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75화 (75/132)

75화

“휴. 조금 더 일찍 깨어났다면 좋았을 텐데. 왜 내 인생은 조금의 계획도 세울 수 없게 되어 있는 걸까?”

안젤라의 표정은 어두웠다.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에 자리 잡은 화사한 분홍색 홍채에 드리운 그늘은 지난 4년 사이에 더욱더 짙어져 있었다.

“안젤라. 포기하기에는 일러. 조금 더 찾아보자. 아직 못 가본 의상실이 많잖아.”

레스티아가 안젤라를 위로했음에도, 안젤라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그때,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레스티아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어머나! 혹시, 베르체스터 공녀님 아니세요?”

얼굴을 반이나 가리는 커다란 크기의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여자였다.

품 안에는 수상한 짐 꾸러미를 잔뜩 들고 있었다.

말릴 틈도 없이 레스티아의 뒤를 그림자처럼 호위하고 있던 호위 기사들이 튀어나와 일제히 검을 겨누었다.

“누구냐!”

“꺄악!”

여자는 화들짝 놀라서 주저앉아 버렸다.

그 바람에 품 안에 들고 있던 짐 꾸러미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짐 꾸러미 안에서 색색의 리본과 천 쪼가리 등이 튀어나와 도로 위에 쏟아졌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리사라고…… 그냥 지나가던 일개 견습 디자이너일 뿐입니다.”

스스로 이름을 밝힌 여자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하지만 호위 기사들은 뾰족한 검 끝으로 리사의 턱을 겨눌 뿐 물러서지 않았다.

레스티아는 대외적으로 크게 사교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수도에는 4년 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차림새도 수수한 것으로 단박에 공작가의 영애임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런 레스티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이가 수도에 있을 리 없었다.

그것도 평민이 말이다.

“일개 견습 디자이너가 어떻게 공녀님을 알고 있지?”

“아! 저, 저는 베르체스터 공작가에서 후원을 받고 자란 사람입니다.”

“후원?”

“네, 네! 베르체스터 영지에서 공작님께서 고아들을 후원하셨었지요. 저는 지금은 고아원을 나와서 수도의 의상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공녀님의 얼굴을 알고 있지? 의심스럽군.”

리사가 커다란 안경을 고쳐 쓰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스스로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어, 언젠가. 베르체스터 공작성에 공녀님의 초상화가 한번 크게 내걸린 적이 있었지요. 모두가 그걸 구경하러 갔었습니다. 저도 갔었고요.”

“아.”

그 말에 호위기사들은 일단 검을 거두었다.

오래전에 마티어스의 지시로 며칠 동안 레스티아의 초상화가 성문에 내걸린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레스티아가 당장 내려 달라고 해서 며칠 못 걸었지만.

“이런, 영지민이었군요.”

이 모든 대화를 지켜본 레스티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저앉아 있는 리사를 손수 일으켜 세웠다.

“미안해요. 제 기사들이 저를 호위하는 업무에 충실한 것뿐이니 이해해 주시겠어요?”

하지만 리사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커다란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너무 주제 없이 나선 것뿐인걸요. 너무 반가워서 그만…… 그게, 제가 디자이너의 꿈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공녀님께서 제게 도움을 주신 덕이라 혼자 내적 친밀감이 높았네요.”

“제가 도움을 드렸다고요?”

레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사에게 그런 도움을 준 기억이 없었다.

고아원을 운영하는 것은 엄연히 제라르의 소관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리사는 존경이 담긴 시선으로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그럼요! 공녀님께서는 제가 결코 가지고 놀 수 없었던 고급스러운 장난감과 옷가지들을 수시로 고아원에 보내주셨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인형 옷 입히기를 하면서 의상 디자이너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답니다!”

그 말에 레스티아의 눈이 커졌다.

장난감 공방을 인수하고 고아원에 장난감을 기증한 것은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랬던 일이 한 사람의 인생에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다.

하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레스티아도 오라버니들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어딘가로 팔려나갔을 것이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레스티아는 밝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속으로 앞으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위치에 서서 더 괜찮은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네! 공녀님! 언젠가 제가 일하고 있는 의상실도 한번 들러주시면 영광일 겁니다.”

리사는 자신이 푸른 리본 의상실이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며 언제 한번 꼭 찾아오라 말했다.

곁에서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안젤라가 ‘푸른 리본 의상실’이라는 단어에 크게 반응했다.

“정말? 당신이 ‘푸른 리본 의상실’의 디자이너라고?”

“아, 어디까지나 견습이지만요. 그래도 실력을 인정받아서 제법 많은 일을 전담하고 있습니다.”

리사는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었다.

“안젤라? 아는 의상실이야?”

레스티아가 묻자, 안젤라는 상기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럼! 당연하지. 푸른 리본 의상실은 엄청 유명한 곳인걸!”

의기소침해했던 안젤라의 눈빛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레스티아가 리사를 향해 물었다.

“리사. 혹시, 푸른 리본 의상실에서 성년식의 드레스를 맞출 수 있을까요?”

그 질문에 리사는 입을 쩍 벌리고 안젤라와 레스티아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네? 성년식 의상을 말입니까? 혹시, 아직 드레스를 맞추지 못하신 건가요?”

레스티아와 안젤라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리사는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으흠. 저희 의상실도 일이 넘쳐나는 상황이라…… 하지만, 베르체스터 공녀님은 제 은인이시니 제가 수석 디자이너님께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리사는 호기롭게 앞장섰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리사! 바빠 죽겠는데, 이렇게 꾸물거리면 어쩌자는 거야!”

