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레스티아. 오늘은 진실의 계승자들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옛날이야기를 해주마.
안개 섬의 장로는 연로한 노인이었다.
그는 레스티아에게 마치 동화책을 읽어주듯이 마법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곤 했다.
그럴 때면 레스티아는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옛날이야기요?
-그래. 고대에는 누구나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봤겠지?
-네.
-그런데 왜 갑자기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까?
-으음…….
레스티아는 질문을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날도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결국 답을 내지 못했다.
-이런,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 없단다. 모르는 것이 당연해. 그건 이 늙은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의 일이니까 말이다.
장로는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옛이야기에 따르면 말이다. 최초의 해석하는 자가 마법을 몽땅 없애기로 하고, 실행했다더구나.
-네? 왜요?
-그는 인류가 마법이 가진 강력한 힘을 너무 쉽게 남용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 해.
그 말에 레스티아는 곧바로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힘으로 그게 가능한가요? 마법은 세계를 구성하는 성분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이 늙은이도 믿지 못한단다. 하지만 이건 전설이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란다. 이 전설이 사실이라고 해도 완벽하게 없애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고 말이다.
혈통 마법사들은 계속 태어났고, 마도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반은 성공한 거고, 반은 실패한 것이지. 그래서 그는 강하고 영특한 검은 까마귀에게, 남겨진 것들을 감시하라는 역할을 맡겼다더구나.
검은 까마귀라는 말에 레스티아는 깜짝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니?
-아, 검은 까마귀는 모르카티움 제국의 황족을 상징하는 새라서요.
으흠. 장로는 짧게 숨을 골랐다.
-그래. 검은 까마귀는 그 모르카티움 제국의 황족이 맞단다.
-네?
-그들은 마법을 감시하는 제 역할에 충실했지. 하지만 세월은 너무 많이 흘렀고, 그들의 후손은 마법을 독점하기 시작해서 권력을 거머쥐었지.
장로가 어둡게 가라앉은 시선을 레스티아에게 맞추며 물었다.
-레스티아. 너는 마법을 어떻게 하고 싶니?
레스티아는 왜 장로가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여러 번 생각했다.
그리고 내놓은 답변은 마법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을 마법으로 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 다 됐다. 성공!”
지금 이렇게, 안젤라를 위한 마력 중화석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됐어. 이걸 브로치로 가공해서 선물해야지.’
레스티아는 희미하게 사라지는 황금색 마법진 위에 놓인 아쿠아마린 색상의 마석을 작은 상자에 담아 넣었다.
그러고는 실렁줄을 잡아당겼다.
딸랑.
가벼운 소리와 함께 곧바로 도라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가씨, 필요하신 것이 있으신가요?”
“네. 이걸 브로치로 세공하고 싶어요. 안젤라에게 성년식 선물로 줄 거예요.”
“예. 바로 맡기도록 할게요!”
도라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가씨 그럼 이제 바쁜 일은 다 끝내신 건가요? 조엘 도련님과 마티어스 도련님이 돌아오셔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 말에 레스티아가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에? 언제부터요?”
“한 시간 전쯤에 도착하셨어요. 아가씨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하셔서 이제야 말씀드리네요.”
“오라버니들도 참!”
레스티아는 곧바로 조엘과 마티어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달려나갔다.
“오라버니들!”
쌍둥이들은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레스티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자수정빛 눈동자가 레스티아를 발견하고 곧바로 곱게 휘었다.
“레스티아. 하고 있던 일은 다 끝냈니?”
“리티. 어때, 이 오라버니가 잘 참고 기다렸다고. 멋지지?”
두 사람은 마치 칭찬을 바라는 듯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양 볼을 부풀리며 툴툴거렸다.
“휴. 오라버니들이 저를 찾아오는 건 방해가 아니라니까요!”
그러고는 곧장 양팔을 넓게 벌려 오랜만에 만나는 조엘과 마티어스를 한 번씩 포옹했다.
조엘과 마티어스가 레스티아와 함께 안개 섬에 머물렀던 것은 1년 정도였다.
두 사람은 레스티아가 안개 섬에 익숙해질 때까지 곁에 있어 준 이후, 다시 모르카티움 제국으로 돌아왔다.
황후의 권력이 쇠락하자, 제라르가 리시언을 다음 황제로 옹립하는 데 힘을 보태라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조엘은 곧장 제국의 행정 조직을 장악했고, 마티어스는 군사 조직을 장악했다.
리시언이 세를 확장할 때마다 쌍둥이들도 악랄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문이 어쨌든 간에.
레스티아에게 두 사람은 자주 못 보게 되어 마음이 아픈 오라버니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덕에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요리사들은 아주 오랜만에 저녁 만찬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저녁 만찬에서.
레스티아를 제외한 세 명의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성년식에 대해 논의했다.
하지만 논의라기보다는 신경전에 가까웠다.
‘누가 성년제에서 레스티아를 에스코트할 것인가.’가 핵심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리티를 에스코트해야 하는 건 나야. 내가 제일 좋은 오라버니니까!”
“마티어스. 어폐가 심한데. 제일 좋은 오라버니는 바로 나인걸.”
조엘과 마티어스는 양보할 수 없다는 듯 서로를 노려봤다.
