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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92화 (92/132)

92화

황후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방해꾼이 나타났구나. 치워라.”

그 명령을 받은 이들이 신속하게 리시언의 주변을 포위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리시언만이 아니었다.

세 명의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리시언을 엄호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속성 마법이 소리 없이 몰아치며 황후의 수하들을 제거해나가기 시작했다.

“…….”

리시언은 그저 카펫을 밟고 말없이 황후와 황태자가 있는 황좌로 걸어나갔다.

순식간에 황후의 수하들을 정리한 베르체스터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황후는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소리쳤다.

“멍청한 베르체스터들. 이곳에서 마법을 쓴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그러고는 허공으로 검은 가루를 흩뿌렸다.

리시언과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마력 증폭제.

황태자가 몇 번이나 베르체스터 형제들을 위험에 빠뜨린 물건이었다.

조엘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바람을 일으켜 그것을 치웠다.

“저런. 이제 이런 건 우리에게 안 통한답니다.”

지금 베르체스터 형제들의 품속에는 레스티아가 만들어 준 연꽃 모양의 마석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까.

“이럴 수가……. 에리히엔!”

황후는 그제야 다급하게 에리히엔을 불렀다.

구울과 다를 바 없는 에리히엔의 괴력과 불사의 힘으로 이 문제를 타개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에리히엔 역시 제라르에 의해 제압된 상태였다.

제라르는 성인 남자가 들어갈 만한 커다란 물방울을 만들어 에리히엔을 가두어두었다.

꼬르르륵-. 꼬륵.

에리히엔은 그 안에서 허우적거렸으나, 빠져나오지 못했다.

제라르가 푸른 눈동자를 차갑게 좁혔다.

“……물속에 가두어도 숨이 끊어질 생각이 없군. 불사의 몸이라도 된 건가.”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질렸다는 듯이 일제히 황후를 바라봤다.

리시언 역시 침묵을 깨고 물었다.

“황후. 이렇게까지 권력이 가지고 싶었나?”

황후는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독기가 찬 시선으로 리시언을 노려봤다.

“아하핫! 그래. 내가 죽어도, 너희는 내 아들을 죽일 수 없을 거다. 내 아들은 모르카티움 제국의 황족으로 영원히 살아갈 거다! 그렇다면 언젠가 기회는 또 오겠지.”

“……어이가 없군. 고작 그것을 위해. 이렇게 많은 희생이 필요했나?”

리시언이 피바다로 물든 알현실을 가리켰다.

“당연한 것 아닌가. 키시어스 대공. 록산느 황녀와 비슷한 말을 하는구나. 그러니까 지는 거다.”

리시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어머니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너에게 이긴 건 나야.”

황후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무슨 소리! 내 아들이 살아 있는 이상 아직 끝나지 않았어!”

리시언은 더 이상 상종하지 않겠다는 듯 대화를 중단했다.

대신, 마티어스가 더는 못 들어주겠다며 짜증을 냈다.

“윽. 완전 미쳤네. 이 여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여기서 죽여?”

조엘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일단 가둬 둔 후에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공개 사형하는 것이 좋겠지. 이 여자의 거점인 동부에 대한 본보기로 말이야. 그게 혹시 모를 내전을 대비하는 방책이야.”

제라르가 리시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겠나, 리시언.”

이미 황태자와 황후의 처분에 대한 권한은 리시언에게 있었다.

“……그런데.”

리시언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래서 황후에게 다가가 물었다.

“황후. 세이튼은 어디에 있지?”

“아하하핫!”

그 질문에 황후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을 이제야 물어보냐는 듯한 조소였다.

“배신자에게는 배신을 만회할 기회를 주었네. 세이튼은 그냥 버리기엔 아까운 인재니까. 끝까지 알차게 써야지.”

리시언은 미간을 좁혔다.

배신을 만회할 기회?

세이튼이 황후를 배신한 것은 레스티아에게 황궁에 오지 말라고 경고한 일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설마.

리시언은 베르체스터 형제들을 향해 소리쳤다.

“레스티아는 베르체스터 저택에 있나?”

곧바로 마티어스가 대답했다.

“응? 뭐, 그야. 당연히 베르체스터 저택에 안전하게 있지. 왜 그래?”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잠깐, 리시언. 어디 가는 거야?”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알현실 밖으로 향하는 리시언을 가로막고 설명을 요구했다.

이제부터 네가 이 황실의 주인인데, 마무리를 짓지 않고 어디를 가냐는 말이었다.

하지만 리시언은 주저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목적지는 베르체스터 저택이었다.

레스티아가 안전하지 않다면 황후의 목숨도, 황좌도, 모르카티움 제국의 미래도 리시언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 * *

레스티아는 오라버니들을 마중한 후에 서재에 앉아 평범한 일상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걱정되어서 좀처럼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집중하자. 집중! 나는 내 일을 해야 해.’

