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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74화 (74/132)

74화

수도의 항구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수십 명에 가까운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기사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부둣가에 나타나 진을 치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터를 휩쓸고 다니기로 유명한 이들이 왜 항구에 와있는 걸까.

그 의문스러운 모양새에 사람들은 잔뜩 숨을 죽인 채 머리를 맞대고 추리를 시작했다.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기사들이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이거 혹시, 해상전이라도 일어나려는 건가?”

“하하!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카티움 제국의 수도를 감히 누가 공격해 온다고.”

“그럼, 배를 타고 출정을 떠나려고 대기하는 것 아닐까?”

“에잉, 그렇다고 하기에는 공작가의 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는데?”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지만, 그 누구도 정확한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항구에 작은 범선 한 척이 들어섰다.

범선에는 베르체스터 공작가를 상징하는 황금 사자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범선이 닻을 내리고 완전히 정차하자,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큰 목소리로 경례를 올렸다.

“서북의 사자에게 충성을!”

그 엄청난 의전에, 계속해서 공작가의 기사들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아. 베르체스터 공작이 저 범선에 타고 있나 보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범선에서 내린 이는 예상 밖에도 수수한 차림새의 한 송이의 백합 같은 새하얀 소녀였다.

기사들은 이 소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유일한 레이디.

레스티아 베르체스터.

“세상에! 다들 잘 지냈어요?”

레스티아가 베르체스터의 기사들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어 보였다.

신비로운 은회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와 동시에 바닷가의 청명하고 눈부신 햇살이 느슨하게 땋아 내린 새하얀 머리카락에 닿아 찬란하게 부서져 내렸다.

미소 짓는 레스티아의 모습은 아름답기도 하고, 청량해 보이기도 했으며, 이지적으로 느껴졌다.

어렸을 때는 마냥 지켜줘야 할 것 같았던 꼬마 아가씨였는데, 이렇게 완연한 숙녀가 되어 돌아오다니.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기사들은 레스티아의 성장한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와! 아가씨! 정말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섭섭할 정도로 쑥쑥 크셨네요!”

레스티아의 호위 기사인 프랭커가 너스레를 떨며 레스티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엘리엇과 유이엘도 그 곁에 서 있었다.

“프랭커, 엘리엇, 유이엘!”

레스티아는 오랜만에 만난 제 호위 기사들에게 가감 없이 반가움을 표했다.

그들은 레스티아가 안개 섬으로 떠난 이후, 기사단 소속으로 복귀해서 지내온 상태였다.

안개 섬에서 출입을 허락한 것은 레스티아와 조엘과 마티어스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레스티아가 다시 이렇게 수도에 돌아왔으니, 그들의 소속은 자연스럽게 다시 레스티아 앞으로 이전되었다.

레스티아는 제 호위 기사들뿐 아니라 자신을 마중 나온 기사들 하나하나에게 모두 인사를 건넸다.

“다들 정말 오랜만이에요!”

하지만 인사를 건네다가 이내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고 질문했다.

“그런데 오늘 항구에 무슨 일이 있나요? 왜 다들 이렇게 나와 계신 거죠?”

처음에는 반가운 나머지 이상한 점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기사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왜 이렇게 많은 기사들이 항구에 나와 있는지 의문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질문에 프랭커가 사람 좋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공작님께서 황궁의 일로 마중을 못 나오는 대신, 저희에게 아가씨를 안전하게 저택까지 모셔오라 명하셨습니다.”

“아, 그랬군요.”

그제야, 레스티아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안전하게 저택으로 호위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제라르 오라버니도 참……. 이렇게까지 과보호하실 필요는 없는데.”

어렸을 때라면 모를까.

이제 레스티아는 아무것도 못 하던 11살짜리 소녀가 아니었다.

안개 섬에서 지낸 4년은 어린 소녀를 어른으로 만드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으니까.

그만큼 노력도 했고 말이다.

“제라르 오라버니는 역시 저를 못 미더워하고 계신 거겠죠.”

“아닙니다. 아가씨 못 미덥긴요. 동생이니까 그런 거지요. 아가씨께서 노인이 된다고 해도 공작님의 눈에는 어린 동생으로 보일 겁니다. 기본적으로 나이 차가 많지 않습니까?”

레스티아가 섭섭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프랭커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이 먹은 사람들 대부분이 ‘요즘 애들 못 믿는다.’라며 말하고 다니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니 너그럽게 이해해주세요.”

“하핫, 그런 거예요?”

레스티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자 기사들은 일제히 ‘그럼요. 저희도 그런걸요.’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렇게 레스티아는 베르체스터 공작가 기사들의 철벽같은 호위를 받으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헤일록! 도라! 다들 잘 지냈어요?”

레스티아는 곧바로 헤일록과 도라와도 재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헤일록은 주름이 조금 더 생겼으나 건강한 상태였고, 도라는 1년 전에 좋은 남자와 결혼을 해서 거처를 수도에 잡은 상태였다.

‘다행이야. 베르체스터는 크게 변한 게 없는 것 같아.’

