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황손으로 인정받게 된 리시언은 정신없이 바쁜 일과를 보내야 했다.
그동안 계획했던 일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 탓에 수하들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할 필요도 있었고, 새롭게 상속받게 된 남부의 영지를 관리할 필요도 있었다.
조모가 살아 있을 때부터 영지를 관리하고 있던 가신들은 그들보다 나이가 까마득하게 어린 새 주군을 못 미더워했기에, 별도의 설득과 숙청도 감행해야 했다.
게다가 거의 매일 밤 암살자들이 찾아왔다.
“……지치지도 않나.”
리시언은 황궁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향해 비수를 날린 암살자들을 검으로 베어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암살자들은 암살에 실패하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 덕에 리시언은 이들이 황후가 보내온 자들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대공 전하. 역시 황궁에 기거하시는 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수도에 별도의 거처를 알아보심이 어떠하십니까.”
리시언의 곁을 지키고 있던 수하 하나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경비를 강화해도 황궁에서 발휘되는 황후의 막강한 영향력을 전부 차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됐어. 이 정도에 도망칠 생각은 없으니까.”
황제가 리시언의 거처를 황궁 안에 마련해 준 것은 분명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피할 생각은 없었다.
리시언은 뽑아 들었던 검을 다시 검집 안으로 갈무리해 넣었다.
그러자 검 손잡이에 매달린 소드 노트가 가볍게 흔들렸다.
일전에 망가졌던 소드 노트를 새 가죽에 덧대 기워 넣은 것이었다.
수하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국의 황족이자 대공의 검을 장식하기에는 지나치도록 남루한 물건이지 않은가.
“전하. 새 소드 노트를 가지고 오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지금 사용하고 계신 것은 무척이나 많이 낡아 보입니다.”
“아니, 이것 말고는 필요 없어.”
리시언이 딱 잘라 거절했다.
그리고 물끄러미 소드 노트를 내려다봤다.
이것을 선물해주었던 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했다.
레스티아에 대한 이야기는 우연히 황궁에서 마주친 카트리나로부터 건강히 잘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것이 전부였다.
당장이라도 베르체스터 저택으로 가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어차피 모르카티움 제국에 남기로 했으니 이제 굳이 거리를 둬야 하는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선뜻 찾아갈 수 없었다.
지금 리시언은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었다.
잘못해서 레스티아가 자기와 연루되기라도 하면, 레스티아에게 피곤한 일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조금 더 상황이 안정되면.
아무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되면.
그때는 스스럼없이 가까이 다가가서 곁에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과는 다르게.
“…….”
리시언은 그렇게 생각하며 엄지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소드 노트를 한번 쓸어내렸다.
갑작스럽게 베르체스터 저택을 나온 탓에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이 이것뿐인 것이 어쩐지 아쉽게 느껴졌다.
“대공 전하. 응접실에 손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념에 잠긴 리시언의 곁으로 시종이 다가와 말을 전했다.
“그래, 가지.”
리시언은 응접실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을 방문한 손님과 눈을 마주치고는 익숙한 자세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였다.
“어서 와. 제라르.”
응접실에 앉아서 리시언을 기다리고 있던 제라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리시언을 바라보며 주먹을 쥔 손을 심장이 위치한 왼쪽 가슴에 느릿하게 가져다 대며 허리를 숙였다.
“키시어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제라르가 황족에게 예를 갖추는 방식으로 인사를 건네자, 리시언은 곧바로 미간을 좁혔다.
“그런 인사는 그만둬. 불편하니까.”
“그러지.”
리시언의 말에 제라르는 곧장 허리를 세우고 리시언이 익숙히 알고 있는 제라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시언. 이번 일로 베르체스터가 너에게 빚을 졌군.”
제라르는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수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엘과 마티어스에게 이미 전후 상황을 모두 들은 상태였다.
“네가 베르체스터 공작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
“조만간 모르카티움 제국을 떠날 예정이지 않았던가.”
제라르의 말에서 의문과 질책이 함께 느껴지는 것 같아서, 리시언은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생각이 바뀌었을 뿐이야.”
그 대답에 제라르가 시리도록 푸른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혔다.
그리고 특유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해볼 마음이 든 모양이군.”
“…….”
리시언은 제라르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베르체스터 공작가는 너를 다음 황제로 지지할 생각이다. 키시어스 대공.”
호칭만 바뀌었지 무엇 하나 변함이 없는 제라르의 태도에 리시언은 속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절하지는 않겠어.”
리시언과 제라르는 응접실에 앉아 정세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살아 있다는 건 알고 있나?”
“그래. 수상한 일이야.”
한동안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나지 않던 황태자가 얼마 전, 황립 아카데미 졸업식이 있던 날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 황후가 황태자가 살아 있다고 주장할 때에는 괜히 객기를 부리며 뻗대는 것이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분명 숨이 멎은 것을 확인했는데 말이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그렇다고 말했지만, 천성은 숨길 수 없는 법인데 말이다.”