푸른 리본 의상실에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수석 디자이너님. 죄송합니다.”

리사가 뻘뻘 땀을 흘리며, 품 안에 들고 있던 짐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수석 디자이너라 호명된 이는 잔뜩 화가 났는지, 리사가 내려놓은 짐꾸러미를 발로 차며 소리쳤다.

“이래서 못 배워먹은 고아 같은 걸 의상실에 들여서는 안 됐는데!”

리사는 상처가 될 만한 말을 들었음에도 익숙하다는 듯, 허허실실 웃어 보일 뿐이었다.

결국 뒤에서 보다 못한 레스티아가 앞으로 나섰다.

“리사는 우리를 이곳으로 안내하다가 늦은 것이니 화내지 말게.”

“맞아!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잖아!”

안젤라도 거들었다.

“어? 당신들은……? 손님이시군요!”

수석 디자이너는 안젤라와 레스티아를 보자마자 리사는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방긋방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성년식까지 드레스를 맞출 수 있느냐는 질문에 곧장 표정을 굳혔다.

“지금 드레스를 맞춘다니, 절대 불가능합니다. 기성품도 모두 팔린 상태인걸요.”

익숙한 거절이었기에, 레스티아와 안젤라는 납득하고 돌아섰다.

“어쩔 수 없지. 다른 의상실을 찾아볼 수밖에.”

“리사. 안내해줘서 고마웠어. 푸른 리본에는 다음에 오도록 할게.”

하지만 두 사람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듣게 된 수석 디자이너는 다른 말을 꺼내 들었다.

“귀족이시라면 방법이 있긴 하지요. 돈과 권력이 조금 드는 방법입니다만.”

유혹적인 제안에 안젤라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 돈은 달라는 대로 줄 수 있어!”

안젤라의 말에 수석 디자이너의 눈빛이 반들거렸다.

“미리 만들어 둔 드레스가 있기는 합니다. 그걸 숙녀님들의 사이즈에 맞춰 조금 고치는 것이지요.”

레스티아는 의문스러웠다.

미리 만들어둔 드레스를 고친다니. 기성품도 모두 팔린 상태라고 했으면서.

하지만 의문은 금방 풀렸다.

리사가 기겁하며 소리쳤기 때문이다.

“수석님! 설마, 미리 주문한 손님들의 드레스를 가로채서 판매하실 생각입니까? 그건 양쪽 모두에게 실례가 되는 행동입니다.”

그 말이 맞았는지, 수석 디자이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리사! 해고당하기 싫으면 조용히 있어! 귀족 나리들은 이런 식으로 드레스를 사가기도 한단 말이다!”

하지만 이미 안젤라와 레스티아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아차린 후였다.

“그런 것은 살 수 없어.”

아무리 드레스가 급하다고 해도, 누군가가 맞춘 드레스를 돈과 권력으로 억지로 빼앗는다는 것은 성년식을 맞이할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다.

수석 디자이너는 다른 귀족들은 그런 식으로 옷을 구매하곤 한다며 두 사람을 설득했으나, 레스티아와 안젤라는 미련 없이 푸른 리본 의상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리사가 뛰쳐나와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수석 디자이너님이 이렇게 무례한 제안을 하실 줄은 몰랐어요.”

“리사의 잘못이 아닌걸요. 그럼 다음에 봐요.”

레스티아가 리사를 독려하며 뒤돌아섰다.

그러자 리사는 무언가 결심한 듯 소리쳤다.

“공녀님! 주제넘은 말이지만, 제, 제게……, 공녀님을 위해 드레스를 만들 기회를 주실 수 있을까요?”

“리사가요?”

“못 미더우실지 몰라도, 의상실의 대부분의 옷들은 제 손을 거쳐 갑니다. 믿어주세요!”

레스티아와 안젤라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레스티아. 나는 좋은 것 같아. 너는 어때? 견습이라지만, 푸른 리본의 디자이너가 되는 건 어렵다고 들었어.”

“나도 좋아. 그럼, 촉박한 시간이지만 부탁해요.”

레스티아는 리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리사는 뛸 듯 기뻐하더니, 반나절 만에 스케치가 한가득 담긴 의상 책자를 들고 베르체스터 저택으로 찾아왔다.

“세상에. 너무 예쁘다! 정말 이걸 당신이 디자인한 거야?”

안젤라는 책자를 넘길 때마다 환호성을 내질렀다.

레스티아 역시 책자에 담긴 안젤라의 뛰어난 재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려서부터 준비해온 것들이에요.”

레스티아와 안젤라는 각자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드레스를 한 벌씩 골랐다.

“비용은 걱정하지 말고 작업해줘.”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야 영광이지요!”

안젤라의 말에 리사는 투지를 불태웠다.

레스티아는 투지에 불타오르는 리사에게 작은 상자를 하나 건넸다.

“피로를 해소해주는 마석이에요. 작업할 때, 이걸 품에 지니고 있으세요. 도움이 될 거예요.”

“이런 귀한걸……. 감사합니다!”

리사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어서 빨리 재료부터 구해야겠다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피로를 해소해주는 마석?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어.”

“응. 내가 만든 거야.”

안개 섬에서 공부할 때 만들어낸 마석중 하나였다.

자주 지치는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만들어 사용했는데, 제법 효과가 좋았다.

“정말? 레스티아가?”

안젤라가 놀란 듯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안젤라. 이제 네게 필요한 마석도 만들어볼 생각이야. 그래도 될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