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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81화 (81/132)

81화

레스티아는 성년제가 끝난 다음 날 곧바로 록베스트 백작가의 저택을 방문했다.

카트리나로부터 줄곧 연락이 없는 것도 걱정되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아카데미 교수직도 그만두고 결혼을 준비 중이라는 제라르의 말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카트리나는 밝게 웃으며 레스티아를 맞이해주었다.

“어서 와요. 꼬마 아가씨.”

레스티아는 카트리나를 마주하자마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더욱 흐려져 있었다.

게다가 눈에 담긴 마력도 무척이나 희미하게 느껴졌다.

“이리 와봐요. 꼬마 아가씨가 못 본 사이에 얼마나 자랐는지 알고 싶어.”

카트리나는 레스티아를 정면에 두고 있음에도 손을 뻗어 레스티아를 찾았다.

점점 나빠지던 시력이 결국 더욱 안 좋아져서 실명에 이른 것이다.

“카트리나 님…….”

레스티아는 조심스레 카트리나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손이 조금 차게 느껴졌다.

“이것 봐. 손이 나만큼이나 커졌네. 정말 많이 자랐겠어.”

“…….”

“아, 내 정신 좀 봐. 이렇게 오랜만에 손님이 왔는데, 내 몰골이 어떤지 모르겠네요. 요즘 들어 혼자서는 확인하기 어렵거든.”

“카트리나 님은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우세요.”

레스티아의 말에 카트리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뭐야. 꼬마 아가씨, 고마운데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있어. 걱정 말아요. 앞을 못 본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야. 수많은 록베스트들이 그렇게 살았는걸.”

얼마 안 가 두 사람 사이에 다과상이 차려졌다.

카트리나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레스티아에게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제라르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참, 꼬마 아가씨. 성년제를 치렀다면서? 축하해요.”

“고맙습니다.”

“어때, 마음에 드는 멋진 남자는 좀 있었어?”

“네? 멋진 남자요?”

“응? 뭐야. 설마 그런 자리에서 베르체스터의 남자들이랑만 춤춘 건 아니겠지요? 그랬다면 꼬마 아가씨는 정말로 심각한 브라더 콤플렉스야.”

브라더 콤플렉스라는 말에 레스티아는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 당연하죠! 다른 남자분과도 함께 춤췄는걸요!”

그렇다고는 해도.

세 명의 오라버니들을 제외하고 무도회장에서 춤을 춘 것은 리시언이 유일했다.

만약 리시언이 아직도 베르체스터로 살아가고 있었다면 브라더 콤플렉스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니까 레스티아는 카트리나의 말에 당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당하게 대답한 만큼, 카트리나의 질문은 더욱 집요해졌다.

“그래? 어떤 남자였나요? 키는? 몸매는? 얼굴은 잘생겼어? 성격은 어땠어요? 춤출 때 실수는 안 했어? 옷 입는 센스는 괜찮았어?”

질문을 듣기만 했을 뿐인데 그날의 리시언의 모습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올랐다.

잔뜩 화를 내고 있음에도 예쁘게 빛나던 황금색 눈동자.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도 커진 키.

피로해 보였지만, 이마를 살짝 드러낸 머리 스타일도 참 잘 어울렸다.

연회복을 차려입은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라 유심히 쳐다봤던 것 같다.

‘나, 정말 리시언 님과 만난 것이 맞구나.’

새삼 현실감이 느껴졌다.

그날의 재회는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그런데도 계속 심술 맞게 구는 리시언이 미워서 일부러 쌀쌀맞게 대응했다.

그러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상태로 만든 것은 리시언이었다.

조엘과 마티어스와 함께 춤을 추면서 감정을 갈무리한 이후에야 리시언을 찾아봤으나 리시언은 이미 연회장에서 사라져 버린 후였다.

그래서 혹시 환상을 본 것은 아니었을까 싶었는데.

새삼 이렇게 선명하게 그날의 일들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환상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뭐야. 꼬마 아가씨, 말도 못 할 정도로 멋진 남자였나 봐?”

“아, 아니에요!”

멋지긴 하지만.

“나쁜 남자였어요.”

카트리나 님이 빠지지 말라고 했던 그런 남자요.

카트리나는 쿡쿡 웃었다.

“어머 그랬어?”

그러고는 과거를 회상하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허공을 응시했다.

“좋을 때네. 나도 그때 나쁜 남자랑 춤췄었는데.”

“아!”

레스티아는 이때다 싶어 제라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그건 제라르 오라버니 말이죠? 제라르 오라버니가 옛날에 성년제에서 카트리나 님과 함께 춤을 추셨다고 하셨어요.”

순간 카트리나의 입가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응? 제라르가 그걸…… 기억해?”

카트리나는 재빨리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표정이 기뻐하는 모습처럼 보였기에, 레스티아는 조금 더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다.

“저기, 카트리나 님. 혼인 준비를 하신다고 들었는데……”

“아, 응 맞아요. 내 마안이 이제 쓸모없어진 이상 서둘러서 다음 세대를 만들어야 해. 마법사 가문이 아닌 남자와.”

레스티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말도 안 돼요. 그럼 제라르 오라버니와는 억지로 이별하신 건가요?”

카트리나는 곧바로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쥐며 웃음을 터뜨렸다.