레스티아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는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여러 종류의 마석과 마도서들이 가득했다.

그중에는 이제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카트리나를 위한 마력 중화석도 있었다.

‘그래. 이것부터 빨리 마무리하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것뿐만 아니라 리시언에게 줄 마력 중화석도 어느 정도 구상해 두었다.

레스티아는 책상에 잘 놓아둔 반지를 바라봤다.

미리 사둔, 알이 비어있는 반지였다.

리시언을 위한 마력 중화석이 완성되면,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붙잡아 두던 그 손에 이것을 끼워주고 싶었다.

생각만 해도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나도 참, 그러려면 집중해야 해!’

레스티아는 애써 연구에 몰두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연구를 중단해야 했다.

콰과광.

저택의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저택의 사용인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

레스티아의 호위 기사들 역시 레스티아를 찾아서 다급하게 달려왔고 말이다.

“무슨 일이에요?”

레스티아가 당황해서 물었다.

“어서 자리를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침입자가 있습니다!”

“침입자요?”

그 말에 레스티아는 재빨리 마석들을 작은 가방에 챙겨 들고 호위 기사들을 따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서재 밖으로 나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느새 나타난 침입자가 서재의 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처음부터 레스티아만을 노리고 왔다는 것처럼.

“당신은…….”

피처럼 새빨간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검.

광기 어린 마력.

“세이튼 님?”

레스티아는 저택의 침입자가 세이튼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얼어붙었다.

온통 새카만 색으로 뒤덮인 눈에 주홍색 홍채가 형형하게 빛나며, 광기를 더욱 발산하고 있었다.

“공녀님. 저희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도망치십시오!”

호위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고 레스티아를 지키고자 섰다.

하지만 세이튼의 붉은 마검은 무자비하게 기사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레스티아는 호위 기사들이 피를 흘리며 차례차례 쓰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그만! 그만하세요! 세이튼 님. 제게 황궁에 오지 말라고 하더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셨나요?”

그러자 세이튼이 레스티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무언가 괴로운 듯, 마검을 거두어들이고는 목덜미에 있는 가죽 목걸이를 잡아 뜯으려 노력했다.

“베르체스터 영애. 죄송…… 합니다. 절대로 그건…… 아닌…….”

세이튼은 죄송하다는 말을 힘겹게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레스티아에게로 다가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무언가에 저항하듯이 마검은 거두어들였지만, 레스티아에 대한 살의는 억누르지 못하는 듯했다.

레스티아는 도망쳤다.

하지만 몇 걸음 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결국 세이튼의 손이 우악스럽게 레스티아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꺅!”

목에 매고 있던 스카프는 엉망으로 구겨지면서 레스티아의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밀쳐졌다.

세이튼은 레스티아의 위에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숨이 막히고 괴로웠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세이튼이 지금 눈물을 흘리며 레스티아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면서 말이다.

“세이……튼……님. 왜……?”

레스티아는 고통을 참아가며 세이튼을 가까이서 관찰했다.

이제 보니 평소에 세이튼이 착용하고 있던 검은 가죽 목걸이에 처음 보는 마석이 달려 있었다.

레스티아는 가까스로 손을 뻗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세이튼의 팔을 잡아 마력의 흐름을 간략하게 분석했다.

그 흐름이 황태자가 사용했던 마력 증폭제와 비슷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강제로 조종당하고 계신 것 같아.’

괴로워 보여서.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세이튼이 레스티아를 놔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세이튼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사죄의 말을 건넬 뿐, 손에는 더더욱 힘을 주어 레스티아의 목을 옥죄고 있었다.

“으윽.”

아마 최악의 경우, 레스티아는 이곳에서 살해당할 것이다.

‘그런 건 싫어.’

레스티아는 힘껏 세이튼을 밀쳤다.

하지만 세이튼은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여기서 죽는 걸까.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그래. 무어라도 해야 해.

레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세이튼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세이튼이 레스티아를 놓아주고는 재빨리 뒤로 몸을 피했다.

마치 위험을 감지한 짐승처럼 그 몸놀림이 매우 빨랐다.

콰드드드득.

차가운 바람이 일렁이며, 강한 힘이 실린 검이 바닥을 긁어내며 뿌연 먼지를 일으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쿨럭, 쿨럭.”

레스티아는 기침을 쏟아 내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리시언의 등이 보였다.

그는 커다란 바위처럼 세이튼으로부터 레스티아를 가로막고 있었다.

하얀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꽉 움켜쥔 검.

오로지 세이튼을 향하고 있는 선명한 살의.

“쿨럭……. 리시언 님?”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리시언은 말릴 새도 없이 검을 들고 세이튼을 향해 파고들었다.

“감히…… 누구한테 손을 대.”

잇새로 새어 나오는 저음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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