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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72화 (72/132)

72화

레스티아는 다음 날부터 리시언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고저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집사 헤일록에게 “앞으로 리시언 님이 저택으로 돌아왔는지는 확인할 필요 없어요.”라고 짧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창밖을 쳐다보지도 않고, 리시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정해진 공부를 하고, 제시간에 아침 식사를 하고, 안젤라와 만나 도란도란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더 부자연스러웠기에, 조엘과 마티어스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만 같았다.

“형! 리시언이 제대로 이야기하고 간 것 맞아?”

“형님. 확실히 레스티아의 행동이 이상합니다. 사실을 알았으면 무어라고 말을 꺼내야 정상인 것 아닙니까.”

아침부터 제라르의 집무실로 달려간 조엘과 마티어스가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하지만 제라르는 검토하던 서류뭉치에서 시선을 떼어 내지 않고 무뚝뚝하게 답했다.

“리시언이 레스티아의 방으로 들어간 건 너희들이 직접 확인하지 않았나.”

그랬다.

지난날, 제라르는 쌍둥이들에게 리시언이 레스티아를 밤늦게 방문할 것임을 알렸다.

그러자 쌍둥이들은 동시에 펄쩍 뛰었다.

-형님. 리시언이 그렇게 늦은 시간에 레스티아를 만나러 오기로 했단 말입니까?

-형! 그래도 그렇지. 새카만 사내자식을 야밤에 리티랑 단둘이 두면 안 되지!

두 사람의 반응에 제라르는 인상을 구겼다.

-왜 안 되지? 둘은 지난 1년간 줄곧 붙어 지냈다.

-그건, 그렇지만.

-…….

쌍둥이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제라르의 말대로 리시언과 레스티아는 단둘이 베르체스터 성에서 지내온 것이 맞으니까.

하지만 그때에는 레스티아가 유독 리시언을 따랐기에 질투가 났을 뿐, 이렇게까지 적개심이 생기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렇게 리시언의 신분이 밝혀지고, 진짜 친동생이 아니라는 것이 사실화가 되고 나니 레스티아의 곁에 두어선 안 될 사내놈으로 보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쌍둥이들은 레스티아 몰래 호위 기사들과 함께 방문 앞을 지켰다.

제라르도 묵인했고 말이다.

-도련님들? 왜 여기에…….

세 명의 호위 기사들은 눈을 끔벅이며 조엘과 마티어스를 바라봤다.

-쉿! 조용히 해.

-우리가 오늘 여기 온 건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다.

그리하여 레스티아의 호위 기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날카롭게 날이 선 쌍둥이들과 함께 호위 임무를 진행해야 했다.

-조엘! 방금 창문 닫는 소리 들었어?

-쉿. 조용히. 나도 들었으니까.

마침내 리시언이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쌍둥이들은 최대한 숨을 죽이고 대화를 엿들었다.

하지만.

-조엘. 두 사람이 말하는 목소리 들려?

-이런, 빗소리 때문에 전혀 안 들리는걸.

불행히도 무섭도록 쏟아진 빗줄기 탓에 엿듣기는 실패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조엘과 마티어스는 줄곧 좌불안석 상태였다.

“아, 미치겠다. 리티가 리시언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형님. 이대로 모르카티움 제국을 떠나도 되는 겁니까? 레스티아가 걱정스럽습니다.”

“…….”

제라르는 결국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볼 수밖에 없겠군.”

결국,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리시언에게 떠넘겼던 이야기를 레스티아에게 직접 말하기로 결정했다.

이전에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이미 리시언이 운을 뗀 후라고 생각하니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 사람은 레스티아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 시간까지 기다렸다.

먼저 식사를 하고.

후식을 다 먹은 후에.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이것이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세운 완벽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후식을 먹을 차례가 되었을 때, 뜻밖에도 레스티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라버니들. 어제 리시언 님이 다녀가셨어요.”

세 형제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레스티아가 먼저 말을 꺼낼 것이라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담담하게 눈앞의 과일 셔벗을 한 숟갈 떠서 입속에 넣고는 물었다.

“제라르 오라버니. 출국일은 언제인가요?”

“……이틀 후다.”

갑작스럽고 촉박한 일정이었으나, 레스티아는 여전히 담담함을 유지했다.

“모르카티움 제국에는 언제 돌아오나요?”

“그건 확정 지을 수 없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 반응에 마티어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쏟아 냈다.

“리티. 충격받았어? 멋대로 결정해서 미안해. 그게 말이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하지만 레스티아는 고개를 젓고는 해맑게 웃어 보였다.

“설명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다 들었는걸요. 어쩔 수 없는 일에 투정부리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

레스티아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해요. 먼저 일어설게요. 떠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준비해야 할 게 많을 것 같아요.”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멍하니 식당 밖으로 나가는 레스티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줄곧 레스티아의 슬픈 표정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웃는 표정이 이렇게 마음을 아릿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 * *

저녁 식사 후 레스티아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리시언의 말을 곱씹었다.

-약속할 수는 없지만, 만회해볼게.

무엇을 만회하겠다는 걸까.

이미 곁에 있을 수 없게 되어 버렸는데.

