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리시언은 언젠가 황제가 될 거라고. 그래서 레스티아는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부족해도 노력하다 보면, 리시언의 옆자리에 서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리시언은 더 높은 자리로 훌쩍 올라가 버린 것이다.

레스티아는 그 곁에 설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은데.

“그래. 너도 알겠지. 황제의 반려. 그 자리는 수많은 풍파가 도사리고 있는 자리다. 큰 책임감이 필요하고, 괴롭고 외로운 일이 수없이 생길 거다.”

“…….”

제라르는 냉정한 평가를 서슴없이 이어갔다.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보호하에 줄곧 안개 섬이라는 동떨어진 공간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지내온 네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자의 옆자리는 독이 묻은 의자와 같아. 그가 너를 아무리 아낀다고 해도, 너는 타인의 의지로 시들어 버리거나 꺾여 버릴 수도 있다.”

“제라르 오라버니…….”

“나는 그 자리를 네게 감당하게 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어렸을 때 생겨난 미성숙한 감정과 마음 따위에 빠져서 불구덩이로 뛰어들지 말고, 잘 생각해 보아라.”

“…….”

모진 말이었으나, 레스티아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제라르가 진심으로 레스티아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저 과보호라고 취급하기에는 현실적이고 생각해 볼 만한 의견이었다.

되려 조엘과 마티어스가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형!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 리티가 뭐가 부족하다고! 얼마나 똑똑한데, 뭐든 다 해낼 수 있어!”

“그렇습니다. 형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우리 레스티아가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을 리 없지요. 우리도 있고 말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리시언과 레스티아의 사이를 결사반대하던 쌍둥이들이었는데, 어느새 찬성하는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라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조엘, 마티어스. 나는 레스티아의 뛰어남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너희는 레스티아가 겨우 찾은 평화와 자유, 그리고 안정을 버리고 그의 곁에 서서 함께 모진 풍파를 겪기를 바라는 것이냐.”

“윽. 그건…….”

“……이런.”

조엘과 마티어스도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누구보다 여동생의 안전과 행복을 바랐다.

하지만 리시언의 연인이 되면 제라르의 말대로 힘든 일이 다시 생길지도 모른다.

권력의 중심에는 항상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아무리 곁에서 돕는다고 해도, 정말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당사자는 레스티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제라르 오라버니, 저는요……!”

레스티아가 결심한 듯, 무엇인가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제라르는 레스티아의 말을 듣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답은 지금 당장 듣지 않겠다. 냉정을 찾을 때까지, 키시어스 대공과 만나는 것은 금하겠다.”

“네? 제라르 오라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갑작스러운 말에 레스티아가 소리쳤다.

만나지 말라니.

그 한 마디만으로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제라르는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 생각한 끝에, 결심한 듯한 굳은 의지가 보였다.

“조엘, 마티어스. 레스티아를 방으로 데려가거라. 손님은 나 혼자 맞이할 생각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하던 아침 식사 자리는 그렇게 끝나 버리고 말았다.

* * *

리시언은 손님용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어젯밤 흐트러진 모습으로 레스티아를 방문했던 것과는 다르게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평소에는 제대로 착용하지 않던 크라바트도 정갈히 목에 매어져 있었고 말이다.

레스티아를 잠시 만난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하루빨리 곁에 두고 싶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온갖 선물을 준비해서 이렇게 정식으로 베르체스터 공작가를 찾아왔다.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단번에 약혼을 허락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분명 반대할 테지, 하지만 계속 시도할 생각이다.

이렇게라도 레스티아를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여겼다.

신기하기도 하지.

헤어진 지 만 24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리시언을 맞이하기 위해 응접실에 찾아온 이는 제라르 한 사람뿐이었다.

“키시어스 대공. 베르체스터에는 무슨 일이지?”

“제라르.”

제라르가 리시언을 키시어스 대공이라 부르는 것은 공식적인 자리에서가 유일했다.

차갑게 박히는 시선이 시렸다.

하지만 예상했던 바였다.

리시언은 차갑게 내리꽂히는 제라르의 푸른 눈빛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내 연인을 만나러 왔어. 그녀의 오라버니들에게도 정식으로 인사할 겸.”

“역시, 그랬군.”

제라르는 쌍둥이들과는 다르게 리시언과 레스티아의 사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리시언을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키시어스 대공. 베르체스터가 그대를 지지하면서 요구했던 요구 사항을 기억하고 있나?”

리시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제라르가 리시언을 지지하며 요구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베르체스터 공작가에 황명을 거슬러도 언제든지 용서받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특권을 달라고 했다.

리시언은 ‘반란만 아니라면.’이라고 말하곤 그를 수락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건지. 설마.

“그것을 지금 사용하겠다. 나는 내 여동생이 황명에 휘둘려 그대의 여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

제라르의 말에 리시언은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아니, 제라르 베르체스터. 나는 아직 황제가 아니니 그 부탁을 받을 수 없어.”

“하지만 곧, 이겠지.”

제라르와 리시언 사이에 차갑디차가운 기류가 흘렀다.

두 맹수가 서로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원래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법.

리시언이 먼저 경계를 풀었다.

이곳에서 레스티아의 첫째 오라버니와 싸워봤자 득 볼 것이 없었다.

“너무한데. 내가 황권 따위로 레스티아의 거취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한심한 남자로 보였나?”

사실, 조금 뜨끔하기는 했다.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심각하게 반대할 경우, 최후의 보루로 황명을 생각해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좋아. 대륙을 뒤져봐. 나보다 괜찮은 녀석이 나타나면 양보할 테니.”

말은 그렇게 하지만, 도저히 양보한다고 볼 수 없는 오만한 어투와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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