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은회색 눈동자와 황금빛 눈동자가 한 뼘 거리에서 맞부딪혔다.
그 찰나의 순간.
레스티아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만 같았다.
왜일까.
리시언이 이렇게 자신의 말을 잘 따라 주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인데…….
꽉 붙들린 손과 마주하는 눈빛이 온몸의 혈관을 팽팽하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그 탓에 감각이 예민해졌는지, 리시언의 숨소리와 체온이 너무나 가까이에서 느껴져서 괜히 신경 쓰였다.
“……왜 대답이 없어?”
그 와중에 리시언이 되물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와 변함없는 태도로.
마치 지금 이 상황에 동요하고 있는 사람은 레스티아뿐인 것처럼 말이다.
레스티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 리시언 님은 그냥 내 부탁을 잘 들어주시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야.’
이렇게 손을 꽉 잡는 것도, 분명 별 의도는 없을 거야.
레스티아는 짧게 호흡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그, 그냥. 이대로 있으시면 돼요. 제가 주문을 모두 외울 때까지요.”
“그래?”
시키는 대로 할게.
리시언은 빙그레 웃으며 레스티아를 빤히 바라봤다.
역시, 화가 난 표정보다는 이렇게 웃는 표정이 더 보기 좋았다.
자주 웃어 주면 좋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레스티아는 아차 싶어서 재빨리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은 집중해야 할 때였다.
리시언의 피로한 모습을 없애 주기 위해 이렇게 불러 세운 것이었으니까.
‘집중하자, 집중!’
혹시나 해서 마법의 부작용 때문이냐 물었을 뿐인데, 리시언의 반응을 보니 그것이 맞는 모양이었다.
리시언에 대한 소문은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마법 실험으로 만들어진 괴물의 아들이라 들었다.
그래서 모든 속성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했었지.
‘리시언 님은 괴물 같은 게 아닌데.’
비록 나쁜 남자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 시작할게요.”
레스티아는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마력을 분석하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내심 궁금했다.
리시언의 마력은 어떤 느낌일까.
어렸을 때는 리시언의 마력이 베르체스터와 다른 느낌이라고 어렴풋이 느끼는 것이 전부였다.
‘속성 마법을 사용하시니까. 오라버니들과 비슷할까?’
베르체스터의 마력은 햇빛이 쨍쨍한 숲속을 걷는 느낌을 주는 마력이었다.
‘아니면 다른 마법사 가문처럼, 고유의 느낌이 있을까.’
글라리엔의 마력은 달콤한 솜사탕 같았고, 록베스트는 거대한 천칭 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었다.
온리드라스는 굳이 분석하지 않아도 온몸이 저려올 정도의 광기가 느껴졌고, 말이다.
‘리시언 님을 알고 싶어.’
레스티아의 의도대로 곧바로 황금빛 마법진이 펼쳐졌다.
그렇게 레스티아는 자신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
리시언은 여전히 레스티아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이제는 마도서 없이도 능숙하게 마법을 쓰게 된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레스티아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으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너는 알까.
너의 성장은 매번 놀랍고, 매번 대단해.
그런데 왜 이렇게 남녀 관계에는 무지한지.
이렇게 남자와 단둘이 방 안에 있는데, 함께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손을 붙잡은 채로 눈을 감아 버리면…….
정말 어쩌자는 건지.
‘나를 너무 믿는 건가. 아니면, 혹시 너는 아직도 나를 다른 베르체스터들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하지만 그 좋지 않은 기분도 금세 잊혔다.
황금빛 빛무리에 둘러싸여 주문을 외우고 있는 레스티아는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모든 생각을 말끔히 지워 버렸으니까.
“…….”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속눈썹과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에 담았다.
지금, 이 순간 레스티아가 눈을 감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바보같이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문득 레스티아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손은 그냥 잡지 말고 있을 걸 그랬나.
그랬다면 흐트러진 머리카락 정도는 넘겨줄 수도 있었을 텐데.
레스티아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으니, 붙잡은 손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애석하기만 했다.
그래서 만약 다음에도 이렇게 손을 잡아야 할 일이 있다면, 한쪽 손은 남겨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서,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주변에서 마법진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리시언 님…….”
레스티아가 리시언을 불렀다.
“레스티아?”
그런데 은회색 눈동자에 구슬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왜, 울어?”
리시언은 화들짝 놀라 레스티아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양손으로 레스티아의 얼굴을 감싸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레스티아가 리시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하고 자그마한 여체가 품속에 불쑥 안겨 오자 리시언은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너. 대체 무슨?”
너무나도 무방비한 레스티아의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손을 잡는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안기기까지 하다니.
정말로 자신을 베르체스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단단하게 주의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밀쳐 낼 수 없었다.