하지만 더 이상 투정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리시언에게 투정을 부리듯 나쁘다고 뱉어냈던 말이 계속 신경 쓰였다.

더 좋은 말을 했어야 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이해한다고, 괜찮다고.

그런 말을 했어야 했다.

적어도 리시언이 레스티아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처럼 잘 지내라는 말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것도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되었다.

‘분명, 창문으로 만나러 온 이유가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지.’

그렇다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었다.

그것을 먼저 헤아렸어야 했는데, 당장 예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말에 경솔한 감정을 내비친 것만 같았다.

‘나, 왜 이렇게 어리고 미숙한 걸까.’

나이를 먹으면 더 현명해질 수 있는 걸까.

레스티아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틀 후에 떠나려면 짐 정리를 우선시해야 했다.

레스티아는 제일 먼저 책상을 정리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은 모두 거기에 있었으니까.

‘어, 이건.’

정리하던 중,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리시언이 읽던 책이었다.

어려운 내용이라 레스티아가 언젠가의 목표로 두었었던 그 책.

레스티아는 오랜만에 그 책을 꺼내 펼쳐 보았다.

그러자 책의 맨 첫 장에서 꾸깃꾸깃한 편지봉투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일전에 리시언이 레스티아에게 전해줬던 답장이었다.

-넌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 사실을 내게 굳이 인정받으려고 할 필요 없어.

“…….”

레스티아는 그 내용을 다시 한번 읽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과거에 쓰여진 편지인데.

이상하게도 이 안에 담긴 내용은 지금의 레스티아에게 꼭 필요한 조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맞아요. 리시언 님께 굳이 인정받을 필요 없는 것들이네요.”

그러니까.

리시언이 지킬 수 없다고 했던 약속.

그 약속을 레스티아는 지켜 낼 것이다.

원래 목적은 리시언을 곁에 두기 위해서 했던 약속들이었으나, 이미 그것들은 그 자체로 레스티아의 목표가 된 지 오래였다.

“그러니까. 제가 그 약속을 지켜 보일 수 있을 때까지 잘 지내야 해요.”

레스티아는 그렇게 말하며 편지를 다시 책 속으로 갈무리해 넣었다.

* * *

이틀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리티! 준비 끝났어?”

“레스티아. 이제 출발할까?”

“네! 저는 준비 끝났어요!”

레스티아는 모르카티움 제국을 떠나기 전에 앞서, 이제 언제 돌아올지 확신할 수 없는 베르체스터 저택을 눈에 담았다.

오랫동안 머문 곳이 아님에도 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란 게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레스티아! 정말로 가는 거야?”

안젤라가 레스티아를 배웅하기 위해 찾아왔다.

레스티아는 자신을 찾아온 안젤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눈가는 엉망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예쁜 분홍색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뭐야, 안젤라. 웃으면서 헤어지기로 했었잖아. 왜 울어.”

레스티아는 손수건을 꺼내 안젤라의 눈물을 닦아 냈다.

하지만 안젤라는 더 서럽게 울었다.

“흐끅…… 그치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걸. 나, 또 잠들면 레스티아랑 멀어질까 봐 너무 무서워.”

“뭐야, 안젤라. 너랑 멀어질까 봐 무서운 건 나도 마찬가지야.”

레스티아는 허리를 숙여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안젤라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우리 덜 무서워하자. 몇 년의 시간이 지나도 멀어지지 않기로 해.”

“흑……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당연하지. 너는 내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인걸.”

“레스티아…… 으아아앙!”

첫 친구라는 말 때문인지, 멀어지지 않을 거라는 약속 덕분인지 안젤라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응. 안젤라야말로 나중에 나, 모른 척하면 안 돼?”

“그럴 리 없어!”

안젤라는 한참 동안 포옹을 나눈 후에야 웃으면서 레스티아를 배웅해주었다.

“조심히 다녀와. 레스티아.”

“응 안젤라. 너도 건강하게 잘 있어야 해.”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티어스가 안젤라의 퉁퉁 부어 버린 눈을 놀렸다.

“꼬맹이. 너, 울다가 웃으니까 더 못생겼다.”

안젤라는 씩씩거리며 “조엘 오라버니가 가시는 건 슬프지만, 마티어스 오라버니가 가는 건 너무 좋네요!”라고 소리쳤다.

그것을 끝으로 레스티아는 조엘과 마티어스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제라르 오라버니.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제라르는 짧게 인사를 하고는 세 사람이 탄 마차가 베르체스터 저택을 벗어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후, 마차는 예정대로 항구에 도착했다.

레스티아는 조엘과 마티어스와 함께 범선 위에 올라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슬쩍 돌려 수도를 한번 바라봤다.

“…….”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리시언이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리시언을 발견하지는 못하고 돌아섰다.

리시언은 그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다.

레스티아가 지금 자신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대로 달려가서 가지 말라고 할 것만 같았다.

‘지금은 보내줘야 해. 하지만, 다시 돌아오면. 그때는…….’

리시언은 자신이 어린 시절에 날렸던 풍등은 바다의 신이 받지 못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욕심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 않은가.

어느새 레스티아가 탄 범선은 짙푸른 지평선 너머로 점이 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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