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황성의 문을 닫아라!”
“불가능합니다! 문을 지키던 이들이 당했습니다!”
황성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은 구울로 변한 제 동료들과 대치하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처음 구울이 나타났을 때, 그 전염성을 파악하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 탓에 적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손쓰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
리시언은 그 모습을 관망하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포르르.
수많은 불꽃 나비들이 나타나 구울들에게로 날아가 살포시 앉았다.
그와 동시에 무지막지한 고온의 화염이 구울들을 잿더미로 만들며 안식을 선사했다.
황궁 안으로 향하는 길은 그렇게 쉽게 만들어졌다.
“헉……!”
황실 기사단은 숨을 죽이고 리시언이 만들어낸 화염의 절경을 감상했다.
키시어스 대공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법을 사용하리라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황궁에 기거하는 모두의 눈빛에 리시언을 구원자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깃들어 있었다.
“대공 전하! 무사하셨습니까! 황궁 밖에 계셨다니, 다행입니다.”
황실 기사 단장이 리시언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달려왔다.
곧바로 낮은 목소리가 그를 지적했다.
“여러모로 근무 태만인데. 황실 기사단이 제대로 성도 지키지 못하고 말이야.”
기사 단장은 부끄러운 듯이 곧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송구합니다. 구울이 갑자기 황성 안팎으로 나타나는 바람에 대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황후는 어디에 있지?”
리시언은 더 추궁하는 대신 제일 먼저 이 일의 유력한 용의자의 행방을 물었다.
“예. 황후 폐하께서는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황제 폐하의 궁으로 향하셨다고 보고받았습니다.”
그 말에 리시언은 미간을 좁혔다.
설마, 용병을 구울로 만드는 일은 황제를 노리고 벌인 일인가.
황제가 사라지면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는 것은 당연하니, 황제를 제거하는 것이 맞는 행동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황후가 이런 멍청한 짓을?
황제가 늙고 연로하다고 하여도 그는 모르카티움 제국의 최고 권력자였다.
황제를 개인적으로 호위하는 그림자 호위만 해도 수십이며, 황제의 궁에는 그를 비호하는 각종 보호 마법이 촘촘히 설계되어 있다.
이 구울들이 기이한 능력을 갖추었다고 해도.
황제를 비호하고 있는 견고한 궁은 문턱조차 넘게 놔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아니, 계란을 거대한 절벽에 내던지는 것과 같았다.
궁지에 몰린 생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자멸할 것임이 뻔한 수였다.
황후가 실성이라도 한 것인가.
아니면 어떤 기막힌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황제 폐하를 뵈러 가봐야겠다.”
리시언은 황제의 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기사 단장이 다급하게 리시언 앞을 가로막았다.
“대공 전하. 위험합니다. 지금 황제 폐하의 궁에는 갈 수가 없습니다. 구울들이 빼곡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지 않을 리시언이 아니었다.
리시언은 구울들을 모두 불태우며 수하들과 함께 천천히 황제의 궁으로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왜 기사 단장이 이곳으로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는지 알아차렸다.
황제의 궁에는 생각지 못한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대한 반원 모양의 새카만 돔이 황제의 궁을 덮고 있었다.
그것은 말미잘의 촉수처럼 기이하고 불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건. 마법인가.”
의문의 돔은 마력이 느껴졌고, 조금씩 조금씩 더 거대해졌다.
하여간, 황후는 매번 기이한 마법을 썼다.
리시언은 앞으로 나서 불의 마법으로 그 돔을 태워보았다.
하지만 새카만 촉수들은 움찔거리기만 할 뿐 타오르지 않았다.
“……마력을 흡수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물리적인 힘은 통할까.
리시언은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돔을 향해 가로로 길게 검로를 만들어냈다.
그러자 딱딱한 게 껍질이 바스러지듯 돔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물리적인 힘만 허용하는 모양입니다!”
리시언의 수하들 역시 검을 들고 꿈틀거리는 검은 돔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꽤 걸리겠어.”
하지만 이것들을 제거하고 황제의 궁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때였다.
“리시언.”
“꽤 애쓰고 있는 것 같은걸.”
“뭐야. 이 기분 나쁜 건?”
리시언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도착했군.”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전서구를 받자마자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리시언을 바라보는 표정이 영 탐탁지 않아 보였다.
리시언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런데 어째, 다들 나한테 불만이 많은 표정이야?”
그 말에 마티어스가 자색 눈동자를 빛내며 양 주먹을 으득으득 갈았다.
“맞아. 지금 네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어.”
조엘 역시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리시언. 하지만 이것부터 먼저 해결하고 나중에 이야기하지.”
제라르는 말없이 미간을 좁히고 있었지만, 쌍둥이들의 표정과 다를 바 없었다.
리시언은 개의치 않고 물었다.
“아무래도 봤나 봐?”
“뭘?”
“키스 마크.”
“…….”
“…….”
“…….”
그 단어 한마디에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레스티아와 아침 식사를 했을 때처럼 침묵에 휩싸였다.
리시언을 연인이라 칭한 레스티아의 말을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더 나아가서 키스 마크라니.
그렇다면 레스티아가 하고 있던 스카프의 정체는 그것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나.
뜻밖의 정보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베르체스터들.