레스티아는 서러운 듯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네.”
리시언은 결국, 두 팔을 뻗어 레스티아의 포옹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등을 가볍게 도닥여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레스티아는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죄송해요. 리시언 님의 마력은 너무 고독하고 혼란해요. 그래서 지독하도록 슬픈 기분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
“글라리엔과 비슷하지만 완전 달라요. 지독한 악몽을 꾸고 계시지는 않나요? 그래서 못 주무시는 건가요?”
마력을 분석하게 했을 뿐인데, 모든 것을 간파당한 기분이었다.
“계속 이런 상태셨어요? 이걸, 어떻게 혼자 견뎠어요?”
“…….”
이럴 줄 알았으면, 허락하지 말걸.
“미안. 너를 울릴 생각은 없었는데.”
마력 분석 정도야 괜찮겠지, 하고는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역시,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리시언이 손을 뻗어 레스티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그렇게 울어 놓고도 더욱 용감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요. 전혀, 힘들지 않아요!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리시언 님에게 맞는 마력 중화석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너.”
“그러니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네?”
아직도 눈가가 새빨갛게 돼서는.
이렇게나 타인을 위하다니.
리시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넌 항상 내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
그 말을 동의의 뜻으로 해석한 레스티아는 밝게 웃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리시언님.”
고마워해야 하는 건 네가 아닌데.
리시언은 여전히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레스티아를 슬그머니 움켜잡았다.
레스티아의 말대로 그 지독한 악몽과 불면증이 마력이 가지고 있는 고독한 성질 때문이라면.
지금 이렇게 레스티아가 제 품에 남겨준 온기만으로도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뜻밖에도 큰 선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 * *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에스코트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어느새 하늘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저, 얼굴 아직도 빨간가요?”
“아니. 괜찮아. 많이 나아졌어. 이제는 돌려보내도 좋을 만큼이야.”
레스티아가 울었다는 것을 알면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자신을 죽이러 찾아올 것이었다.
그렇다면 상대해줘야지.
리시언은 빙그레 웃었다.
“그럼 다음을 기약하지. 베르체스터 영애.”
그러고는 레스티아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는 것으로 배웅을 끝냈다.
“어…….”
레스티아는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런 스킨쉽은 성인들 사이에 흔한 것이었다.
하지만 레스티아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스킨쉽.
‘미쳤어!’
레스티아는 마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오늘 자신이 저지른 짓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리시언과 단둘이 방안에서 손도 잡고, 포옹도 했다.
눈가를 닦아주는 리시언의 거칠고 커다란 손이 아직도 볼 위에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손을 잡는 건 그렇다고 쳐도 포옹이라니.
리시언의 탄탄한 품 안이 너무 믿음직해서 더 마음껏 울었던 것 같다.
‘미쳤나 봐, 나!’
아무리 마력에 감화되어 그랬다고 해도 그렇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해서는 안 될 일들이었다.
‘리시언 님은 남자인데.’
그런데 생각해 보면, 리시언은 너무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래. 리시언 님은 내가 여자로 안 보여서 그랬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속이 상하는 것 같았다.
‘내가 리시언 님께 뭐라고. 자꾸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레스티아는 애써 생각을 지웠다.
그런데 갑자기 달리던 마차가 멈추어 섰다.
바깥이 소란스러운 느낌이었다.
레스티아는 기시감에 마차의 차창 밖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세이튼이 서 있었다.
리시언의 수하들과 말로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 사람이 왜…….’
레스티아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지요? 세이튼 님께서는 매번 제가 타고 있는 마차의 앞을 가로막으시는군요.”
레스티아를 발견한 세이튼은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베르체스터 영애.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베르체스터 영애와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말입니다.”
“네? 저랑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요?”
“예. 저택으로 몇 번 연락을 취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레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편물은 늘 레스티아가 확인하는데, 한 번도 세이튼에게서 우편물이 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분명히 말하지만, 이제 전처럼 세이튼 님을 따라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에 세이튼의 얼굴에 민망함이 서렸다.
“……그때처럼 모시러 온 것이 아닙니다. 당분간은 황궁에 가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왔을 뿐입니다.”
레스티아의 눈이 커졌다.
“네? 왜죠?”
“자세한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세이튼의 목소리에는 불안감과 걱정이 여려 있었다.
황후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분명 황후와 관련된 무슨 일이 생길 것임이 분명했다.
“세이튼 님. 제게 왜 이런 것을 알려 주시는 거죠?”
레스티아의 질문에 세이튼은 고개를 푹 숙였다.
“기사도를 지키지 못한 지난 일에 대한 사죄입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세이튼은 그 말을 끝으로 깔끔하게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