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80화 (80/132)

80화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손이 제 손위로 올라오자마자 곧장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그 탓에 레스티아는 세이튼과 마무리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세이튼은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점점 멀어져가는 레스티아와 리시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스티아의 생각에 이건 무척이나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선약이 있었다면 예의를 갖춰 거절하고, 제대로 사과의 말을 전해야 하는 것이 옳았다.

레스티아는 리시언에게 붙잡힌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기며 말했다.

“저기, 아무래도 세이튼 님께 제대로 인사를 드리고 와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리시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레스티아의 손을 더 단단하게 움켜쥐고 걸음을 재촉할 뿐.

잔뜩 화가 난 듯 보이는 그 모습에 레스티아는 더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대화 없이 음악이 연주되고 있는 무도회장의 중앙에 도달했다.

줄곧 무뚝뚝하게 걷기만 하던 리시언이 그제야 레스티아를 돌아보고 눈을 마주했다.

‘아…….’

레스티아는 속으로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리시언의 금빛 홍채가 여름날의 햇살처럼 온몸을 뜨겁게 옥죄어 오는 것 같았다.

아까 전부터 줄곧 자신을 집요하게 쫓던 의문의 시선이 이제야 선명하게 느껴졌다.

‘리시언 님이 나를 보고 계셨던 걸까.’

그것도 저렇게 화가 난 표정으로.

내가 뭘 잘못했다고.

레스티아는 내심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여태까지 착한 아이처럼 시키는 대로 해왔다.

리시언이 원했기에, 그가 감추었던 비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당부한 대로 지난 4년 동안 안개 섬으로 떠나 공부를 하며 지냈다.

그리고 마력 중화석을 만들어 보이겠다고 한 약속도 지켜 보였다.

이미 지킬 필요가 없어진 약속이었으나, 그만큼 레스티아에게 리시언과 함께한 시간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그 모든 노력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4년 만에 수도에 돌아왔음에도 한 번도 만나러 오지 않았고, 제라르를 통해 보냈던 마력 중화석을 잘 받았다는 말조차 전해오지 않았다.

그랬으면서, 이렇게 화가 난 표정으로 나타나서는 멋대로 무도회장 가운데로 끌고 오다니.

그것도 선약이 있었다는 없는 약속을 지어낸 바람에, 레스티아는 거짓말까지 해야 했다.

그랬는데.

반갑다는 말은 못 할지언정, 다정한 미소 한번 지어 주지 않고 줄곧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나쁜 사람.

하지만 리시언은 이 일련의 과정을 모두 저질러 놓고도, 뻔뻔하게도 레스티아를 향해 허리를 숙여왔다.

함께 춤을 추자는 의미였다.

“…….”

문득, 제라르가 이곳에서 만난 남자들에게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춤 신청, 확 거절해버릴까.

이대로 돌아서서 무도회장 밖으로 달아나 버리면 당신도 나처럼 속상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하지만 레스티아는 그러지 못했다.

리시언의 얼굴에 날카롭게 깃들어 있는 피로한 표정이 신경 쓰였다.

예전에는 어두웠지만, 지금은 예민하고 까칠해 보였다.

레스티아는 리시언이 지독한 수면 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분위기와 안색으로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걸까 하고 추측해 볼 뿐이었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되어 버렸는데도 왜 자꾸만 걱정스러운 건지.

참으로 신경 쓰이는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남자를 이대로 버려두고 떠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레스티아는 결국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살짝 쥐며 무릎을 굽혔다.

춤 신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레스티아와 리시언은 서로를 마주하고 음악에 맞춰 말없이 춤을 췄다.

이상하게도 손을 맞잡을 때마다 손끝에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서로의 호흡과 체온이 가까이 느껴질 때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분명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접촉이었는데,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까.

이 모든 것들이 이상하도록 낯설게 느껴져서 가슴 한구석이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맞잡은 손이 춤동작에 의해 떨어졌다 닿기를 몇 번.

리시언의 굵은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러더니만, 더 인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이 반지는 뭐지?”

“네?”

그동안 쭉 침묵하고 있더니만, 기껏 꺼낸 첫마디가 반지 얘기라니.

이제 보니 리시언의 화난 눈이 가느다란 반지가 끼워져 있는 레스티아의 손가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아. 이건, 선물 받은 반지예요.”

레스티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리시언의 표정은 더욱더 날카롭게 변해버렸다.

“선물? 내가 분명 남자한테 함부로 반지 끼워주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건 반대도 마찬가지야.”

리시언의 그 모습은 맹수가 제 영역을 침범당한 것에 불쾌감을 느끼고 이를 세우는 것과 동일했다.

레스티아는 황당한 나머지 두 눈을 깜박거리며 리시언을 올려다봤다.

“남자라니요? 이건, 글라리엔 영애가 제게 선물해 준 우정 반지인걸요.”

“……뭐?”

