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너……. 여긴 바다도 없는데, 왜 창밖을 보고 있어?”
리시언은 레스티아와 정면으로 마주하고는 멋쩍은 듯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러고는 곧장 열고 들어온 창을 닫았다.
그러자 빗방울이 다시 창문을 거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모습이 의아했다.
바깥에는 무서울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 리시언의 몸은 조금도 비에 젖은 흔적이 없었다.
게다가.
“리시언 님이야말로 왜 문을 놔두고 창문으로 들어오신 거예요?”
레스티아의 방은 3층인데 어떻게 들어 온 건지 싶었다.
모두 속성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결과였으나 레스티아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하지만 리시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몰래 와야 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문으로 들어오면 보는 사람이 늘어나니까.”
집에 들어오는데 몰래 들어 와야 한다니.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레스티아는 곧바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네? 왜 몰래 들어오셔야 하는데요?”
그러나 리시언은 대답 대신 성큼성큼 걸어서 방 중앙에 있는 소파에 풀썩 앉았다.
그러고는 레스티아를 향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리 와. 레스티아. 오랜만이네.”
그 모습이 영 못마땅했지만, 레스티아는 리시언이 원하는 대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밝은 곳에서 다시 본 리시언은 그 사이에 조금 살이 빠진 건지 이목구비가 더욱 뚜렷해 보였다.
그 탓에 짙은 눈썹 아래에 자리 잡은 황금색 눈동자가 더욱 선명해 보였고, 오똑한 콧날과 오만해 보이는 입매는 특유의 맹수 같은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항상 리시언의 주변을 은은하게 뒤덮고 있던 음울한 기운이 많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대체 집에 안 들어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많았지만, 레스티아는 제일 먼저 불만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리시언 님. 정말 너무해요. 왜 말도 없이 집에 안 들어오신 거예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딴에는 제법 무게를 잡고 화를 낸 것이었다.
하지만 리시언은 레스티아가 자신을 걱정했다는 말에 또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말았다.
“그랬어?”
그 대답에 레스티아의 양쪽 볼이 곧바로 통통하게 부풀었다.
“‘그랬어?’라니요. 같이 조엘 오라버니와 마티어스 오라버니의 졸업식에 가기로 했던 것 잊으셨어요? 결국 못 갔잖아요.”
“아…… 그랬지.”
그것은 리시언이 마지막으로 이행하기로 했던 오빠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게다가 키시어스 대공이 뜬금없이 아카데미 졸업식에 나타나는 것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위험한 일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리시언은 당연히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레스티아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정말 아무 말도 안 했다니.
심지어 레스티아가 이렇게 속상해하고 있었을 줄 몰랐기에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다.
그래서 어두운 표정으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해.”
“네?”
그러자 레스티아는 되레 당황했다.
어둡게 가라앉은 리시언의 표정은 레스티아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재빨리 용서해버리고 말았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대신 제라르 오라버니께서 오셨어요. 그냥 리시언 님이 같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
“그래…….”
레스티아가 용서를 했음에도 리시언의 표정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레스티아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참!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레스티아는 재빨리 미리 만들어두었던 마석을 꺼내 리시언의 눈앞에 내보였다.
“이건……?”
“신기하죠? 제가 만든 마석이에요!”
몰라볼 수 없었다.
레스티아가 저것을 처음 만들어내는 순간을 리시언이 곁에서 지켜보았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레스티아는 잔뜩 들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카트리나 님이 그러셨는데, 조금만 응용하면 마력 중화석을 만들 수 있대요!”
재잘거리며 자랑하는 목소리와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귀여웠다.
그래서 리시언은 입가에 짙은 호선을 그으며 레스티아가 만든 마석을 처음 보는 것인 양 칭찬의 말을 꺼내 들었다.
“정말 대단한걸.”
레스티아의 볼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줄곧 리시언이 이 마석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근사하게 웃어 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그렇죠?”
“그래, 정말 대단해.”
리시언은 레스티아가 만든 마석을 잠시 동안 가만히 내려다봤다.
역시, 이 아이를 모르카티움 제국에 두는 것은 옳지 않았다.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 들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활짝 웃는 레스티아를 보자 말문이 막혔다.
오랜만에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즐거웠는데, 제 입으로 이별을 말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될 줄 몰랐다.
베르체스터의 형제들이 왜 레스티아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는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알 것만 같았다.
이렇게 활짝 웃는 표정에 조금의 그늘도 만들어내고 싶지 않았겠지.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미안한 일이 더 생길 것이다.
영원히 속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까.
리시언은 조금 생각을 고르다가 운을 뗐다.
“레스티아. 마도서에 대해 더 배우고 싶지 않아?”
