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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79화 (79/132)

79화

첫 춤을 시작으로 성년제의 연회는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성년제의 주인공들의 표정에는 생동감이 넘쳤다.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말이다.

리시언은 그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기에 조용히 기척을 숨기며 무도회장에 들어섰다.

하지만 기척을 숨겼다고 해서 존재감을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훤칠한 키와 근육으로 꽉 짜인 몸은 화려하지 않은 연회복을 특별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조각 같은 얼굴과 신비로운 황금색 눈동자는 스치듯 바라봐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세상에! 키시어스 대공 전하 아니십니까!”

결국, 눈치 빠른 이들이 리시언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대공 전하께서 성년제에 오시다니 신기한 일이군요. 보통 이런 연회에는 불참하셨던 것으로 아는데 말입니다.”

“혹시 친분이 있는 사람 중에 성년이 되신 분이 있으신 건가요?”

리시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짓으로 그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의사를 내비쳤다.

서늘하다 못해 공포까지 느껴지는 그 맹수 같은 시선에 모두가 빠르게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리시언은 곧장 무도회장이 훤히 내다보이는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성년제를 맞이한 레스티아의 모습을 멀리서 한번 보고 갈 생각으로 온 것이었다.

아직 레스티아와의 접점을 드러내기에는 완벽한 시기가 아니었다.

적들이 모두 제거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레스티아와의 재회가 내심 조금 두려웠다.

4년 만의 만남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다가가야 좋을지는 아직도 고민되는 부분이었다.

-나빴어요.

레스티아의 그 한마디가 4년이 지난 지금도 귓가에 선명했다.

다시 만난다면, 이제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것도 욕심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욕심을 누르는 방법은 까마득히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러니까 레스티아에게 좋은 사람으로 나타날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는 시간을 두고 공을 들일 생각이었다.

“…….”

리시언은 무도회장이 잘 보이는 소파에 기댄 채, 아래층을 바라봤다.

레스티아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장내에 있는 대다수의 남자들이 제라르와 춤을 추고 있는 레스티아를 연신 힐끗거리며 쳐다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레스티아 베르체스터.

분명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깡마르고 꾀죄죄한 모양새의 빈민가의 아이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습을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레스티아는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성장해 있었다.

보석이 잔뜩 박힌 은청색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의 조명을 받으며 춤을 추는 레스티아의 모습이란.

멀리서 바라봤음에도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서…….

리시언은 그동안 날카롭게 벼려왔던 모든 감각을 일순간 상실하는 것만 같았다.

항상 규칙적으로 내뱉던 숨은 갑작스레 멎었고.

모든 것을 통찰하던 눈에는 레스티아만이 담겼다.

어린 시절에도 자주 시선을 빼앗아 갔던 새하얀 머리카락이 이토록 만지고 싶은 것으로 변할 줄이야.

당장 저것을 매만질 수 없는 빈손이 지독하도록 허전했다.

그리고 귓가에는

-리시언 님.

어린 시절 자신을 부르던 레스티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지금은 어떤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줄지, 쉬이 상상이 되지 않아서 답답했다.

“미치겠군.”

왜 이렇게 예뻐진 거야.

리시언은 짧게 숨을 내뱉으며 한쪽 손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지금 레스티아를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는 뭇 사내놈들과 자신이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

그래. 저 사내놈들.

리시언의 시선이 무도회장 아래에서 레스티아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들에게 차갑게 내리꽂혔다.

이건 예상했던 일이기는 했다.

그런데도.

“생각보다 더 나쁜데.”

너무나도 불쾌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인내했다.

베르체스터의 세 형제가 이 자리에 있지 않은가.

항상 여동생을 과보호하느라 바쁜 세 사람이 있는 이상,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그 어떤 사내놈도 레스티아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제라르와 레스티아가 첫 춤을 끝냈을 무렵.

웬 훤칠하게 잘생긴 사내 하나가 레스티아를 향해 거침없이 일직선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타오르듯 붉은 태양과 같은 새빨간 머리카락.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매에 자리 잡은 주황색 홍채.

재미없을 만큼 기사답고 딱딱한 몸가짐을 가진 남자.

황실 기사단의 정복을 입고 있는 그 남자는 세이튼 온리드라스였다.

세이튼의 모습을 확인한 리시언의 미간에 저절로 주름이 잡혔다.

저자가 왜 여기에.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이지만, 황후의 검으로써 움직이는 자가 아니던가.

결국, 리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도회장 아래로 향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했던 결심들은 이미 무색해져 있었다.