제라르는 나직한 목소리로.
“내가 하겠다.”
라고 단언했고 말이다.
예상치 못했던 제라르의 반응에 쌍둥이들이 곧바로 반발했다.
“형님이 말입니까?”
“무슨 소리야. 형은 너무 나이 먹었다고.”
“무슨 상관이지. 아버지와 참석하는 이들도 많다고 들었다만.”
결국 옥신각신하던 세 사람은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자, 우리 중에 누구를 선택할래?’ 하는 질문이 표정 가득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조각 케이크 위에 올라간 딸기를 포크로 찍어 입속에 쏙 넣으며 빙그레 웃어 보일 뿐이었다.
“오라버니들, 꼭 한 사람이랑 갈 필요는 없잖아요? 다 같이 가요!”
하여간 이 여동생은 시간이 지나도 지독하게 공정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성년제 당일.
드레스 디자인을 맡았던 리사는 전날 밤에 완성된 드레스가 담긴 상자를 들고 베르체스터 저택을 찾아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건 제 인생의 역작입니다! 모든 것을 새하얗게 불태웠습니다!
레스티아는 며칠 내내 밤을 새워서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리사에게 피로 회복 마석을 하나 더 쥐여주었다.
“세상에. 아가씨, 너무 예쁘네요.”
아침 일찍부터 레스티아의 치장을 시작한 도라는 계속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렇죠? 드레스가 너무 예뻐요.”
드레스는 정말로 예뻤다.
청은색의 살랑거리는 원단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 있어서 작은 빛에도 반짝거리며 빛났다.
“어머, 아가씨. 드레스가 아니라 아가씨가 예쁘다는 말이었어요.”
도라의 말에 레스티아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볼을 붉혔다.
“도라. 그렇게 칭찬해주면 부끄러워요.”
“어머, 진짜인데. 오라버니들에게도 물어봐요!”
그러고는 레스티아의 방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베르체스터 형제들에게 소리쳤다.
“들어오세요! 레스티아 아가씨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레스티아의 방 안으로 성큼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
“…….”
“…….”
세 명의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눈을 크게 뜨고, 치장을 막 끝낸 레스티아로부터 시선을 떼어내지 못했다.
그러자 도라는 곧장 레스티아의 손을 잡아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
“자, 아가씨! 일어나셔서 한번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아보세요.”
“으응? 이렇게요?”
레스티아는 영문도 모르고 일단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보였다.
그러자 작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수 놓인 청은색의 하늘하늘한 원단이 살랑거렸다.
곱게 땋아서 올린 새하얀 머리카락은 우아하기만 했다.
그 모든 것이 레스티아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그래서일까, 베르체스터 형제들의 눈에 여동생이 낯설게 보였다.
언제 이렇게 자란 거지.
물론, 그동안 레스티아가 많이 컸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 눈에 레스티아는 여전히 막내였다.
그런데 이렇게 제대로 갖추고 보니, 이제 완연한 숙녀의 분위기가 났다.
분명 처음 봤을 때는 훨씬 작았는데.
형제들은 말을 잃고 추억과 상념에 젖어들었다.
레스티아는 그 침묵을 오해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오라버니들 역시, 저한테 이런 거 안 어울리죠?”
그제야 세 형제는 아차 싶어서 재빨리 말을 건넸다.
“아니, 레스티아. 전혀 이상하지 않아.”
“그래. 리티. 너무 예뻐서 할 말을 잃은 것뿐이야!”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구나.”
레스티아는 여전히 볼을 붉힌 채 ‘드레스 덕분에 칭찬받네요.’라고 답했다.
드레스?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레스티아의 드레스를 다시 한 번 쳐다봤다.
문득 수 놓인 보석들과 장신구들이 예사롭지 않은 물건처럼 보였다.
분명 이 드레스는 레스티아가 자신의 돈으로 맞췄다고 했는데,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고가이지 않나.
하지만 세 형제는 ‘다른 형제 중에 레스티아에게 잘 보이고 싶은 녀석이 따로 챙겼겠지. 하여간 누군지 몰라도 눈치 빠르군.’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오늘 레스티아를 노릴 늑대 같은 놈들로부터 여동생을 잘 지켜야겠다고 결심했다.
* * *
성년제가 개최되는 곳은 수도의 동쪽에 위치한 대신전이었다.
“레스티아! 여기야 여기!”
미리 도착한 안젤라가 휠체어에 앉아 손을 흔들며 레스티아를 반겼다.
안젤라는 봄날의 꽃잎과 같은 옅은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안젤라의 홍채 색과 어울려 무척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안젤라! 성년이 된 걸 축하해.”
레스티아가 빙그레 웃으며, 미리 준비한 마력중화석 브로치를 꺼내 안젤라의 가슴에 달아주었다.
“고마워. 레스티아! 나도 선물을 준비했어!”
안젤라는 성년제에 마석을 주겠다는 레스티아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답례로 부담 없이 낄 수 있는 백금으로 만들어진 얇은 우정 반지를 건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신전의 중앙 광장에 자리를 잡았다.
함께 온 가족들은 광장의 구석에 마련된 곳에서 축복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전은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곧바로 성년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관들의 축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