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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93화 (93/132)

93화

세이튼은 곧바로 검붉은 마검을 만들어 내 리시언의 검을 받아냈다.

챙챙! 채애애앵-! 챙챙!

검과 검이 엄청난 속도로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울림이 서재 안을 가득 메웠다.

“대공, 전하. 이건…… 제 의지가…… 아닙니다. 몸이 멋대로…….”

세이튼이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변호했다.

이미 그의 몸은 상처 투성이었다.

홀로 베르체스터 저택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오느라 입은 상처였다.

‘네가 죽더라도 레스티아 베르체스터를 죽이고 죽으라.’는 황후의 명령에 충실한 결과였다.

세이튼의 의식은 그 명령에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평소에 그의 광기를 막아 주고 있다고 여겼던 목걸이가 황후의 명을 따르라 강요하고 있었다.

“알아.”

리시언도 세이튼이 황후에게 조종당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가 정말로 레스티아를 살해하려 했다면 목을 조르는 것보다 마검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이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어.”

지금 리시언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움직일 수 없었다.

저자의 손아귀가 레스티아의 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그 상황을 목격한 순간 심장이 멎어 버리는 줄 알았다.

조금만 늦게 도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야 겨우 곁에 있을 수 있게 된 레스티아를 잃는다면.

저 작은 몸이 가진 따뜻한 온기를 두 번 다시 느낄 수 없다면.

상상만 해도 피가 마른다.

그러니까, 레스티아의 숨통을 막히게 했던 저자의 숨통을 끊어내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분질러 버려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적어도 레스티아가 괴로워했던 것보다 더 괴롭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주저 없이 자신의 모든 힘을 검에 담았다.

“크윽.”

세이튼은 검상을 입으며 점점 더 뒤로 밀려났다.

가까스로 아슬아슬하게 급소를 피하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리시언의 공격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지긋지긋한 온리드라스.

매일 밤마다 악몽으로 나타나는 저 빌어먹을 마검.

짜증 나도록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종자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씨를 말려 역사에서 지워 버렸어야 했다.

황후도, 무엇도, 더 이상 저것이 가진 힘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이성은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분노만이 리시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윽……! 아, 안 돼…….”

리시언이 세이튼의 상체를 가로로 깊게 베어냈을 때, 세이튼은 더는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을 수 없음을 느꼈다.

“……죄, 죄송합니다.”

결국, 그는 마지막 사과의 말을 끝으로 황후의 명령에 몸을 맡기고 의식을 잃었다.

그와 동시에 세이튼의 마검에 깃든 마력이 더 흉흉하게 변했다.

검은 안구에 자리 잡은 주홍색 홍채에서는 살의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레스티아는 세이튼의 몸에서 광기 어린 마력이 폭발적으로 솟아남을 감지하고는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안 돼! 위험해요. 리시언 님……! 도망쳐야 해요!”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리시언은 세이튼의 변화에 조금의 당혹감도 느끼지 못했다.

세이튼의 마검이 황후의 마력 증폭제로 그 위력을 더욱 강하게 키운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4년 전, 세이튼과의 첫 전투에서 리시언은 일반적인 철검으로는 온리드라스의 마검을 막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이후, 대륙 전체를 뒤져서 마검에 맞설 수 있는 검을 찾아내서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리시언은 속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적이 도약하면 땅의 힘으로 발목을 잡아 바닥에 주저앉힌다.

적이 검을 휘두르면 바람의 힘으로 경로를 이탈시킨다.

적이 빈틈을 노리면 불의 힘으로 섬광을 발해 눈이 멀게 한다.

운 좋게 스치듯 들어오는 공격은 물의 힘이 가진 보호막이 완벽하게 차단했다.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검으로는 오로지 적의 급소를 노릴 뿐.

“크아아아아악!”

결국 세이튼은 이성을 잃고 날뛰다가 실 풀린 인형처럼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황후의 명령을 더 이상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육체의 힘이 다한 것이다.

이것으로 끝이다.

리시언은 마무리를 짓기 위해 바닥에 쓰러진 세이튼의 목을 향해 주저 없이 검을 그었다.

그런데.

마검도 아닌, 볼품없는 롱소드 한 자루가 불쑥 튀어나와 리시언의 검을 막아섰다.

까앙-!

투박한 쇠붙이 소리와 함께 리시언의 검을 막아선 롱소드의 날이 순식간에 부러졌다.

결국 리시언은 세이튼의 목을 치는 데 실패했다.

방해꾼에 의해 검로가 어긋났다.

누가 감히 건방지게.

리시언은 거칠게 고개를 돌려 그 검을 쥐고 있는 자를 바라봤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리시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물기 어린 은회색 눈동자가 낯익다.

“윽……! 리시언 님. 잠시만요. 멈추세요!”

“……레스티아?”

리시언의 마지막 일격을 막아선 것은 레스티아였다.

부러진 롱소드의 손잡이를 힘껏 움켜쥐고 있는 손이 검 날이 부러진 반동에 의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레스티아는 리시언을 막기 위해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호위 기사의 롱소들을 들고 싸움에 끼어들었다.

검술 수련을 오래 해왔지만, 이렇게 실전에 끼어든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초심자의 행운이 따라준 모양이었다.

레스티아는 자신이 리시언의 일격을 막아냈다는 사실에 안도했으나, 리시언은 미간을 좁히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 레스티아.”