* * *

‘어? 방금 뭐였지? 누가 나를 계속 쳐다보는 것 같았는데?’

제라르와 첫 춤을 끝낸 레스티아는 자신을 끈적하게 옭아매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주변에는 무도회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이상하네……. 마력 같기도 했는데.’

집요하고 끈적하면서도 어쩐지 그리움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뚜렷하지 않았기에 레스티아는 기분 탓이려니 하고 연회장 벽 쪽에 마련된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처음으로 제대로 갖춰 입은 드레스가 어색해서 피곤했다.

제라르 앞에서는 한껏 능숙한 척 춤을 췄지만, 이렇게 실전에서 춤을 춰보는 것은 처음이라 긴장되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잠시 쉬고 싶었다.

제라르는 레스티아와 첫 춤을 끝내고는 일이 생겼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조엘 오라버니와 마티어스 오라버니는 무얼 하고 계시지?’

레스티아는 두리번거리며 쌍둥이들의 행방을 쫓았다.

조엘은 여전히 자신에게 모여든 숙녀들 무리에 둘러싸여 있었고, 마티어스는 안젤라와 춤을 추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인지 두 번째 춤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엘과 마티어스와 춤을 추는 일은 조금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그때까지 쉬어야겠다.’

레스티아는 소파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하지만 얼마 쉬지 못했다.

새카만 그림자가 자신의 앞에 어둑하게 드리워졌기 때문이었다.

“베르체스터 영애. 오래간만입니다.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레스티아는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붉은 머리카락과 주홍색 홍채.

섬뜩하고 따끔따끔한 마력.

광검사 세이튼 온리드라스였다.

4년 전과 동일하게 목에는 검은색 가죽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 세이튼 님.”

“예. 세이튼 온리드라스입니다. 기억하시는군요.”

세이튼이 다행이라는 듯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뵙는 건 4년 만이군요. 유학을 다녀오셨다 들었습니다. 정말로 몰라보게 달라지셨습니다. 이제는 어엿한 숙녀이십니다.”

“아, 네……. 고맙습니다.”

레스티아는 당혹스러웠다.

세이튼은 황후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착용하고 있는 저 검은색 가죽 목걸이는 잔혹한 물건이었다.

황태자의 말 한마디에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던 모습이 생생했다.

아직도 그렇게 지내고 있는 걸까.

그는 황후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마법사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적인지 아군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난처함을 알아차린 것인지 세이튼은 위협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레스티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곤 말했다.

“베르체스터 영애. 쭉 과거의 일을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날 책임을 지고 베르체스터 공작가까지 모셔다드렸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괜찮습니다.”

레스티아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4년 전 황태자궁에서 있었던 일은 이미 마무리된 이야기였다.

더 이상 들춰서는 안 될 일이었고 말이다.

그래서 세이튼을 똑바로 쳐다보며 흠 잡힐 일 없는 대답을 했다.

“아시다시피 그날 저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으니까요.”

“……그렇군요.”

세이튼은 이해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레스티아를 빤히 쳐다봤다.

레스티아는 그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물었다.

“제게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세이튼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 레스티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베르체스터 영애. 괜찮으시다면,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네?”

뜻밖의 제안에 레스티아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세이튼은 조금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곤란하시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세이튼은 레스티아로부터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세이튼과 레스티아의 앞으로 리시언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여기 있었군. 베르체스터 영애.”

나직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말 한마디만 내뱉었을 뿐인데 공간 자체가 이 남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변해버렸다.

레스티아는 눈을 크게 뜨고 리시언을 바라봤다.

“……리시언 님?”

4년 만에 만나는 리시언이었다.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른스러워진 리시언은 조금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레스티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오랜만에 만났는데 왜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인지.

너무나도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키시어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세이튼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황족에게 건네는 예를 갖췄다.

그러자 레스티아를 바라보던 황금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해 세이튼에게로 박혔다.

“온리드라스 경. 자리를 비켜주겠나.”

어투는 정중했다.

그러나 제안이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웠다.

“베르체스터 영애는 나와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예? 하지만…….”

세이튼이 당황한 표정으로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그것과 동시에 리시언 역시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하지만 리시언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레스티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설마, 나와의 선약을 잊은 건 아니겠지. 베르체스터 영애.”

“…….”

그런 선약 한 적 없다.

그러니까 이건 강요에 가까운, 다소 강압적인 언사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리시언이 내민 손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분명 어린 시절보다 더 커지고, 거칠어졌는데도 왜 이런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걸까.

“……잊지 않았습니다.”

레스티아는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리시언이 내민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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