레스티아는 4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한 공작가의 사람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피곤하시죠? 여독을 푸시는 게 좋겠어요.”

도라가 서둘러 레스티아를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방은 레스티아의 성장에 맞춰 이미 모든 가구가 바뀌어 있는 상태였다.

“어, 가구가 전부 바뀌었네요?”

“그럼요. 아가씨 키가 이제 제 키만 한 걸요. 예전에 쓰시던 가구는 너무 작아서 못 쓰세요.”

“하긴, 그렇죠?”

레스티아는 큼지막한 침대에 풀썩 앉아 주변을 살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변한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많은 것이 변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참, 아가씨. 마티어스 도련님과 조엘 도련님께서는 이틀 후에 도착하신다고 기별을 보내오셨습니다.”

도라가 침구를 정리해 주며 쌍둥이들의 소식을 알려왔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기에 레스티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아가씨. 한숨 주무세요.”

도라가 방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레스티아!”

순식간에 방문이 활짝 열리며 휠체어를 탄 소녀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안젤라가 레스티아가 수도로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것이었다.

“안젤라!”

레스티아는 피곤함도 잊고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서 안젤라에게 달려가 허리를 숙여 포옹했다.

“내 친구!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그러엄!”

안젤라도, 레스티아도 4년 전과 다르게 훌쩍 자란 상태였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4년 전에 헤어질 때, 다시 만나도 친하게 지내자는 약속을 지켜냈다.

곧바로 안젤라의 분홍색 눈동자에 눈물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흑. 이렇게 보니까 너무 좋다. 운이 좋게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지난 4년 동안 안젤라는 잠들었다, 깨어났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행히 몇 년 단위로 길게 잠들어 있지는 않았으나, 증상이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규칙하게 반복됐다.

그래서 안젤라는 수도로 돌아온다는 레스티아의 연락에도 만남을 선뜻 기약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레스티아가 수도로 돌아오기 이틀 전에 깨어난 상태였다.

“정말 다행이지. 레스티아와 함께 성년제에 참가할 수 있게 돼서 정말 기뻐.”

안젤라는 줄곧 자신은 성년제에서 축복도 못 받을지 모른다며 자조하고 있었다.

글라리엔 백작가의 사람이 성년제 때 깨어있을 확률은 반반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운이 좋게 레스티아가 돌아온 시기에, 딱 성년제에 맞춰서 깨어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도, 너랑 같이 성년제에 갈 수 있어서 정말 기뻐.”

레스티아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손수건을 꺼내 안젤라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도 잠시.

안젤라가 곧바로 심각한 표정으로 레스티아의 양손을 붙잡았다.

“그래서 말인데, 레스티아. 너, 성년제를 맞이할 준비는 끝난 거야?”

뜻밖의 말에 레스티아의 눈이 커졌다.

“준비?”

“응! 성년제에 입고 갈 드레스 말이야. 나는 맞추지 못해서 이제부터 찾아봐야 해. 못 갈 거라고 생각해서 미리 준비하지 못했어.”

“아.”

레스티아는 안젤라의 말을 이해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그냥 가지고 있는 드레스 중에 적당한 것을 입고 가려고 했는 걸.”

그러자 안젤라가 기가 막힌다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레스티아! 그게 무슨 소리야! 평범한 옷을 입고 성년제에 참석하겠다니!”

“응? 하지만 성년제는 그냥 어른이 된 것을 축복받는 날이잖아?”

“그냥 축복받는 날이 아니야, 레스티아. 성년제에 입는 옷에 담긴 의미가 얼마나 큰 건데!”

안젤라는 곧장 레스티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지금 당장 성년제에 맞춰 우리 두 사람 몫의 드레스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의상실을 찾아야 해! 일주일도 안 남았단 말이야!”

레스티아는 여독을 풀 새도 없이 안젤라의 손에 이끌려서 의상실이 잔뜩 늘어선 거리로 향해야 했다.

* * *

의상실이 위치한 거리는 정신이 없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성년이 된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년을 맞이하는 이들은 모두 새로 옷을 해 입고 신전의 축복을 받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과 비슷한 의미였다.

그 의미 탓일까.

모두가 성년을 맞이한 자신의 미래가 부디 찬란하기를 바라며 옷에 돈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수도에 있는 의상실들에게 있어 이 성년제 시즌은 그야말로 대목이었다.

하지만 안젤라와 레스티아는 들어가는 의상실마다 거절당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드레스가 없습니다. 다 팔렸는걸요.”

“어머, 이제 와서 드레스를 맞추시겠다고요? 그것도 두 벌이나. 적어도 두 달 전에는 예약하셨어야 해요.”

의상실 직원들은 성년제가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이 시점에 드레스를 구하는 것은 무리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제 보니 의상실이 북적거리는 이유도 마지막 가봉을 끝내기 위해 방문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아, 어쩌지. 어떡해. 흑……. 성년제에 맞춰서 깨어난 건 정말 좋았는데, 이렇게 엉망이 되어버리다니.”

안젤라의 얼굴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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