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응? 내게 필요한 마석?”
마석을 주고 싶다는 레스티아의 말에 안젤라의 두 눈에 이채가 반짝였다.
씰룩거리는 입술이 당장이라도 ‘응! 갖고 싶어!’라고 외칠 기세였고 말이다.
하지만 안젤라는 애써 입매를 꾹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 앞에서 줄곧 어린애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이제 너도 어른이니, 예의상 거절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단다.’라고 충고했던 일도 떠올랐다.
‘어쩐지 부끄러운걸. 레스티아는 그사이에 이렇게 어른스러워졌으니까, 나도 어른스럽게 행동해야지.’
글라리엔 부인의 피나는 교육의 성과가 있었는지, 안젤라는 흠흠 하며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아니야. 레스티아. 괜찮아. 굳이 힘들여서 만들어줄 필요 없어. 나는 어차피 툭하면 잠드니까 피로를 해소해주는 마석은 필요치 않아.”
그러자 레스티아가 싱긋 미소 지으며 다시 제안했다.
“무슨 소리야. 안젤라, 내가 너에게 주고 싶은 마석은 네가 갑자기 잠드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마석이야.”
“뭐어?”
뜻밖의 말을 들은 안젤라는 조금 전의 결심을 가볍게 무시한 채 눈과 입을 동시에 크게 벌리며 소리쳤다.
“정말? 마석으로 그게 가능해?”
레스티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베르체스터 공작가에서 사용하는 마력 중화석에 대해 알고 있어?”
“알고 있지! 조엘 오라버니가 하고 다니던 팔찌랑, 마티어스 오라버니의 피어싱에 달린 보석을 말하는 거잖아.”
“맞아. 그것과 같은 원리로 글라리엔 가문의 마법사가 사용할 수 있는 마력 중화석을 만들어볼 생각이야.”
지난 4년간 레스티아는 속성 마력 중화석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혈통 마법사들의 부작용이 어떤 이유로 발생하는지 알게 되었다.
혈통 마법사들의 마법은 한 가지 마력을 과하게 사용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무엇이든 과하면 좋지 않은 법.
결국에 마법사는 그 마력에 매몰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몰되기 전에 균형을 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부작용을 상쇄시켜주는, 상반된 힘을 가진 마력으로 말이다.
여러 마법사 가문 중에 베르체스터 공작가만이 마력 중화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속성 마법은 서로 상반되는 힘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마법사 가문들의 마력도 분석해서 마력 중화석을 만들게 되면, 마법의 부작용을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론적인 거야. 한 번에 성공시키는 것도 힘들 거고. 하지만 너만 괜찮다면 시도해보고 싶어.”
레스티아가 안젤라를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안젤라는 미간에 자그마한 주름을 만들어낸 상태였다.
“레스티아. 네가 하는 말은 너무 이해하기가 어려워.”
하지만 곧바로 활짝 웃으며 경쾌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해볼래! 레스티아가 할 수 있다니까!”
“믿어줘서 고마워 안젤라.”
안젤라의 신뢰가 가득 담긴 표정과 목소리 덕에, 레스티아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해?”
“그럼, 잠시 실례할게 안젤라. 먼저 글라리엔의 마력을 분석해야 하니까.”
레스티아는 안젤라의 손등 위에 살포시 제 손을 올렸다.
그리고 가볍게 숨을 내뱉고는 천천히 노래하듯 마법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레스티아의 회색 홍채 위로 선명한 황금색 마법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마법진이 바닥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레스티아…… 이건? 마법이야?”
안젤라는 당황했다.
레스티아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마법과는 전혀 다른 마법이었다.
하지만, 위협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쩐지 편한 느낌.
안젤라는 어느새 넋을 놓고 레스티아와 자신의 주변을 뒤덮기 시작한 황금빛 마법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레스티아의 눈에는 이 마법진이 전혀 다른 것으로 보였다.
마법진은 바닥에서 기이한 문양으로 원을 그리며 나타나더니, 이내 거미줄처럼 주변으로 뻗어 나가 주변의 풍경을 집어삼키고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공간은.
마치 거대한 도서관 같았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금빛 책장.
그사이에 빽빽하게 들어찬 방대한 분량의 마도서들.
마도서들은 수 겹의 얇은 황금빛 사슬에 얽혀서 서로 마주한 거울처럼 무한으로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레스티아가 그동안 읽어왔던 마도서의 지식이 구체화된 아공간이었다.
해석하는 자는 단순하게 마도서를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력의 흐름과 구성, 마법에 대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자.
고대부터 전승되어오는 마법의 연결고리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듣고 구현해 낼 수 있는 자.
그게 해석하는 자였다.
세상에 남겨진 마도서는 막 능력을 자각하기 시작한 해석하는 자를 위한 안내서 역할을 할 뿐이고 말이다.
[이번에는 무엇이 궁금해?]
사슬에 얽힌 책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웅웅거리며 레스티아의 머릿속에 말을 걸어왔다.
레스티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안젤라의 마력을 자세히 알고 싶어.”
촤르르륵.
책장을 둘러싸고 있는 쇠사슬이 풀리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스티아의 머릿속에 안젤라의 마력을 분석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글라리엔의 마력.
몽실몽실한 분홍빛.
달콤하고 포근한 솜사탕 같은.
꿈과 미래의 조각.
