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리시언은 황제의 도발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담담함을 유지했다.
어머니가 살아생전에 황제와 지속해서 마찰을 빚어 왔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동안 록산느 황녀로부터 황족의 권한을 몰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록산느가 황후에게 목숨을 잃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황녀의 아들인 리시언 역시 황족으로서의 권한을 잃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왜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어투로 대답했다.
“저는 황제 폐하의 손자입니다. 황손이 황궁에 찾아온 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주제에 황손이라는 것이냐.”
말은 살벌하게 했으나, 황제는 리시언의 모습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열이 가장 낮은 황자로 태어났다.
계승권에서 가장 멀었으나 줄곧 자신이 황제가 될 것이라 여겼다.
그 희망을 잃지 않게 한 것은 서열이 가장 멀다고 하여도 자신은 황족의 핏줄이며, 개중 가장 뛰어난 이는 자신이라는 신념 하나뿐이었다.
황제의 눈에 지금 리시언은 젊은 시절의 자신과 같은 이유로 황좌를 노리고 나타난 황손으로 보였다.
오만불손하게도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황태자궁을 반파시키며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것이 황제의 마음에 아릿한 옛 시절에 대한 향수를 일으켰다.
확실히 지금의 자신은 너무 늙었고, 감상적이었다.
황제는 애써 입매를 삐뚜름하게 말아 내렸다.
“당돌하구나. 짐이 너를 황손으로 인정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그 말에 리시언은 또렷한 눈빛으로 황제를 응시했다.
“인정하지 않으셨다면, 벌써 제게 죄를 물으셨을 겁니다.”
그 대답에 결국 황제는 끌끌거리며 낮게 웃었다.
하긴, 록산느의 아들이라 인정하지도 않았다면 이렇게 만나지도 않고 황족 시해 죄로 제거하라 명했을 것이었다.
황제는 이 건방진 손자를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제 어미처럼 황후의 손에 죽을 것인지, 아니면 자신처럼 악착같이 살아남아 뛰어난 황손임을 증명할 것인지가 궁금했다.
비록 늙고 연로한 몸이지만, 아직 정신은 또렷하니 그것을 즐겁게 지켜볼 시간 정도는 남아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명했다.
“좋다. 리시언. 네 생각이 그렇다면 이제부터 너 스스로 황족임을 증명해 보이거라.”
리시언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황제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순간, 기나긴 숨바꼭질은 끝났다.
이제 술래가 누가 될지 다시 정해야 할 차례였다.
얼마 후, 황제는 리시언에게 첫 번째 황후가 록산느 황녀를 위해 유산으로 남겨둔 남부지대의 영지를 넘기고 대공의 작위를 하사했다.
그뿐만 아니라 친히 황궁에 있는 궁 하나를 리시언의 거처로 내어주었다.
리시언은 키시어스 대공이라 불리게 되었고, 제2 황위 계승권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 * *
“아하핫! 키시어스 대공이라고?”
황제가 리시언을 황족으로 인정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황후는 손에 쥐고 있던 글라스에 담긴 독주를 입안으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만취한 듯 새빨갛게 변해있었고, 항상 자로 재단하듯 단정하고 깔끔하게 유지했던 차림새는 온데간데없이 엉망이 되어있었다.
황후는 며칠째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독주만 들이키고 있었다.
황제가 황태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 대체재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아하…… 하하. 그래.”
황후는 실성한 듯 히쭉히쭉 웃다가 무언가를 떠올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여봐라. 가서, 세이튼 온리드라스를 불러오거라.”
황후의 명이 떨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세이튼이 나타나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세이튼은 주황색 눈동자를 슬쩍 굴려 물끄러미 황후의 주변을 바라봤다.
우아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 위에 빈 술병이 발 디딜 틈 없이 나뒹굴고 있는 것이 생경한 풍경이었다.
“왔는가. 온리드라스 경.”
세이튼의 얼굴을 확인한 황후가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묻겠다. 어째서 황태자를 해한 그 불경한 자의 목을 치지 않았는가?”
세이튼은 황후가 말한 불경한 자가 리시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곧장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황실 기사 단장께서 그자를 알아보고는 검을 치우라 명했습니다. 저는 황실 기사단으로서 황족에게 검을 들어서는 안 되는 위치이기에…….”
챙그랑.
황후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바닥으로 내던지며 세이튼의 말을 끊었다.
“방금, 황족이라고 하였는가.”
그와 동시에 세이튼의 목에 있던 가죽 목걸이가 순식간에 그의 목을 조여왔다.
“크윽.”
세이튼은 극심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쓰러졌다.
“온리드라스 경. 그대가 모셔야 할 황족은 그자가 아님을 명심하는 것이 좋겠군.”
“……화, 황후 폐하.”
“온리드라스 가문은 광기를 통제하지 못해 평생 변방에서 마수나 잡으러 다녀야 하는 운명이지.”
“허억…….”
“잊었는가. 그런 그대에게 광기를 통제하게 하는 마도구를 주고 황실 기사라는 명예를 얻을 기회를 준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을.”
“잊, 지…… 않았습니다. 송구합니다.”