하지만 레스티아는 비켜서지 않았다.

“아니요. 그럴 수 없어요! 제가 비키면 이대로 세이튼 님을 죽일 생각이신 거잖아요!”

리시언의 금안이 형형히 빛났다.

“그래. 죽일 거야. 이 새끼가 너를 죽이려고 했으니까.”

“안 돼요!”

레스티아는 그 금안을 또렷이 바라보며 애원했다.

“그러지 마세요! 저는 이제 괜찮아요. 세이튼 님도 이미 기절하셨잖아요. 리시언 님. 제발, 지금 제정신이 아니세요!”

그래. 제정신이 아니다.

리시언도 그 사실을 이미 자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정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왜냐면.

“제기랄, 레스티아. 내가 제정신 일 수 있을 것 같아? 난 저 망할 온리드라스에게 부모님을 잃었어. 그런데 이번에는 너까지 잃을 뻔했어! 그런데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고는 아차 싶어, 크게 숨을 뱉어내고 레스티아를 어르고 달래듯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비켜줘. 제발.”

그럼에도 레스티아는 비켜서지 않았다.

“그래도 안 돼요. 저는 리시언 님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걸 볼 수 없어요! 세이튼 님은 그저 이용당했을 뿐이에요. 리시언 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손은 떨리고 있을지언정, 목소리는 또렷하다.

부러져서 쓸모가 없는 롱소드 한 자루가 여전히 리시언의 검을 막아서고 있었다.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말을 무시할 수 있었다.

검 손잡이에 조금만 힘을 주어도 그녀가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경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레스티아는 연약하지만 단단하고 용감했다.

리시언을 불길에서 구해낸 후, 소중해서 구했다고 말했던 그때처럼.

“하……. 레스티아.”

피로함이 급격히 몰려왔다.

줄곧 제대로 잠도 못 잔 데다가, 아침부터 여태까지 마법을 쓰느라 체력도 정신력도 한계였다.

그래서일까, 예민했다.

사고 회로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잔뜩 비틀린 생각을 내뱉었다.

“그래…… 지금 네게 소중한 건 세이튼이야? 그래서 구하려는 거야?”

“네?”

레스티아는 리시언이 내뱉은 뜻밖의 말에 놀라서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그 누가 봐도 금시초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리시언은 천천히 레스티아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잔뜩 가라앉은 황금빛 눈동자로 레스티아가 들고 있는 부러진 롱소드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어렸을 적에 검으로 나를 이기고 싶다고 했지.”

리시언은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버렸다.

“그래. 이번에 확실히 네가 이겼어. 내 패배야.”

그리곤 패배를 선언했다.

레스티아가 설령 저 망가진 롱소드로 리시언의 심장을 찌른다고 해도 리시언은 지금의 레스티아에게 검을 들이댈 수 없었다.

날아갈세라, 부러질세라, 너무 소중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데, 날붙이 따위를 들고 감히 눈앞에서 겨룰 수 있을 리 없다.

설령 들고 있는 것이 검이 아니라 작은 나뭇조각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레스티아. 이걸로 너는 약속을 전부 지켰어.”

다만 슬픈 것은.

“그런데, 그 약속을…… 저 자식을 지키는 데 사용할 줄 몰랐어.”

그게 싫었다.

리시언이 레스티아를 검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을 깨닫게 한 존재가 결국 세이튼이라는 사실 말이다.

리시언이 줄곧 거슬려 하고 있던 세이튼이었다.

그 녀석을 지키고자 검을 든 레스티아를 바라봐야 하는 이 상황이 미칠 것만 같았다.

참으로 보기 싫은 풍경이지 않은가.

이런 데 쓸데없이 질투심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은 또 얼마나 초라한지.

리시언은 검을 버린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최악이다.

화를 낸 것도 모자라서, 탓해버리고 말았다.

유치하게도 무슨 말을 내뱉은 건지.

리시언은 현기증을 느끼고 잠시 비틀거렸다.

“리시언 님……! 괜찮으세요?”

그럼에도 제 걱정을 해주는 레스티아를 볼 면목이 없었다.

“괜찮아. 엉망이네. 기다려. 사람을 불러올 테니.”

그래서 뒤돌아섰다.

이대로 사람을 불러 뒷정리를 하게 하고, 황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엉망진창인 데다 제정신이 아닌 자신보다 더 레스티아를 잘 위로하겠지.

애초부터 그 녀석들을 이곳에 보냈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세이튼이 아직도 거슬린다.

저자는 이 일로 목숨을 건졌으니, 레스티아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

과거에 리시언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니 더 화가 났다.

이렇게 볼품없는 인간이었던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서, 최고의 것만 주고,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는데, 몽땅 어그러진 기분.

그럼에도 더는 망칠 수가 없다는 생각에, 리시언은 이성이 시키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 자리에 더 있다가는 어떤 미친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지독한 고독감이 온몸을 뒤덮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문득 등 뒤로 따스함이 느껴졌다.

레스티아가 달려와 리시언을 뒤에서 꼭 껴안은 것이다.

“리시언 님! 정말 나빴어요! 또 속상한 말만 하고 사라져 버릴 생각이에요? 이번에는 절대 안 돼요!”

리시언을 허리를 힘껏 붙잡은 레스티아의 양팔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방금 전, 세이튼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롱소드를 움켜잡았을 때보다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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