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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89화 (89/132)

89화

레스티아가 일과를 마치고 베르체스터 저택으로 돌아오자, 도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곁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목욕물을 준비해두었습니다. 그럼 바로 탈의하는 것을 도와 드릴게요.”

평소와 다름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 쳤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

“네?”

도라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레스티아는 그제야 자기가 평소와 다르게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거절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래서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게……. 배가 너무 고파서요. 도라, 오늘은 목욕 시중을 들지 않아도 좋아요. 대신 저녁 식사를 빨리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주겠어요?”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도라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따라 레스티아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레스티아의 지시대로 욕실에서 드레스 끈만 풀어 주고는 밖으로 물러났다.

“휴-.”

도라가 사라지자 레스티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섰다.

새하얀 쇄골 아래에는 리시언이 남긴 울긋불긋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게 리시언 님이 말한 키스 마크구나.’

흔적을 확인하고 보니 얼굴이 저절로 붉어졌다.

리시언은 멋대로 이런 것을 레스티아의 쇄골에 남겨 두고는.

‘키스 마크를 남겼어. 누가 무어라 하면 내가 남긴 거라고 말해도 좋아.’

라고 말했다.

“……진짜 나빴어.”

누구한테 말하라는 건지.

이런 건 숨겨야 하는 것 같은데.

레스티아는 도라의 목욕 시중을 거절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키스 마크는 차마 어려서부터 레스티아의 시중을 들어줬던 도라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것이었다.

분명 왜 이런 것이 생겼느냐 물어 올 테고, 레스티아는 리시언과 있었던 일에 대해 털어놓아야 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부끄러웠다.

‘리시언 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신 거야.’

짓궂어.

레스티아는 볼멘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으며 서둘러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

막연하게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그면 리시언에 대한 생각이 없어질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외려 더 생생하게 오늘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아직도 목덜미에서 리시언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나룻배 위에서 리시언은 몇 번이고 레스티아의 피부 위로 입술을 겹쳐왔다.

너를 원한다며 쉴 새 없이 달콤한 고백의 말들을 내뱉었다.

리시언은 레스티아를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내고자 했다.

그 일련의 경험은 뭐랄까.

한 마디로, 잡아먹히는 기분이었다.

‘리시언 님. 변했어…….’

확실히 리시언은 변했다.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관망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집요하다 못해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욕심이 많다고 했던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그가 어린 시절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며 날렸다는 풍등은 아무래도 바다의 신에게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변화가 싫냐 묻는다면 아니었다.

그 덕분에 레스티아가 리시언의 연인이 될 수 있었으니까.

‘연인.’

그 단어를 떠올리자 레스티아의 얼굴이 또다시 새빨갛게 변했다.

자신이 리시언의 연인이 되었다니.

몽롱한 기분이었다.

아니, 몽롱하다기보다는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라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 예쁜 황금색 눈동자에 서린 낯선 정염이 오싹하도록 좋아서, 연인이 되어달라는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너무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

리시언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정신없이 휘말렸다.

그래서 나도 당신만큼이나 당신을 원해왔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나도 다음에는 제대로 말해야지.’

레스티아는 속으로 굳게 결심했다.

리시언과 함께할 다음 만남이 기대됐다.

‘……그런데, 리시언 님은 다음에 뭘 한다는 걸까?’

갑작스레 입맞춤을 멈추더니만, 가장 맛있는 것은 나중에 먹겠다 말했다.

레스티아는 그 말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 이상을 더는 추리해 낼 수 없었다.

4년간 안개 섬에서 진실의 계승자들과 함께했던 생활은 무척이나 금욕적인 학자의 삶이었기 때문에 마법과 학문 외의 일에는 무지하기만 했다.

그래서 목에 남겨진 키스 마크는 가려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은 레스티아와 리시언 둘만의 일이니까 말이다.

첨벙.

레스티아는 욕조 속으로 몸을 푹 담갔다가 뺐다.

‘안 되겠어. 자꾸 리시언 님을 생각하게 돼. 어서 자야지.’

그러고는 평소보다 빨리 욕조 밖으로 나왔다.

몸에 물기를 닦아 내고는 제일 먼저 옷장에서 스카프를 꺼내 목에 둘렀다.

‘키스 마크가 사라질 때까지만 하고 다녀야지.’

연분홍색 스카프는 레스티아의 새하얀 머리카락에 꽤 잘 어울리는 것이었기에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그 스카프의 정체에 관심을 가질 줄이야.

“레스티아. 최근 들어서 왜 실내에서 스카프를 매고 있는 거니?”

조엘이 아침 식사 자리에서 레스티아를 마주하자마자 질문해왔다.

“그러고 보니, 안 하던 짓을 하는구나.”

