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리시언은 아주 오랜만에 편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악몽이 사라졌다거나, 피로감이 완벽하게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스티아가 남겨주고 떠난 따스한 온기가 손가락 마디마디와 품 안에 오래도록 남아서 잔뜩 예민해져 있던 신경을 조금이나마 무디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을 뜨고 보니, 마음 한구석이 헛헛했다.
“……갈증 나.”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레스티아의 온기를 한번 알게 된 몸뚱어리가 미친 듯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데리고 와서 손을 잡고, 품 안에 가두고, 오래도록 놓아주지 말라고 비명을 질러대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절제가 안 되는지.
레스티아에게 일주일에 세 번만 오면 된다고 미리 말해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또 레스티아를 만나면 실수를 저질러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세이튼이 레스티아가 타고 가던 마차의 앞을 가로막았다는 보고를 받고도 부러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라 들었다.
아주 사소한 해프닝인데, 그것 때문에 달려갔다가는 레스티아가 자신을 어떻게 보게 될지 신경 쓰였기에 참았다.
‘그래도 거슬려.’
세이튼 온리드라스.
그자를 생각하자 리시언의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세이튼에게 딱히 유감은 없었다.
리시언의 부모님을 해한 것은 그의 숙부였고, 이미 아버지가 목숨으로 그 대가를 받았으니까 말이다.
세이튼 또한 그의 숙부처럼 황후의 명령을 받아 움직였다.
하지만 숙부와는 다르게 황궁 기사단 소속이었고 정체성을 그곳에 집중하고자 하는 듯했다.
광검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면서도 황실 소속의 기사로 살고 싶어 하는 별종.
그게 세이튼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보통 온리드라스 가문에서 태어난 이들은 마음껏 검을 휘두르기 위해 마수가 득실거리는 전방으로 떠나는데 말이다.
하지만 세이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리시언과 검을 겨룬 이후, 리시언에게 깍듯이 황족의 예를 갖추고 있었다.
리시언은 과거 언젠가 세이튼과 마주했을 때를 떠올렸다.
-검을 겨루겠나.
라고 묻자.
올곧은 목소리로 거절 의사를 전해왔다.
-황실 기사단인 제가 어떻게 감히 대공 전하를 향해 검을 들겠습니까.
지나치도록 재미없게 신념이 강한 자였다.
그날 이후, 리시언은 세이튼의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성년제에서 레스티아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 것이 거슬렸을 뿐이다.
사랑도 광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세이튼이 레스티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광기에 휩싸일까 봐 짜증이 났다.
실제로 그의 숙부도 리시언의 어머니에게 반해서 광적으로 집착을 했다고 했으니까.
‘우습군.’
정작 레스티아를 보고 광기에 휩싸여 있는 건 세이튼보다 자신이었다.
성년제 이후, 세이튼이 레스티아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 또한 몽땅 막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접근했단 거지.’
하여간 거슬리는 놈.
만약 세이튼이 레스티아와 조금이라도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면 지금처럼 얌전히 놔주지 않았을 것이다.
리시언은 침대에서 일어나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조금이라도 머리를 식히고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곧바로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업무를 처리하는 동안에도 레스티아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제 손에 잡혀 있던 희고 부드러운 손이 떠올랐다.
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젤라 글라리엔이 선물했다는 우정 반지라는 것을 나도 선물할까.
은근슬쩍 건네주면, 레스티아는 기뻐하며 받아서 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시언은 그 생각을 단념했다.
우정 반지라니.
마음에 차지 않는 명칭이었다.
“……미치겠군.”
리시언은 마른세수를 했다.
생각을 떨치려고 했으나, 도저히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이런 상태여야 하는 건가.
괴롭고, 기쁘고, 복잡한 기분이었다.
“대공 전하.”
그런데 시종이 다가와 뜻밖의 말을 전했다.
“베르체스터 영애가 방문하셨습니다.”
“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업무 중이시니 돌려보내도록 할까요?”
“……아니.”
하여간 레스티아는 매번 이런 식이다.
기껏 피해주려고 하면 다가온다.
겁도 없이.
그러나 리시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먹잇감을 거절하는 맹수는 없으니까.
* * *
레스티아는 어제처럼 응접실에 앉아 리시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이튼과 나눈 대화를 리시언에게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리시언은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왜 왔느냐 물었다.
“내가 일주일에 세 번만 오면 된다고 했을 텐데.”
그 어투가 장난치는 것 같기도 하고, 진심으로 귀찮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굴하지 않고 어제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심각한 이야기를 전하러 온 만큼, 리시언의 태도에 토라질 여유가 없었다.
“갑작스레 방문해서 죄송해요. 어제 세이튼 님을 만났어요. 그런데 신경 쓰이는 말을 들어서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세이튼을?”
“네. 황궁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저보고 당분간 오지 말라고 했어요.”
“음…….”
리시언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모르는 척했다.
레스티아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표정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레스티아는 더욱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무언가 일이 생기려는 건 아닐까요? 리시언 님도 조심하세요.”
가득이나 예쁜데, 왜 이렇게 예쁜 말만 하는지.