“그대의 숙부인 브리엔처럼 날뛰다 죽을 생각이라면 말하게.”
“아, 아닙니다. 크흑.”
세이튼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도록 놔두기를 잠시.
황후가 다시 우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베르체스터 영애의 행방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았나?”
“쿠, 쿨럭. 예. 하지만…….”
세이튼이 기침을 내뱉고는 대답했다.
“황태자궁의 그 누구도 베르체스터 영애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목격한 이가 전혀 없다고?”
“예.”
황후는 인상을 찌푸렸다.
목격자는 에리히엔뿐이었는데, 그는 이미 어떤 증언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그럴 리가. 그 어린애가 혼자 힘으로 황궁을 빠져나갔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베르체스터 공작가도 키시어스 대공도 분명 전부 한통속인 것이 분명해.”
“송구합니다. 허나 그날 밤, 베르체스터 영애는 공식적으로 저택으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기에 더 이상은 추적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이튼의 보고에 황후의 창백한 이마에 핏대가 돋아났다.
자신이 결정했던 일이 되려 자신의 발목을 잡아끌 줄이야.
이제 모르카티움 제국에 적수가 남아 있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이 패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승리의 기분에 너무 도취하여 있었나.”
록산느 황녀를 제거한 그 날 이후, 황후는 줄곧 승자의 위치에 서 있었다.
나이 많은 황제의 세 번째 부인이 되며 불쌍하다 손가락질받아야 했던 소녀는 원하던 대로 남부러울 것 없는 권력을 손에 움켜쥐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의미가 있는 삶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패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겨우 얻은 트로피, 에리히엔은 망가져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아들, 아들이라.’
황후는 옛 기억을 더듬었다.
황녀에게 집착하던 브리엔 온리드라스와 휘하의 마법사들과 함께 록산느 황녀를 습격했던 그 날.
‘분명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보고받았었는데. 황녀에게 아들이 있었다니…….’
더 확실히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대로 패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키시어스 대공도, 베르체스터 공작가도 그 편을 들은 글라리엔 백작가도 모두 결국에는 자신의 발밑에 있어야 했다.
그것만이 젊음을 희생했던 자신에 대한 유일한 보상이었다.
황후는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곁에 있던 시녀들이 다급하게 그녀를 부축했다.
곧, 두 발을 안정적으로 바닥에 내디딘 황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를 보러 가야겠다.”
세이튼은 몸을 낮춘 채, 황후가 또각또각 날 선 걸음을 옮기는 소리를 들었다.
내심 속으로 레스티아 베르체스터가 더 이상 이 일에 연루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날, 레스티아를 황태자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불명예가 되어, 아직도 마음의 빚으로 괴롭게 남아 있었다.
* * *
황후가 향한 곳은 황후궁의 지하에 위치한 비밀 공간이었다.
그곳은 황후가 직접 부리고 있는 마법 연구자들을 위한 곳이었다.
한쪽 벽면에는 대륙 전역에서 모아온 위험한 마도서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모두가 황실 소속의 연구가들조차도 해석하여 구현하는 것을 꺼리는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황후는 기꺼이 그것들을 구현하는 데 앞장섰다.
에리히엔이 사용한 마력 증폭제도, 세이튼 온리드라스를 통제할 수 있는 목걸이 마도구도 모두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황후 폐하. 오셨습니까.”
황후가 나타난 것을 확인한 연구자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황후의 걸음이 멈추어 선 곳에는 에리히엔이 누워있었다.
에리히엔의 온몸에는 소생을 위한 마법 술식이 그려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곁에는 다섯 살짜리의 어린 소년이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 소년은 라난테 가문의 아이로, 제 생명력을 깎아 치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였다.
황후는 이 아이의 생명력을 모두 깎는 한이 있더라도 황태자를 살려내라 명했다.
그러나 라난테가 죽은 자를 되살리는 일은 불가능했기에 황후의 연구자들은 라난테를 재료로 금지된 소생 마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라난테는 아직 움직이는데, 황태자는 움직임이 없군.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황후의 싸늘한 질문에 연구자 하나가 납작 몸을 낮추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후 폐하. 소생 마법은 성공했습니다.”
“그것이 확실한가? 그렇다면 황태자는 언제쯤 일어나겠는가.”
“며칠 후면 깨어나실 겁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지?”
“마법으로 소생시킨 존재가 온전히 에리히엔 황태자 전하가 될 것이라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후는 어떤 동요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고요하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을 뿐.
“……상관없네.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일 수만 있다면 말이야.”
황후가 아들인 에리히엔에게 바라는 것은 살아서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주는 것뿐이었다.
황태자는 자신의 위치를 굳건하게 만들 필요로 낳은 아이였지, 자식에게 좋은 어머니가 되고 싶어서 낳은 아이가 아니었다.
목적에 의한 결혼,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낳은 아이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다고 여겨왔다.
“서두르게. 더 이상 키시어스 대공에게 조금의 입지도 내어줄 수 없으니.”
황후는 그동안 자신의 손아귀에 거머쥐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단 하나도 잃을 생각이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