제라르 역시 예리하게 지적해 왔으며.

“그러게 리티. 왜 그래? 목감기라도 걸린 거야? 날씨도 따뜻한데……. 아! 감기가 아닐 수도 있어. 당장 의원을 부르자!”

마티어스는 당장이라도 의원에게 달려가자며 난리를 피웠다.

“걱정 마세요! 아픈 게 아니에요! ……오라버니들. 그게요. 이건요.”

레스티아는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 딱딱하게 굳어선 말을 버벅댔다.

친언니처럼 생각해왔던 도라에게도 못 한 말을 오라버니들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시선을 피해가며 겨우 말했다.

“그, 그냥 스카프가 예뻐서 했을 뿐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동시에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레스티아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이 변화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분명, 이 변화는 레스티아가 리시언을 만나러 황궁에 출입한 이후에 발생한 것이니 말이다.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와다다 쏟아냈다.

“스카프가 예뻐서 했을 뿐이라고……? 정말이니 레스티아? 너는 평소에 장신구도 즐겨 착용하지 않잖아.”

“그러고 보니, 그 스카프. 리시언을 마지막으로 만나고 온 이후로 줄곧 하고 있구나.”

“뭐야? 리티. 그 스카프 리시언이 준 거야?”

레스티아는 목에 맨 스카프를 손으로 꼭 잡아 쥐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이 스카프는 리시언 님께 선물 받은 게 아니에요.”

스카프 안에 가려져 있는 키스 마크는 리시언이 남긴 것이 맞지만 말이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레스티아의 변명에도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여전히 못 미더운 기색이 역력했다.

‘어쩌지.’

레스티아는 고민에 빠졌다.

리시언과 자신이 연인이 되었다는 말을 오라버니들에게 털어놓아야 할까.

하지만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 명의 오라버니들도 자신들의 연애사에 대한 이야기를 레스티아에게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레스티아가 고민하고 있을 때, 조엘이 먼저 말을 꺼냈다.

“레스티아. 아무래도 너에게 조언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조언이요?”

조엘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레스티아에게 고정한 채 상당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남자는 다 늑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해 둘 필요가 있겠어.”

“네? 늑대요?”

“그래, 늑대. 호시탐탐 여자를 노린단다. 그건 리시언도 마찬가지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다고 해도 위험해. 그러니까……. 너를 조금이라도 만지려고 하거든 주먹에 힘을 주고 힘껏 뺨을 갈기렴.”

조엘은 그렇게 말하며 천사처럼 웃었다.

“맞아. 리티. 선물 같은 것도 받지 마. 말만 해. 이 오라버니가 다 사 줄 테니까. 알았지? 혹시라도 리시언이 억지로 선물을 하면 전부 태워버려.”

마티어스 역시 조엘 못지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레스티아의 눈을 바라보며 신신당부했다.

제라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의 말에 동의했고 말이다.

레스티아는 곤란해졌다.

오라버니들의 조언대로 주먹으로 리시언의 뺨을 때리고, 선물을 태우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질문했다.

“말도 안 돼요! 오라버니들도 오라버니들의 연인에게 그런 짓을 당하셨나요?”

“…….”

“…….”

“…….”

순식간에 식탁에 침묵이 감돌았다.

레스티아는 아차 싶었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베르체스터 형제들에게 리시언이 자신의 연인이라고 고백해버린 모양새가 된 것이다.

“연인이라. 그게 무슨 말이지?”

“리티,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데.”

“레스티아. 리시언과 어떤 일이 있었던 거니?”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나긋한 목소리로 레스티아에게 질문을 건네 왔다.

하지만 살벌한 분위기는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레스티아는 곤란해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밝히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리시언에게 살기를 드러내던 오라버니들 아니던가.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레스티아는 침묵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묻지 마세요.”

하지만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집요했다.

“레스티아. 그래, 너는 이제 연인이 생겨도 아무것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지. 그러니까 자세히 말해 보렴.”

“맞아. 리티. 이 오라버니들에게 자세히 말해 봐.”

어떻게 하지.

초조하기만 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 맞춰, 집사 헤일록이 제라르에게로 달려왔다.

“공작님! 황궁에서 급히 전서구가 왔습니다.”

제라르는 푸른 눈동자를 레스티아에게 고정하고 있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급한 용무인가. 지금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웬만하면 식사가 끝난 후에 알고 싶다만.”

“예. 아무래도 지금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라르는 이를 으득 갈고는 집사가 건넨 전서구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스티아. 그 이야기는 아무래도 나중에 해야겠군. 조엘, 마티어스. 황궁으로 가야겠다. 지금 당장.”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레스티아는 세이튼이 일전에 경고했던 일이 지금 발생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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