“제가 리시언 님이 가르쳐 주신 것을 실천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레스티아의 설명에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리시언의 미간이 일순간에 맥없이 평평하게 풀렸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그 표정이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머쓱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덕에 레스티아와 리시언 사이에 팽팽하게 감돌던 긴장감이 탁 풀렸다.

레스티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리시언과 대화를 시도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하지만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방금 일이 쑥스러웠던 걸까.

얼굴이 조금 붉어 보이기도 했다.

레스티아는 배려하는 마음으로 다시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리시언 님. 우리 4년 만에 만나는 거잖아요. 저는 너무 반가워요. 리시언 님은 그렇지 않나요?”

하지만 리시언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레스티아가 기대했던 것을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여기서, 그렇게 웃지 마.”

대뜸 웃지 말라니.

그것도 조금의 상냥함도 느껴지지 않은 딱딱한 어투로.

그 태도는 여태까지 줄곧 리시언의 독선적인 태도에 맞춰주고 있던 레스티아의 마음을 더욱더 속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레스티아는 제라르의 조언을 듣기로 했다.

리시언이 이런 식이라면 더는 마냥 친절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춤이 끝나자마자, 리시언의 손을 놓아버리고 뒤로 한걸음 물러나 말했다.

“그럼, 대공 전하. 죄송하지만 저는 오라버니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잠깐. 베르체스터 영애.”

리시언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레스티아를 불러세웠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이전과는 다른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대화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다음 기회에 예의를 갖추어 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느새 레스티아의 뒤편에 조엘과 마티어스가 나타나 있었다.

그들은 차가운 표정으로 리시언을 노려보고 있었다.

레스티아는 방긋 웃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베르체스터의 쌍둥이들을 향해 걸어갔다.

“…….”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온기가 사라져버린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방금,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오늘 자신이 이성을 잃고 저지른 짓들은 모두 낯선 것들투성이였다.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인 걸까.

방금까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도 희미했다.

레스티아가 세이튼과 말을 섞는 것이 싫어서 빼앗다시피 끌고 자리를 떴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눈앞에 무도회장이 보여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자신도 제라르처럼 레스티아와 함께 춤을 추고 싶었으니까.

다행히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춤 신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문뜩 레스티아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신경 쓰였다.

순식간에 화가 났다.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지난 4년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반지를 나눠 낄 수 있는 남자를 만나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면 그건 누구지?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다행히도 그것은 우정 반지였고, 레스티아는 그 오해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또 그 미소가 너무 예뻐 보이는 것이 문제였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아직까지도 너를 지켜보고 있는 사내새끼들이 이렇게 많은데.

그 미소를 이런 자리에서 지으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래서 저도 모르게 웃지 말라고 말해버렸다.

빠르게 굳어버리는 레스티아의 표정에 아차 싶었으나, 그 실수는 수습할 수가 없었다.

‘엉망이었다가, 최고였다가, 다시 엉망이 되어버리는군.’

얼마나 머저리처럼 보였을까.

좀처럼 동요하는 법이 없는 감정이, 레스티아의 일에는 쉬이 냉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로써 명확해졌다.

새삼 어린 시절의 관계는 정말로 끝났다는 것이 체감되었다.

이제 새로운 관계를 쌓아 올려야 할 때였다.

오늘처럼 충동적으로 굴어서는 안 됐다.

리시언은 조엘의 손을 잡고 다시 무도회장으로 향하는 레스티아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머릿속이 온통 복잡했다.

그때, 줄곧 리시언을 힐끔힐끔 바라보던 영애들이 다가와 춤을 신청했다.

“대공 전하, 괜찮으시다면 저희와도 춤을 추어주실 수 있을까요?”

하지만 리시언은 모두 거절한 채, 그대로 연회장 밖으로 떠났다.

* * *

다음 날.

키시어스 대공과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막내 아가씨가 성년제에서 함께 춤을 추었다는 소문이 수도 전체에 퍼졌다.

지켜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평소에 귀족 영애들과 사적인 대화도 나누지 않는 대공께서 베르체스터 영애와 춤을 추었다고?”

“대공께서 혹시 베르체스터 공작가와 정략결혼이라도 하실 생각인 건가?”

“그렇다기에는 분위기가 좋았다던데. 성년제에 굳이 참가까지 하시고.”

“그렇다면 혹시 연애?”

“에이 설마. 그 철혈의 키시어스 대공이 말이야?”

그리고 이 소식은 황후의 귀에도 들어갔다.

“베르체스터 영애와 키시어스 대공이라. 재미있군그래.”

황후가 술잔을 한번 둥글게 돌리고는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약점이 될 수도 있을까.”

황후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주 오랜만에 살롱을 열겠다. 성년을 맞이한 귀족 영애들 모두에게 초대장을 보내도록.”

황후에게는 아직 빼앗기지 않은 것이 있었다.

황제의 반려인 황후에게 주어지는 사교의 장.

바로 여자들의 사교계.

그곳은 미혼의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남자들과 리시언이 손을 댈 수 없는 공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