“황후가 무언가 수를 쓴 것이겠지. 황태자는 머저리지만, 황후는 아니니까.”
“역시, 마법인가.”
리시언과 제라르는 동시에 인상을 와락 구겼다.
죽은 자를 살리는 마법이라.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온갖 기이한 마법을 연구하는 황실이 아니던가.
리시언은 관자놀이를 검지 끝으로 꾹 눌렀다.
어떤 마법인지 파악하고 싶었으나 황제는 리시언에게 황가의 마법 연구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내어주지 않았다.
“영지의 일이 정리되는 대로 무슨 짓을 벌인 건지 확인해 봐야겠어.”
“이쪽도 알아보도록 하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를 한참.
제라르가 먼저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당분간 동생들을 모두 모르카티움 제국 밖으로 보내둘 생각이다.”
그 말에 리시언의 눈이 커졌다.
“제국 밖으로?”
“그래. 황후가 동생들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세가 안정될 동안은 해외에 있는 것이 좋을 거라 판단했다. 조엘과 마티어스도 졸업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지.”
“…….”
리시언은 잠깐 말을 잃어버린 채 멍하니 제라르를 바라봤다.
레스티아가 모르카티움 제국 밖으로 떠난다니.
항상 자신이 떠날 것이라 생각했지, 레스티아가 떠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당혹스럽기만 했다.
“……어디로 보낼 생각이야?”
“일전에 네가 알려주었던 ‘진실의 계승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보게 할 생각이다. 레스티아에게도 그것이 좋겠지.”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지금 제라르의 판단은 적절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곳에 보내는 것은 레스티아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갈수록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한 레스티아를 모르카티움 제국에 두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애써 뻣뻣하게 굳은 혀를 움직여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리시언은 그 마음이 왜 생겨난 것인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서 괴롭기만 했다.
그런데 제라르가 뜻밖의 말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네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다.”
“부탁?”
“……네가 레스티아를 만나서 이 상황을 설명해주었으면 한다.”
“설명? 그게 무슨 말이야?”
제라르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레스티아에게 아직 네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리시언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뭐라고?”
“레스티아는 그냥 네가 잠깐 자리를 비운 것으로 알고 있다.”
레스티아는 리시언이 키시어스 대공이 된 사실도, 이제 베르체스터 저택에 돌아갈 일이 없다는 사실도 모두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말을 꺼내기가 어렵더군. 네가 베르체스터 저택에서 떠난 이후부터 표정이 무척 어두워서 말이야.”
“뭐가 어렵다는 거야. 그냥 설명하면 되잖아.”
제라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말재주가 없으니 말이다.”
제라르는 가뜩이나 우울한 상태인 레스티아를 자신이 더 우울하게 만들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리시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독선적인 성격의 제라르가 이렇게 말을 가리는 사람이 될 거라고는 1년 전까지만 해도 생각지 못했다.
“그럼, 조엘과 마티어스에게 시키면 되잖아.”
“……조엘과 마티어스도 어려워하고 있다.”
베르체스터 형제들은 ‘누가 레스티아의 우울한 표정을 마주하고 사실을 말한 후에 더 우울하게 만들 것인가.’로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었다.
“순 바보들 아니야? 그게 뭐가 어렵다고.”
“…….”
제라르는 리시언의 빈정거림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반대로 리시언의 입가에는 작게 미소가 피어났다.
이상하게도 방금 전까지 답답하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레스티아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그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붕 떠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쩐지 바보같이 느껴졌다.
줄곧 만나보고 싶었으나, 레스티아를 걱정하는 마음에 참아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만날 기회가 생겼다는 말에 이리도 기뻐하다니.
역시 자제해야 할까.
하지만 그 레스티아가 곧 모르카티움 제국 밖으로 떠난다.
앞으로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한다면 이것이 레스티아를 만날 유일한 기회였다.
놓칠 수 없었다.
하지만 애써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래. 설명하는 것 정도야. 그럼 오늘 밤에 레스티아의 방으로 가지.”
그 말에 제라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밤에, 방으로 말인가?”
“그래. 몰래 가는 게 좋을 테니까. 레스티아가 나와 어떤 접점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위험하다는 것. 너도 알고 있잖아?”
“……알고 있다.”
하지만 제라르는 고민스러웠다.
여동생의 방에 밤늦게 남자가 남모르게 찾아오겠다고 말하는 것을 허락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 말이다.
하지만 필요악이었다.
게다가 리시언은 지난 1년간 레스티아의 곁에 줄곧 있었지 않았던가.
심지어 리시언을 곁에 붙여 두었던 것은 제라르였다.
이제 와서 내외하라 명하는 것도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알겠다.”
제라르는 마지못해 리시언의 말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