“후훗. 이별이라니 꼬마 아가씨. 제라르와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네? 하지만 두 분은…….”

“제라르는 내가 필요했고, 나는 그것만으로 좋았을 뿐이랍니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둥그렇게 말아 쥐었던 손은 어느새 맥없이 무릎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필요라니요! 아시잖아요! 제라르 오라버니는 원래 무뚝뚝한 성격이잖아요. 마안으로 제라르 오라버니의 마음을 확인해 보신 적은 없나요?”

카트리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무서워서 못 했답니다.”

“네?”

“바보 같지?”

“…….”

“마안을 쓰지 않고, 직접 물어보는 방법도 있었겠지. 하지만 어떤 방법을 써서든 조금이라도 부정당하고 싶지 않았답니다.”

그 대답에 레스티아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이상하게도 제라르와 관련된 일에는 용기가 없어서요.”

다만 항상 명랑하던 카트리나의 목소리에 힘이 빠진 것이 신경 쓰였다.

“카트리나 님…….”

레스티아는 맥없이 무릎 위에 올라가 있는 카트리나의 손을 잡고 조용히 마력을 분석하는 주문을 외웠다.

제라르와 카트리나의 사이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는 없지만.

카트리나가 다시 마안을 쓸 방법 정도는 되찾아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 * *

레스티아가 베르체스터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저녁이었다.

“리티, 잘 다녀왔어?”

“레스티아. 어서 와.”

조엘과 마티어스가 레스티아의 방까지 찾아와서 레스티아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라버니들? 저를 기다리고 계셨나요? 무슨 일이 있으세요?”

“아, 그게.”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레스티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곁에 있던 도라가 한숨을 푹 쉬더니 무언가를 잔뜩 들고 레스티아 곁으로 다가왔다.

“도련님들이 아가씨 앞으로 도착한 초대장들을 같이 확인하고 싶으시다네요.”

“초대장이요?”

인제 보니 도라가 들고 있는 것은 편지 더미였다.

레스티아는 이미 수도에서 유명인사였다.

모두가 레스티아를 사교 모임에 초대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래서 성년제가 끝나자마자 이렇게 부리나케 초대장들을 보내온 것이었다.

“그런데 오라버니들이 왜 제 앞으로 온 초대장을 확인하고 싶어 하시는 거죠?”

“리티, 미안.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닌데 신경 쓰이는 초대장이 보여서.”

“그래. 여기, 황실 마크가 그려져 있는 초대장 말이야.”

“황실에서 보낸 초대장이요?”

이제 보니 왕관을 쓴 독수리 문양이 박혀 있는 화려한 초대장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이건…….”

레스티아가 초대장을 뜯자, 조엘과 마티어스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줄곧 저것을 보낸 이가 누구인가 신경 쓰고 있었다.

설마, 키시어스 대공인가.

성년제에서도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레스티아의 춤을 가로채 가더니만.

이번에는 또 대담하게 집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할 셈인지.

물론 리시언과 레스티아는 한집에서 지낸 시간이 많았지만, 그건 어렸을 때고, 지금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레스티아가 리시언의 초대를 받아서 황궁에 가게 된다면 그것을 어떻게 만류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초대장의 내용을 확인한 레스티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이건 황후 폐하께서 보내신 초대장이네요.”

“황후가?”

“네. 살롱을 열 것이니 참여하라는 내용이에요. 이번에 성년제를 맞이한 영애들을 모두 초대하겠다고 쓰여 있어요.”

조엘과 마티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의 초대장 정도는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힘으로 거절할 수 있으니까.

“리티. 황후가 초대하는 곳에는 굳이 갈 필요 없어.”

“맞아. 가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레스티아 역시 동의했다.

“네. 가지 않겠어요.”

레스티아는 황후와 황태자와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피할 수 있다면 계속해서 피하고 거리를 둘 생각이었다.

그래서 오라버니들의 말을 따라 살롱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부분에서 발생했다.

황후의 살롱이 열린 날의 늦은 오후.

안젤라의 어머니가 다급한 기세로 베르체스터 저택을 찾아왔다.

“글라리엔 부인? 무슨 일이세요?”

“베르체스터 영애.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하지만 안젤라가……!”

“네? 안젤라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글라리엔 부인은 상황을 설명했다.

베르체스터 공작가는 황후의 초대장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글라리엔 백작가는 한미한 가문으로 여겨졌기에 황후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안젤라는 황후의 살롱에 참석해야만 했다.

그런데, 황후가 레스티아가 안젤라에게 선물해준 마력 중화석 브로치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그러고는 트집을 잡았다.

‘모든 마석과 마도구는 황가가 관리한다. 그런데 황가가 통용하지 않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을 가지고 황후의 살롱에 참석하다니. 이건 황족을 암살하기 위한 마도구일 수도 있다.’

라며 말이다.

레스티아는 기가 찼다.

“그게 무슨! 그 브로치는 그런 용도가 아니란 말이에요!”

오로지 안젤라를 위한 마력 중화석이었다.

만드는 내내 황후라든가 황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글라리엔 부인. 지금 안젤라는 어디에 있나요?”

“……황후궁의 감옥에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어미인 제게 면회권도 주지 않았어요.”

글라리엔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떨궜다.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자신이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베르체스터 공작가에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며 말이다.

안젤라가 감옥에 갇혔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 하나로.

레스티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궁으로 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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