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벌써 두 번째다.
오늘 리시언이 레스티아에게 부탁의 말을 건넨 횟수 말이다.
첫 번째 부탁은 마력 분석을 위해서 다시 한번 손을 잡아 달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 부탁은 이렇게 품에 안겨 있어 달라는 것이었다.
모든 부탁이 스킨쉽이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레스티아의 심장이 또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리시언 님…….”
너른 품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맞닿은 체온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졌다.
왜 줄곧 잔잔했던 호수가 파도처럼 일렁거렸을까.
날씨도 이렇게 화창한데.
생각해보면 알기 쉬운 일이었다.
리시언이 호숫가의 물을 움직인 것이다. 그는 제라르처럼 물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리시언이 굳이 왜?
감정의 동요라도 있었던 것일까.
속성 마법은 감정에 반응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왜?
‘혹시, 리시언 님은 나랑 계속 여기에 같이 있고 싶은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레스티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상해. 나, 자꾸만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는걸.’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레스티아는 자신이 해낸 추리들이 모두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멋대로 기대했다가, 부정당했을 때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레스티아에게 리시언은 항상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존재였다.
다가가면 다가가려고 할수록 멀어지고, 노력해도 붙잡아 둘 수 없는 존재.
그저 곁에 있기만을 바랐던 작은 소망조차 이룰 수 없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랬던 리시언이 이런 식으로 먼저 다가오고 있었다.
먼저 손을 잡기를 요구하고, 이렇게 포옹을 한 채로 놓아주지 않았다.
낯설었지만, 그만큼 설렜다.
하지만 설레는 만큼, 이 순간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까 두려웠다.
‘그래. 나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잘못했다가 더 멀어지는 건 싫은걸.’
그래서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꼼지락 비틀었다.
“……알겠어요. 하지만 우리 조금 떨어져 있는 게 좋겠어요.”
그러나 리시언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싫어.”
라고 못 박고는 레스티아를 더 꼭 끌어안았다.
결국 레스티아의 몸은 리시언의 품 안으로 더 깊게 잠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탁하듯이 말했으면서, 잡아둔 이상 놓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품을 벗어나려고 했다는 것에 조금 심술이 난 듯했다.
“서운한걸. 예전에는 내 품에 몇 번이나 안겨놓고.”
레스티아는 말문이 막혔다.
어린 시절, 레스티아를 몇 번이나 멋대로 품 안에 안아 들었던 건 리시언이었다.
사실, 제라르를 제외한 베르체스터 형제들 모두가 그랬다.
그래도 조엘과 마티어스는 내려 달라고 부탁하면 내려주었다.
그러나 리시언은 부탁해도 놓아주지 않았었다.
게다가 그 당시에 두 사람은 어렸다.
하지만 지금은 성년제까지 치른 어른이지 않은가.
그래서 레스티아는 지금 리시언의 품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체향을 감당하기조차 어려웠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낯선 향기가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히고 있었다.
레스티아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는 항의하듯 볼을 부풀렸다.
“리시언 님. 지금은 어렸을 때랑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그러자 리시언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답지 않게 풀이 죽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아, 그렇지. 너는 이제 내가 베르체스터가 아니라 싫은 건가?”
그 목소리가 신경 쓰여서, 레스티아는 고개를 들어 리시언을 올려다봤다.
“그게 무슨……! 이제 오라버니들과도 이렇게 안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리시언은 예상과 다르게 잘생긴 입가에 기쁜 듯, 환한 미소를 걸고 있었다.
“그래. 베르체스터들과는 이렇게 안 지내겠지. 그건 마음에 드는 대답이야.”
“…….”
“그러니까. 너와 이렇게 지내는 건 내가 유일해. 그렇지?”
끄덕끄덕.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에 차서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손.
유도 심문 하듯 파고들어 오는 질문들.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내가 착각했던 게 아니야. 리시언 님은…… 나를 좋아해.’
추측이 확신이 돼 갈수록 레스티아의 심장이 더 크게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마침내 리시언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이런 건 나랑만 해. 나는 너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으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렁거리던 호숫가가 순식간에 잔잔해졌다.
살랑살랑 불어왔던 바람조차 멎었다.
사방이 오로지 두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그러자 리시언은 레스티아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제 의사를 더 정확하게 전달했다.
“너를 원해. 내 연인이 되어줘.”
적막감을 깨고 들려온 목소리가 착각조차 하지 못하게끔 또렷하고 달콤하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그대로 마주한 서로를 눈에 담았다.
익숙했지만, 그 익숙함이 무색하리만큼 이 순간은 특별했다.
“……제가.”
레스티아는 머릿속까지 울리기 시작한 심장 박동을 통제하지 못한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쩐지 현기증이 나는 것만 같았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리시언의 눈가가 깊어졌다.
