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97화 (97/132)

97화

레스티아는 당혹스러웠다.

한밤중에 창문으로 불쑥 들어와서는 대뜸 자고 가게 해달라니.

아무리 연인 사이일지라도, 이것은 한참이나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다.

무엇보다, 오라버니들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분명, 또 한바탕 난리가 날 텐데.

“리시언 님…….”

레스티아는 양 손바닥을 펼쳐 슬며시 리시언을 밀어냈다.

그러자 리시언은 딱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그리곤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곤란한가?”

답지 않게 속상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저음의 목소리가 마음 한구석을 따끔따끔하게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롭게 보였던 표정도 어느새 어둡게 변해 버렸고, 말이다.

‘비에 젖은 강아지 같아.’

역시, 이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휴…….”

레스티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곧바로 옅은 미소를 만들어냈다.

“정말 어쩔 수 없네요. 들어오세요.”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조금 전, 급하게 자신을 끌어안았던 리시언의 팔이 단단했던 만큼이나 다급하고, 위태롭게 느껴졌으니까.

이렇게 지쳐 보이는 사람을 통상의 예의를 따져가며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막상 리시언이 방 안으로 들어오니까, 뭐랄까, 어색했다.

익숙하던 공간이 리시언의 존재감 하나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방안의 모든 사물이 리시언을 중심으로 일그러지며 끌려가는 것 같은 감각.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얀 캐노피가 하늘거리는 침대가 어째서인지 그 긴장감을 부추겼다.

늘 잠을 청하는 곳이었는데, 리시언이 저곳에 눕는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과 무색하게, 리시언은 침대로 가지 않고 반대편에 놓여 있는 소파에 가서 풀썩 앉았다.

레스티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소파에서 주무시려고요? 불편하시지 않겠어요?”

“응?”

리시언은 그제야 레스티아 뒤편에 침대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야,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침대에서 재우려 그랬어?”

그러고는 놀리듯이 말했다.

“베르체스터 영애. 지금, 저를 유혹하시는 겁니까?”

레스티아의 볼이 곧바로 통통하게 불어나며 새빨갛게 물들었다.

유혹이라니.

그것은 이렇게 한밤중에 대뜸 찾아온 리시언이 먼저 한 것 아닌가.

“그, 그냥 불편하실까 봐 물어본 것뿐이에요!”

“그래? 그거, 아쉽네. 못 이기는 척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그게 무슨……!”

“됐어. 레스티아, 이리 와.”

리시언이 눈꼬리를 느릿하게 접으며 손을 내밀었다.

백금색 반지가 끼워진 손끝이 저절로 시선을 빼앗는다.

냉큼 달려가서 저것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역시, 유혹은 지금 리시언이 하고 있는 것이 맞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경 쓰였던 침대는 어느새 까마득히 잊히고, 이제 그가 앉아 있는 소파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레스티아는 이대로 유혹에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기껏 신경 써줬는데, 자신을 놀리는 리시언이 괘씸하게 느껴져서, 그의 뜻에 조금이라도 반항하고 싶었다.

그래서 재빨리 핑곗거리를 찾았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그만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그럼 불이라도 끌게요. 잠시만이라도 푹 주무시려면 빛이 없는 게 좋을 테니까요.”

탁.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마법 등이 꺼졌다.

그러자 방 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런…….”

곧바로 그 어둠만큼이나 깊은 숨소리가 방안을 잠식했다.

레스티아는 못 박힌 듯, 제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두운데도, 리시언은 선명한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달빛이 오로지 그만을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푸르스름한 달빛을 머금은 금안이 더욱 집요하게 레스티아를 좇는다.

“레스티아. 이렇게 불까지 끄고. 유혹이 너무 노골적인 것 같은데?”

그 탓인지 줄곧 놀리던 목소리도 사뭇 달콤하게 느껴졌고 말이다.

레스티아의 얼굴이 아까 전보다 더 붉어졌다. 불을 끈 게 다행이었다.

“그,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하여간, 못 이기는 척 넘어갈 수 없게 만들어.”

리시언이 아쉽다는 듯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이리 와.”

레스티아는 그제야 주춤거리며 리시언에게로 향했다.

리시언은 그 모습에 흡족한 듯 입매를 말아 올렸다.

그러고는 어둠을 헤치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레스티아를 위해서 불꽃 나비를 만들어 주었다.

“어? 이건…… 오랜만이네요!”

레스티아는 오랜만에 보는 리시언의 마법이 반갑다는 듯이 탄성을 내질렀다.

“와, 이러니까, 옛날 생각이 나요. 처음 베르체스터 저택에 왔을 때, 리시언 님이 어둠을 무서워하는 저를 이 나비를 보여주며 달래 주셨는데, 기억나세요?”

줄곧 쭈뼛거리더니만, 금세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그래. 기억나.”

리시언은 결국 못 참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레스티아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무어라 할 새도 없이 레스티아를 품에 안아 올렸다.