레스티아는 곧장 대답했다.
“네! 배우고 싶어요! 알수록 재미있고 신기한 것 같아요.”
경쾌하고 밝은 대답이 듣기 좋았다.
“그래서 말인데…… 한동안 모르카티움 제국 밖으로 나가 있는 게 좋겠어.”
“네?”
뜻밖의 제안에 레스티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운을 뗀 이상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네가 마도서에 대해 더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있어. 제라르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거야.”
레스티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건 싫어요. 공부가 좋아도, 오라버니들이랑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은걸요.”
“걱정 마. 조엘과 마티어스도 같이 갈 거야. 제라르도 자주 찾아갈 거고.”
그러나 레스티아는 그 말에 리시언이 빠져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리시언 님은요?”
리시언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나는 못 가.”
“왜요?”
그 질문 덕분에 자연스럽게 진실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네 오빠가 아니니까.”
그 대답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쏴아아-
빗줄기는 아까 전보다 더 거세져서 방 안에서도 너무나도 잘 들렸다.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잘게 떨리는 은회색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쩐지 죄책감이 들어서 그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꺼낸 이상 마무리를 해야 했다.
그래서 먼저 침묵을 깼다.
“레스티아. 나는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사람이 아니야. 진작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알고 있었어요.”
“뭐?”
“리시언 님이 다른 오라버니들과 같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는걸요.”
레스티아의 뜻밖에 말에 리시언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그걸, 네가 어떻게?”
“제 눈에는 리시언 님의 눈동자가 예쁜 황금색으로 보여요. 게다가 느껴지는 마력도 베르체스터의 것이 아닌걸요.”
이미 리시언이 친오라버니가 아니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변화가 무서웠다.
그래서 궁금해도 모르는 척해온 1년이었다.
리시언이 무엇이든, 레스티아는 상관없었다.
그냥 곁에 있는 것이 좋았기에 침묵하고,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절로 원망의 말이 쏟아졌다.
“여태까지 잘 숨겨오셨잖아요. 왜 갑자기 말하기로 결정하신 거예요?”
리시언은 말문이 막혀서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오래 곁에 있었는데, 레스티아가 카트리나처럼 마력의 본질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빠르게 리시언의 상황을 유추해냈다.
“이제 숨길 필요가 없어진 거로군요. 혹시, 수도에 나타난 황족이 리시언 님과 관련이 있나요?”
“…….”
리시언은 그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군요.”
레스티아는 애써 밝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죠? 그렇죠?”
걱정이 가득 담긴,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저절로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하지만 리시언은 이번만큼은 단호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많이 달라질 거야.”
이제 리시언은 베르체스터로 살 수 없으니 말이다.
“…….”
레스티아는 입고 있던 가디건의 앞섶을 꾹 움켜쥐고 여미었다.
비가 내리는 탓인지, 아니면 리시언의 칼 같은 대답 때문인지.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온몸이 으슬으슬할 정도로 차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금한 것을 묻기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베르체스터 공작가에서 지내지 않으시나요?”
“……그래.”
“……그럼, 앞으로는 저랑 함께 책을 읽을 일도, 산책할 일도, 같이 식사를 할 일도 없나요?”
레스티아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지고 잘게 떨렸다.
리시언은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 하나 약속할 수 없었다.
주변의 모든 상황을 안전한 궤도 위에 올려놓을 때까지 레스티아를 위험에 노출시킬 수 없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아주 만일의 경우, 리시언이 패배했을 때도 고려해야 했다.
그래서.
“……그건, 약속할 수 없어.”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
리시언의 말에 레스티아의 눈에 곧바로 투명한 눈물방울이 맺혔다.
하지만 그것을 흘러내리게 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럼 저랑 하기로 했던 것들은요?”
두 사람 사이에는 여러 가지 약속이 있었다.
레스티아가 해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리시언이 오래오래 곁을 떠나지 못할 약속.
하지만 지금 와서는 모든 것이 불투명해져 버렸다.
리시언은 이것 또한 단호하게 답했다.
“미안, 약속할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어.”
레스티아가 눈물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정말 나빴어요.“
그 대답을 듣는 것을 끝으로 리시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히 한번 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이 자리에 와서, 레스티아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약속은 못 하지만, 만회해 볼게.”
리시언은 이제부터 뒤틀려서 이상하게 꼬여버린 레스티아와의 관계를 최선을 다해 만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승자가 되어야 한다.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해.”
리시언은 그 인사말을 끝으로 레스티아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처음 방안에 들어섰던 길로 곧장 돌아 나갔다.
“리시언 님, 잠시만요!”
레스티아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리시언은 어느새 창문을 열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레스티아는 서둘러 테라스로 달려갔다.
비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리시언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