“혹시, 내가 두려워? 너, 몸이 떨리고 있어. 싫다면…… 놓아줄게.”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리시언의 손등 역시 지금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진짜로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레스티아에게도, 리시언에게도 지금 이 순간은 긴장되는 순간임이 분명했다.
“……두렵지, 않아요.”
마침내 레스티아가 간신히 입술을 뗐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고백했다.
“리시언 님은 이미 제게 특별한 사람인걸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랬어요.”
그래, 줄곧 그랬다.
리시언이 레스티아를 폭력배들로부터 구해줬을 때도.
스스로 가족을 선택하라고 말했을 때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도 좋다고 말해주었을 때도.
그 모든 순간은 너무나도 특별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았다.
리시언이 레스티아의 곁을 떠났을 때조차도 말이다.
하지만 리시언은 이제 황위 계승권자였다.
레스티아는 자신이 그런 대단한 사람의 연인이 되어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공녀라고 해도, 리시언의 곁에 있으면 한참이나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키시어스 대공 같은 대단한 분 곁에 있어도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자 리시언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무슨 소리지? 나는 네가 없었다면 욕심도 용기도 가지지 못했어. 애초에 네가 나를 살리지 않았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다고.”
베르체스터 공작가를 벗어난 이후, 리시언이 걸어온 모든 발자취는 레스티아를 향해 있었다.
레스티아가 안전하기를 바라서.
레스티아가 행복하기를 바라서.
그래서 움직였던 결과가 좋게 풀린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네가 부담스럽다면, 나는 내가 가진 건 전부 버릴 거야.”
주저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레스티아의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말도 안 돼요!”
리시언이 지금의 자리를 어떻게 얻었는지는 오라버니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고되고, 힘들게 자신을 증명해낸 리시언이 레스티아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부하듯 소리쳤다.
“절대로 버리지 마세요! 그건 전부 리시언 님의 것이에요.”
그 외침에 리시언은 눈매를 곱게 휘며 속삭였다.
“그럼, 전부 가지게 해줘.”
너까지.
말했잖아.
나는 지독한 욕심쟁이라고.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고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어렵지 않아. 고개만 끄덕이면 돼. 해봐.”
“읏…….”
이 남자는 강요에 가까운 말을 하면서도, 되려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다.
“너도 내가 특별하다며. 거짓말이었어?”
“거짓말이, 아니에요.”
레스티아는 결국 리시언이 시키는 대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잘했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리시언은 빙그레 웃고는 레스티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앗…….”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과 말캉한 입술이 확 와 닿았다.
애써 무시하고 있던 리시언의 체향도 더 깊게 온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리, 리시언 님. 잠깐만요.”
레스티아는 당황해서 움찔거렸다.
하지만 나룻배와 리시언은 조금의 흔들림 없이 견고하기만 했다.
“미안. 그동안 너무 많이 참았어. 인내심이 바닥이야.”
목덜미에 닿았던 리시언의 입술이 천천히 귓가로 옮겨갔다.
“허락했으니까. 이제. 넌, 내 거야. 레스티아 베르체스터.”
그 말을 끝으로 리시언은 소유욕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레스티아의 목덜미와 눈가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잠깐만 안고 있으면 된다더니.
거짓말을 한 건 리시언이었다.
그래놓고 반대로 레스티아가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하다니, 정말이지 나쁜 남자였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조금도 거부할 수 없었다.
느릿하게 맞닿았다 떨어져 나가는 입술에서 리시언의 마음이 느껴졌다.
너를 원해.
나를 거부하지 마.
라고 말하는 간절한 마음.
그 마음은 레스티아 역시 리시언에게 오래도록 품고 있었던 것과 동일했기에, 결국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품에서 벗어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호수 한가운데 있으니, 리시언이 허락하지 않으면 뭍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말이다.
애초에 이럴 작정으로 여기에 데려온 것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입에서 저절로 원망의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리시언 님은, 정말 나쁜 남자예요.”
“……내가 나빠?”
리시언은 그제야 은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조금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달뜬 표정은 귀여웠고, 물기가 촉촉하게 맺혀있는 은회색 눈동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원래대로라면 이대로 입술을 훔칠 생각이었는데.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에게는 조금 과했던 걸까.
그렇다면…….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눈꺼풀에 닿았던 입술을 떼어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아쉬운 듯 레스티아의 입술을 쓸어내렸다.
“알았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
리시언은 마지막으로 레스티아의 둥그런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는 말했다.
“어차피 난 가장 맛있는 건 나중에 먹는 걸 좋아하니까.”
아무래도 첫 키스는 이 새하얀 머리카락에 잘 어울리는 티아라를 얹어준 이후로 남겨둬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노려왔던 사냥감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맹수의 새로운 목표였다.
“네?”
하지만 레스티아는 그 말에 숨겨진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