“리, 리시언 님?”

“너는 그때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아서, 이렇게 안아 들고 침대로 데려가야만 했지.”

하지만 과거와 달리, 이번에 리시언이 향한 곳은 침대가 아니라 소파였다.

리시언은 레스티아를 자신이 원하던 자리에 얌전히 내려놓고는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레스티아는 뻣뻣하게 굳은 채, 리시언을 바라봤다.

“이, 이렇게 주무시려고요? 불편할 것 같은데…….”

“충분해. 조금만 눈을 붙이고 돌아갈 거야. 그때까지만 곁에 있어 줘.”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어깨를 끌어당겼고, 레스티아는 리시언이 이끄는 대로 그의 품 안에 상체를 묻었다.

서로의 심장 소리가 너무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너무 좋다.”

리시언은 사막에서 물을 찾아낸 사람처럼 감탄사를 내뱉었다.

“부탁할게. 조금만 이대로 있어 줘.”

그러고는 애절한 부탁의 말을 전하며 레스티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레스티아는 이제 리시언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애써 리시언이 만들어낸 나비들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까 저도 궁금해요. 리시언 님은 왜 나비 모양으로 불꽃을 만드시는 거예요?”

“그냥, 어렸을 때의 버릇이 남아 있는 것뿐이야.”

“어렸을 때의 버릇이요?”

“그래. 어린 시절의 나는 베르체스터 성 밖으로 나갈 수 없었어. 그런데 나비는 자유롭게 성 밖을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

레스티아는 숨을 죽였다.

리시언의 과거는 오라버니들을 통해 전해 들었지만, 그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자유가 부러웠어. 그래서 마법으로 종종 나비를 만들어 성 밖으로 날려 보내곤 했어. 쓸 수 있는 마법이 불 속성 마법뿐이었으니까.”

“……그랬군요.”

레스티아는 리시언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베르체스터 성의 방을 떠올렸다.

끝없는 바다가 내다보였던 적막하고 고요하던 그의 방.

그 위로 날려 보낸 수많은 불꽃 나비들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 모든 것들이 리시언의 마력에서 읽어냈던 고독과 외로움과 뒤섞여 선명하게 떠올랐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파져 오는 것 같았다.

대단한 사람.

저 사람은 그것들을 어떻게 견뎌온 걸까.

하지만 리시언은 그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밝게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다른 모양으로 만들게. 원하는 게 있어?”

레스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나비 모양이 좋아요.”

레스티아의 손이 리시언의 손 위로 포개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알이 없는 반지를 바라봤다.

“나비는 제가 만드는 꽃에 무척 잘 어울릴 거예요. 그렇죠?”

“……그렇겠네.”

레스티아와 리시언은 그 대화를 시작으로 소파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레스티아는 주로 자신이 안개 섬에 있을 때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했고, 리시언은 제국의 현재 상황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전혀 상관도, 접점도 없는 이야기들이었으나, 두 사람의 대화에는 조금의 막힘도 없었다.

잠을 잔다는 목적은 어느새 새카맣게 잊히고 말았다.

두 사람에게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참 동안 대화를 주고받던 어느 순간.

어느새 레스티아의 말이 멈추었다.

“레스티아……?”

리시언이 조심스레 레스티아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 없는 들숨 날숨만이 들려왔다.

“……잠든 거야?”

레스티아는 어느새 리시언의 품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무척이나 편해 보이는 표정으로.

“이런.”

리시언의 얼굴에 낭패감이 비쳤다.

자러 왔는데, 반대로 재워 버리게 될 줄이야.

하긴, 레스티아가 이렇게 품 안에 있는데 잠들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조금 야속하네.”

리시언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너무 믿고 있는 것 아닌가.

분명,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남자는 늑대라고 잘 가르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무방비하기만 한 건지.

그 사실이 기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다.

마음 같으면 이대로 황궁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참아야겠지.

베르체스터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리시언은 레스티아를 조심스레 안아 들어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레스티아를 침대 위에 눕히고,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어렸을 때는 가엾고 딱해서 했던 일이었는데, 이제는 사랑하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래, 사랑.

“하하…….”

문득 그 단어를 떠올리고 나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새삼스레 레스티아 덕분에 자신이 알아가는 감정이 참 많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아낀다는 감정도.

이렇게 예쁜 사람이 존재한다는 감정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감정도.

하나하나 달콤하고 눈부셔서 감히 품어도 되는 감정인가 싶을 정도로 즐거웠다.

그러니까, 놓쳐서는 안 되겠지.

“잘 자, 레스티아. 내일은 낮에 만나러 올 테니까.”

잠든 레스티아의 이마에 입술을 찍는 것을 끝으로, 리시언은 방안을 유영하던 불나비들을 거두어들였다.

그러고는 처음 이곳에 들어왔던 대로 창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쓰러질 듯 피로하던 몸의 감각은 온기를 잔뜩 머금은 덕분인지 평안하기만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