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오라버니들…….”
레스티아도 베르체스터 형제들과 함께 황궁으로 가고 싶었다.
리시언도 걱정되었고 형제들도 걱정됐다.
하지만 예기치 못하게 전투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레스티아의 능력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격 마법을 연구해 두었다면 좋았겠지만, 안개 섬에서는 공격 마법이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익힐 수가 없었다.
검술 훈련을 틈틈이 해오기는 했다. 하지만 대련 상대가 없어서 실력이 크게 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베르체스터 형제들을 따라가도 분명 방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다른 방법으로 형제들을 도울 수 있었다.
지금 조엘의 팔에 감겨 있는 팔찌도.
마티어스의 귀에 걸린 피어싱도.
제라르가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도 모두 레스티아가 만들어낸 마력 중화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참! 오라버니들 이것도 가지고 가세요.”
레스티아는 손톱만 한 크기의 분홍색 연꽃 모양의 마석을 베르체스터 형제들에게 건넸다.
“리티, 이건 뭐야?”
“갑작스러운 마력 증폭을 막을 수 있는 마석이에요.”
황태자가 몇 번이나 썼던 검은 연기. 그것으로부터 베르체스터 형제들을 지킬 수 있는 마석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 둔 것이었다. 그 마력 증폭제로부터 형제들을 몇 번이나 잃을 뻔했던 기억이 쓰라렸기 때문이다.
“레스티아. 덕분에 든든한걸.”
“잘 쓰마.”
“고마워, 리티!”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그것을 받아 들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셔야 해요.”
레스티아 역시 밝게 웃으며 베르체스터 형제들을 배웅했다.
오라버니들이 다친다거나, 진다거나 하는 나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 * *
“대공 전하. 황후가 사병을 소집했습니다. 돈으로 용병들을 대거 구했다고 합니다.”
리시언은 수하들로부터 그 보고를 전달받고 헛웃음을 지었다.
용병들의 양과 질, 모든 구성 성분들이 크게 위협이 되지 않아서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시정잡배들로 이루어진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무엇을 할 생각인지, 병정놀이라도 할 셈인가.
좀처럼 황후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 사실을 황실 기사단 소속인 세이튼 온리드라스가 몰랐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레스티아가 타고 있는 마차를 가로막고 경고했단 말이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레스티아에게 접근했는지 의아해졌다.
황후의 움직임을 핑계 삼아서 그녀와 말 한마디라도 더 섞어볼 요량이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다시 불쾌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레스티아를 제 연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음에도 그 거슬림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역시, 연인보다는 더 확실한 관계로 곁에 묶어두고 싶었다.
레스티아를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에 두고, 그 곁에 자신이 버티고 서 있어야만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었으나, 이것저것 거슬리는 일투성이다.
그렇다면 빨리 정리해야겠지.
리시언은 복잡할 것 없이 세이튼을 직접 대면해 황후의 의중을 파악하기로 했다.
협조하지 않는다면 고문을 해서라도 답을 얻어내고, 서둘러 황후와의 질긴 악연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황후의 거점이 있는 동부 귀족 세력들을 적으로 만들 수도 있는 해결 방법이었으나, 지금 리시언은 그런 것까지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어서 빨리 레스티아를 만나서 그 예쁜 목덜미에 또다시 입술을 파묻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목에 남겨둔 키스 마크.
누구에게 들켰을까.
레스티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리시언은 내심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자신이 남긴 키스 마크를 목격하기를 바랐다.
분명 화를 내며 달려오겠지.
너 따위가 막냇동생을 건드렸느냐며 말이다.
그럼, 몇 대 정도 맞아준 후에 성년이 된 레스티아는 이제 베르체스터 형제들의 품 안에만 둘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레스티아의 쇄골에 남아 있는 흔적들은 그녀가 나를 선택한 결과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더불어 다른 사내새끼들보다는 내가 나으니까 믿고 맡겨도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이지 않은가.
어떤 남자가 레스티아를 눈앞에 두고 거기서 멈출 수 있다고.
리시언은 나룻배 위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때 타지 않은 은쟁반 같은 눈동자와 진홍색 입술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도톰한 입술을 쓸어내렸던 엄지손가락에 남아 있는 레스티아의 숨결이 아직도 생생하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체구는 또 왜 그렇게 사랑스러운지.
그 모든 유혹을 참아 낼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리시언은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레스티아는 그 흔적들을 형제들에게 숨긴 모양이었다.
예전에는 편지 한 장에 질투가 나서 몰려오더니만 아직도 잠잠한 걸 보니 말이다.
뭐, 기회는 또 있을 테니까.
리시언은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잔뜩 비틀린 마음이었지만, 그 비틀린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리시언은 레스티아에게 미쳐 있었다.
그러니까 어서 빨리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세이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대공 전하, 송구합니다. 세이튼 부단장은 며칠째 황궁에 출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갑작스레 황실 기사단실로 찾아온 리시언에게 기사단장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세이튼의 부재를 알렸다.
리시언은 입매를 삐뚜름히 말아 올렸다.
“부단장이라는 자가 멋대로 자리를 비워? 근무 태만이 아닌가.”