이것과 상반된 마력은…….
하지만 분석은 이내 중단되었다.
[지금, 네가 알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야속하게도 레스티아가 그동안 쌓아 올린 지식과 경험이 여기까지라고 대답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황금빛 아공간은 사라지고 마법진도 모습을 감추었다.
레스티아는 어느새 주문을 외우기 전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어!”
멍하니 레스티아를 바라보던 안젤라도 그새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된 거야 이거? 나 방금 꿈꾼 것 같아. 혹시, 지금 꿈인 거 아니지?”
레스티아는 우왕좌왕하는 안젤라의 손을 꼭 쥐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분석은 끝났어. 마석은 성년제에 선물해줄게. 안젤라 조금만 기다려줘.”
* * *
한편, 안젤라와 레스티아의 드레스를 제작해야 하는 리사는 곤란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호기롭게 푸른 리본 의상실에 사표를 내던지고 나와서 작업할 시간도 확보했겠다.
빠르게 디자인도 결정되었고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드레스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도통 구할 수가 없었다.
이미 최상등품의 옷감과 보석들은 일찌감치 동이 난 상태였다.
“뭐? 이제 와서 이런 고급 자재들을 주문하고 싶다고? 진작 다 팔렸지!”
“돈을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어떻게 구할 수 없을까요?”
“허어, 아마추어같이 왜 이러나? 성년제 기간 동안 의상실이 바쁜 만큼, 우리 같은 재료 상점도 바쁘다는 걸 알지 않나?”
리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자재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계속 허탕을 쳤다.
‘어쩌지. 베르체스터 저택으로 돌아가서 두 분께 따로 말씀드려야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디자인을 조금 변경하거나, 드레스를 만들 때 사용하는 재료의 등급을 낮추는 방법밖에 없어 보였다.
리사는 결국 임시 작업실로 쓰게 된 자신의 작은 방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새카만 마차 한 대가 리사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며 깔끔한 차림새의 노부인이 나와 리사에게 마차 안에 탑승하라고 손짓했다.
“이보게. 할 말이 있으니 마차에 탑승하시게나.”
“누, 누구세요?”
“위험한 사람은 아닐세. 자네, 드레스 재료를 찾고 있지 않나. 도움을 줄 수 있네.”
리사는 잔뜩 경계했다.
그러자 노부인이 불쑥 원단을 하나 내보였다.
그것은 리사가 온종일 발품을 팔고 다녀도 구할 수 없었던 원단이었다.
“이걸 주겠네. 대화할 생각이 있나?”
“으윽.”
리사는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조용히 달렸다.
그리고 한적한 저택에 멈추어 섰다.
“뭐, 뭐예요! 왜 저를 이런 데 데려온 거예요?”
리사는 울상이 되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하다고 해도 원단 하나에 이렇게 정신머리 없이 굴다니.
수도는 한눈팔면 코 베어 가는 곳인데!
하지만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노부인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 저택을 자네의 작업실로 쓰게.”
“네?”
저택 안에는 커다란 의상 제작 작업실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리사가 구하기 어려워서 애먹고 있었던 귀한 옷감들과 온갖 귀한 재료들이 한가득 채워 넣어져 있었다.
“이, 이게 다 무엇입니까?”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을 베르체스터 공녀님이 주문한 의상을 제작하는 데 사용하면 된다네.”
“예? 부인께서는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사람이신가요?”
“아니네.”
“그럼?”
“자네처럼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도움을 받았던 분께서 따로 돕고자 하시는 거네. 그분께서는 이 일이 조용히 처리되길 원하시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나?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이지.”
부인의 차가운 말투에 리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빠른 친구군. 그럼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게 연락하게.”
묘령의 노부인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어쩌지?”
리사는 휘황찬란한 재료가 가득 있는 작업실에 홀로 남겨졌다.
당장이라도 도망쳐야 할까.
하지만 막상 재료들을 보자니, 창작 욕구가 끓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리사가 어려서부터 상상해왔던 모든 것들을 구현해 낼 수 있는 재료들이 이곳에 있었다.
“그래.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런 재료들로 드레스를 만들겠어!”
재료들은 최고급품들이었고, 레스티아가 건네준 마석 덕분인지 하루 종일 돌아다녔음에도 체력이 넘쳤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작품을 만들기에 완벽한 상태였다.
“지금, 이 순간을 허투루 낭비할 수는 없어!”
리사는 커다란 뿔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곧바로 드레스 제작에 착수했다.
* * *
모든 임무를 끝마친 노부인은 제 주인에게로 돌아가 보고를 끝마쳤다.
“지시하신 대로 일을 진행 시키고 왔습니다.”
리시언은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여전하군, 제라르.’
제라르 베르체스터.
마음은 가상하나, 참으로 무심하고 어설픈 오라버니가 아닐 수 없었다.
레스티아의 성년제를 챙겨주겠다고 해놓고, 가장 중요한 드레스를 미리 생각해두지 못했다니 말이다.
물론 성년제에서 드레스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거든, 제라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와 권력,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레스티아의 드레스를 마련했을 것이다.
그런 방식은 레스티아가 싫어할 것이 뻔한 데 말이다.
그래서 리시언이 조용히 나섰다.
“이것도 오빠 노릇인가.”
아니.
리시언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하는 이 모든 행동은 더 이상 오빠 노릇이라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