하지만 리시언은 내색하지 않은 채, 레스티아의 곁으로 다가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래.”
어차피 황후가 무언가 일을 벌일 것이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언제 일을 벌일지가 아직 확실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날짜가 정해진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기껏 레스티아를 매주 세 번씩 만날 기회가 생겼을 때 말이다.
리시언은 짜증이 났지만.
“정말로, 꼭 조심하셔야 해요.”
간절한 목소리로 당부의 말을 전하는 레스티아 앞에서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알았어. 걱정 마.”
그리고 아쉬운 말을 꺼내 들었다.
“그렇다면 너도 당분간 황궁으로 오지 말도록 해.”
최대한 레스티아를 배려한 말이었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레스티아를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대신, 어제 했던 거 또 해주고 가.”
“네? 어제 했던 거요?”
레스티아의 커다란 눈동자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네 말대로 효과가 좋았거든, 그거. 마력 분석이라고 했나?”
효과라니.
레스티아는 어리둥절했다.
어제 했던 것은 그냥 마력을 분석하는 일이었다.
상반되는 마력을 찾아내서 마석으로 만들지 않으면 효과가 없을 텐데.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또 해 주면 안 돼? 당분간 못 보는데 말이야.”
이렇게 부탁하는 리시언의 모습은 처음이라, 레스티아는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어제보다 훨씬 나아 보였고 말이다.
“알겠어요.”
하지만 어제처럼 단둘이 응접실에서 손을 잡을 생각을 하니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또 마력에 감화돼서 엉엉 울고, 리시언의 품에 안길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리시언이 내민 손을 잡지 않고 말했다.
“대신, 여기서는 안 할래요.”
“……그럼, 어디서 해?”
리시언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물었다.
“응접실 밖에서 해요!”
“밖에서?”
“네!”
“왜, 밖에서 해야 해?”
리시언의 입가에 남모를 미소가 감돌았다.
이제야 남자와 단둘이 방에 있으면 위험하다는 걸 알아차린 걸까.
레스티아가 리시언이 다른 베르체스터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다면, 리시언으로서는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레스티아는 그 사실을 리시언에게 말하기 싫은 듯 에둘렀다.
“그, 그냥. 방 안이 답답해서요!”
“그래.”
네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리시언은 빙그레 웃으며 레스티아를 궁전 정원에 있는 호숫가로 안내했다.
“와……. 이런 곳이 있었군요.”
자그마한 호수는 고요했고, 뱃놀이용 나룻배 한 척이 유유자적 떠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나룻배는 새로 만든 것이라, 이끼도 끼어있지 않았다.
“여기라면 괜찮아?”
리시언의 질문에 레스티아는 주변을 둘러봤다.
응접실보다는 훨씬 개방되어 있었기에 마음이 놓였다.
“네. 좋아요!”
“그럼, 이리로 와.”
리시언이 레스티아를 나룻배 위로 이끌었다.
“어? 나룻배를 타나요?”
“그래. 딱히 앉을 곳이 없으니까. 싫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밖이면 됐어요.”
벌써 한 번 거절했는데, 또 거절하기는 미안했다.
그래서 레스티아는 리시언이 이끄는 대로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리시언은 노를 저어 호수의 가운데로 나아갔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그러기를 잠시, 나룻배가 멈추었다.
“그럼, 이쯤에서 할까.”
리시언이 레스티아의 앞으로 다시 손을 내밀었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는 태도는 능숙해 보였고, 황금빛 눈동자는 거절할 수 없는 매력을 발했다.
레스티아의 볼이 붉어졌다.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 보고 손을 잡아야 한다니.
이래서는 방 안이나, 밖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나?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레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리시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애써 집중을 하며 주문을 읊었다.
그 모습을 리시언은 또 한참이고 바라봤다.
바람이 불어 레스티아의 머리카락 위로 나뭇잎이 내려앉았다.
리시언은 어제 결심했던 것처럼, 남겨두었던 손으로 그것을 떼어냈다.
그러자 새하얀 머리카락이 손끝에 휘감겼다.
그 감각이 참 좋아서, 리시언은 슬며시 레스티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잠시 후, 레스티아가 주문을 모두 외우고 눈을 떴다.
어제와 다르게 조금도 울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늘은 안 우네?”
그 말에 레스티아가 통통하게 볼을 부풀렸다.
“놀리지 마세요. 어제는 갑작스러워서 그랬던 거였으니까요.”
“흠.”
리시언은 못마땅한 듯 턱을 쓸어내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한참이나 부족한데.
어제처럼 울면서 내 품에 안겨야 하는데.
이제 또 한동안 못 볼 수도 있는데.
지독한 갈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리시언의 속마음을 모르는 레스티아는 매정하게도 리시언의 손을 놓으려고 했다.
“그럼 이제 뭍으로 가요.”
그 말을 끝으로 배가 호숫가의 거센 물살에 일렁였다.
“앗!”
결국 레스티아는 넘어지듯 리시언의 품에 폭 안기고 말았다.
“죄, 죄송해요. 중심을 잘못 잡았어요.”
레스티아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리시언은 레스티아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간절하고 애달픈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이러고 있자.”
“……네?”
“아주 잠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