그러자 기사단장은 곤란한 듯이 제법 근사하게 관리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흠흠. 그것이……. 며칠 전부터 연락이 닿지 않아서 저희도 곤란한 상황입니다. 절대 이럴 사람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가.”
리시언은 세이튼의 개인사 따위는 흥미 없다는 듯 곧바로 등을 돌렸다.
이곳에 없다면, 곧바로 다른 곳에서 행방을 알아볼 요량이었다.
그러자 기사단장이 다급하게 리시언을 불러 세웠다.
“대공 전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리시언은 대답 없이 기사 단장을 돌아봤다.
이제 노년에 접어든 기사 단장은 황제의 수족이었으나, 리시언 어머니의 검술 스승이라고도 했다.
어머니의 스승이었다고 하니, 귀찮아도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사단장은 리시언이 자신을 바라보자 조금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전하. 세이튼은 온리드라스 가문의 광검사라고 해도 상당히 믿음직한 녀석입니다. 허투루 검을 꺼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훗날 전하께서 황실 기사단의 주인이 되셔도 굽어살펴 주십시오. 저는 솔직하게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저 말고 황실 기사단 모두가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
세이튼이 황실 기사단장이 이렇게 칭찬할 정도로 괜찮은 인재였나 하는 정도의 감상이 전부였다.
리시언은 날카로운 시선을 매끄럽게 거두며 말했다.
“자네의 부탁이니 그 말은 고려해보도록 하지.”
기사단장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감사합니다.”
황실 기사 단장과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리시언은 곧바로 황궁 밖으로 나와 수도에 위치한 온리드라스 가문의 저택을 방문했다.
하지만 기사단장이 말했던 대로 세이튼은 그곳에 없었다. 게다가 그 누구도 세이튼의 마지막 행선지를 알지 못했다.
‘수상하군.’
리시언은 온리드라스 가문의 저택에서 나오며 생각에 잠겼다.
황후가 갑자기 모집한 오합지졸 용병.
사라진 세이튼.
혹시, 황후가 세이튼이 레스티아에게 정보를 흘린 것을 알게 되어 그를 제거한 것일까.
하지만 세이튼은 황후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력 패였다.
고작 그 정도의 정보를 흘렸다고 이렇게 쉽게 버릴 수는 없을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이지.’
리시언은 생각을 정리하며 다시 황궁으로 향했다.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라도 세이튼이 레스티아에게 황궁에 오지 말라고 했다면, 그 일은 분명 그곳에서 일어날 테니 말이다.
리시언이 말을 타고 황궁 앞에 있는 중앙 광장을 지날 때였다.
뎅-뎅-뎅-.
시계탑의 종소리가 정오를 알렸다.
“꺄아아악! 사람이 쓰러졌어요!”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비명을 내질렀다.
리시언은 기민하게 비명의 근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허름한 용병의 옷차림새를 갖춘 남자 하나가 광장 중앙에 시체처럼 쓰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야?”
“사람이 쓰러졌다고?”
곧바로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자의 몸에서 검은색 연기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으으으…….”
그러고는 언제 쓰러졌냐는 듯, 삐걱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간의 관절 구조로는 불가능한 모양새로 말이다.
“저, 저기요. 괜찮아요?”
구경꾼 중 하나가 물었다.
그러자 예의 남자는 기괴하게 턱을 툭 떨구고는 말했다.
“끄엑. 배고파.”
그와 동시에 질문을 건넨 구경꾼의 팔을 잡아 물어뜯었다.
“아아아악!”
물어뜯긴 피해자 역시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순식간에 똑같은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방이 아수라장이 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도망쳐!”
“구울이다! 구울이 나타났다!”
도망치는 이들이 소리쳤다.
구울.
묘지에 살며 시체의 몸으로 사람을 뜯어먹는 마물.
한낮에 구울이라.
그것도 용병 차림을 하고?
석연치 않았다.
리시언은 혼비백산으로 뛰어 도망치는 광장의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수가 불어난 구울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가차 없이 불 속성 마법을 사용해 모두에게 안식을 선사했다.
“그에엑. 배고파.”
구울들은 타들어 가면서도 그 말을 내뱉으며 꿈틀거렸다.
“…….”
배고프다라.
언젠가 공식 석상에서 마주쳤던 황태자가 흘렸던 말과 동일한 말을 내뱉는 구울들이 거슬렸다.
리시언은 곧바로 제 뒤편에 있는 수하들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이것들이 수도에 더 있는지 확인하고 없애버려.”
“예!”
이것들은 평범한 사람을 구울로 만드는 위험한 것들이었다.
수도에 퍼지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수하 하나가 기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맙소사! 대공 전하, 황궁 방향에서 이 구울들이 몰려나오고 있습니다!”
여태까지의 정황을 봤을 때, 이 구울들은 황후의 짓이라 보는 것이 유력했다.
“황궁으로 간다. 베르체스터 공작가에도 전서구를 넣도록 해.”
리시언은 수하들을 거느리고 곧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천국을 배경으로 그려진 지옥도가 있다면 이곳일까.
황궁의 성벽 앞까지 구울로 변한 이들이 설탕에 꼬인 개미 떼같이 바글바글 몰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