그들을 향해 리시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승자의 여유까지 느껴지는 뻔뻔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말대로 지금은 이걸 해결하는 데 집중해. 항의는 나중에 받을 테니까.”
* * *
황제의 궁.
“에리히엔. 거기까지만 하렴.”
알현실 가득히 황후의 목소리가 경쾌하고 산뜻하게 울려 퍼졌다.
“네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술잔을 나누어야 하니까 말이야.”
“크으……. 배고픈데.”
에리히엔은 황제의 곁을 지키던 마지막 호위기사의 목을 물어뜯으며 배고픔을 호소했다.
하지만 황후의 지시대로 곧바로 하던 행동을 멈추어 섰다.
“황후…….”
황제는 백금으로 만들어진 황좌에 앉아 주름진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황후의 표정은 나긋나긋하고 자애롭기만 했다.
“폐하. 그렇게 화난 모습으로 저를 쳐다보셔도 지원군은 오지 않습니다. 제가 진작에 아무도 황제의 궁에 얼씬도 못 하게끔 막아 두었답니다.”
황후는 황제가 알현실에서 외교 사절단을 맞이하고 있을 때를 노려 급습했다.
궁에 설치되어 있던 견고한 방벽들은 황후가 거느리고 온 마법 연구자들에 의해 파훼됐다.
호위 기사들은 마치 들짐승 같이 변해 날뛰는 에리히엔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말이다.
황제는 오랜만에 만난 에리히엔의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검과 창으로 몸을 찔러도 몇 번이고 되살아나는 에리히엔의 모습은 마치 언데드 마물과 같았으니 말이다.
모든 것들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불사의 몸이라. 황후, 짐 몰래 금지된 마법을 연구한 건가.”
황후는 대답 대신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황좌 곁에 있는 테이블에서 두 개의 빈 유리잔에 독주를 따랐다.
알현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피비린내에 독주의 오크향이 섞여 기이한 향기가 되어 퍼져나갔다.
“폐하, 어떠십니까. 우리 황태자의 성장이 마음에 드십니까?”
그리고 한잔을 황제에게 건넸다.
“이제는 아주 쓸모 있지요?”
황제는 그 잔을 받아 들지 않았다.
“……성장이라니, 기괴하고 끔찍하다.”
“이상한 말입니다. 폐하. 폐하는 젊은 시절에 강한 힘을 가지기 위해 이것보다 더 기괴하고 끔찍한 일을 서슴지 않고 하셨으면서.”
“…….”
“적황녀가 살아 돌아온다면 지금의 폐하를 보고 무엇이라고 할까요.”
황제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그렇게 부정하셔도, 이제 에리히엔이 황제 폐하의 뒤를 이을 것입니다.”
황후는 들고 있는 두 개의 잔 중 한 잔을 제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제가 이길 겁니다.”
그리고 황제가 거절한 한 잔은 바닥으로 내던졌다.
“결과는 지옥에서 지켜보시지요.”
챙그랑.
유리잔이 바닥에서 흩어지는 것을 끝으로 황제의 심장으로 비수가 날아들었다.
그렇게 연로한 황제는 피를 토하며 눈을 뜬 채 숨을 거두었다.
“치우거라.”
황후는 황제의 눈을 감겨 주지 않고, 황좌 밖으로 끌어내라 지시했다.
그리고 빈 황좌에 에리히엔을 앉혔다.
“역시. 예상대로 무척 잘 어울리는구나.”
황후는 그 모습을 보며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지금 이 풍경은 그녀가 오래도록 원하던 그림이었다.
“자, 그럼 사제를 데리고 오거라.”
곧바로 황좌 앞으로 신전에서 붙잡혀온 고위 사제가 끌려 나왔다.
“사, 살려주십시오!”
사제는 눈앞에 벌어진 참상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질겁했다.
하지만 황후는 싸늘한 목소리로 사제에게 제 할 일을 하라 명할 뿐이었다.
“무엇하고 계시는가?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으니…… 곧바로 황태자의 대관식을 진행하시게.”
그러고는 피가 묻은 채로 바닥에 나뒹굴던 황제의 관을 손수 들어 사제에게 쥐여주었다.
“어서. 내 아들의 머리 위로 이것을 올리란 말이다.”
“화, 황후 폐하. 하, 하오나. 대관식을 이런 식으로 치르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대관식은 신성한 것입니다. 역사상 이런 피바다 위에서 황제의 관을 받은 황제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황후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무슨 말인가. 규칙과 역사는 승자가 만드는 거라네.”
그 광기에 도취된 말과 태도에 사제는 마지못해 황제의 관을 잡아들었다.
그러고는 덜덜 떨며 무릎걸음으로 에리히엔이 앉아 있는 황좌를 향해 기어갔다.
“가관인데.”
그때, 뜻밖의 목소리가 알현실에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황후의 얼굴에서 줄곧 머물고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키시어스 대공.”
리시언은 느릿하게 알현실 중앙에 깔린 붉은 카펫을 밟았다.
어디까지가 카펫이고 어디까지가 피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타국의 외교 사절단은 물론이요 황제와 궁인들의 시체로 이루어진 피바다.
“이것 참. 무어라 해야 할지…….”
황후가 벌인 참상을 마주한 리시언의 황금빛 눈동자가 어둑한 실내에서도 선연히 빛났다.
“황후께서는 황족 시해 죄에 민감하신 분이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