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세이튼은 땅바닥에 엉망인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에리히엔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황태자 전하!”
매사 불명예스러운 일을 일삼는 황태자였으나, 세이튼은 황실기사단으로서 황족을 지켜야 했다.
그것은 황실 기사단 소속이 되어 기사서임을 받은 순간부터 맹세한 것이었다.
세이튼은 황태자를 이렇게 만든 눈앞에 있는 유일한 용의자를 처단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건, 네놈 짓이냐?”
“그래. 전부 내가 그랬어.”
리시언은 담담한 목소리로 수긍했다.
세이튼은 이를 으득 갈고는 마력으로 만든 새빨간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황족 시해 죄로 죄를 묻겠다!”
세이튼의 검을 마주한 리시언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온리드라스의 마검.
긴 세월 동안 악몽에 시달리며 매일 같이 마주해야 했던 그것이 생생하게 눈앞에 있었다.
리시언은 자신을 베어내기 위해 깊은 호선을 그어오는 온리드라스의 검기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항상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검을 빼 들었다.
온리드라스의 마검과 맞붙어 보고 싶어서 그동안 익히고, 또 익혔던 검술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 몰랐다.
그저, 계기가 없었을 뿐.
카아앙!
엄청난 굉음을 내며 세이튼의 마검과 리시언의 철검이 순식간에 맞부딪혔다.
세이튼은 화들짝 놀라서 리시언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말도 안 돼. 검기의 경로를 읽었다고?’
온리드라스의 마검은 평범한 사람이 막아내기 어렵다.
대부분의 검사들이 온리드라스의 마력에 맹수와 마주한 듯한 생리적 두려움을 느끼고 검을 막아낼 타이밍을 놓쳤다.
그랬기 때문에 온리드라스와 자주 접하며 훈련을 한 이거나, 같은 온리드라스 가문에 속한 사람만이 능숙하게 마검을 상대할 수 있었다.
‘한 번의 요행이었을 수도 있다.’
세이튼은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리시언의 검은 그것 또한 막아냈다.
두 사람의 검은 그렇게 몇 번이나 부딪혔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리시언이 사용하는 평범한 철검은 세이튼의 마검이 가진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리시언의 검은 두 동강이 나버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온리드라스의 검기가 뿜어내는 마력에 의해 레스티아가 일전에 선물해줬던 소드 노트 또한 무력하게 뜯겨 버렸다.
리시언은 그것을 인지하고 재빨리 바람의 마법을 써서 세이튼을 멀리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미 뜯겨 나간 소드 노트는 넝마 쪼가리가 되어 바닥에 떨어져 버린 상태였다.
“……이런.”
리시언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것을 움켜쥐고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제야 냉정함이 돌아왔다.
지금은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였다.
당장이라도 온리드라스의 마검과 맞붙어 우위를 가리고 싶었으나, 지금 자신은 레스티아와 베르체스터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었으니 자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세이튼은 부모님을 시해한 그 브리엔 온리드라스가 아니었다.
“비켜.”
리시언은 마법을 써서 자신을 향해 계속해서 달려들려 하는 세이튼을 가로막아 거리를 만들어냈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세이튼은 이를 으득 갈았다.
“나를 가지고 놀겠다는 건가! 검이 필요하다면 검을 주겠다!”
이미 세이튼도 리시언과 우열을 가리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리시언은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전했다.
“싸움이 무의미하기에 피하는 거다. 이건 황족 시해 죄가 될 수 없으니까.”
그리고는 자신을 포위한 채 노려보고 있는 세이튼과 황실 기사단을 향해 오만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황제 폐하께 황녀 록산느의 아들이 왔다고 전해.”
그 말에 황실 기사단을 이끄는 중년의 기사 단장이 헉 소리를 내뱉었다.
“무어라? 록산느 황녀님의 아들이라고?”
황실 기사단장은 오랫동안 황실의 녹을 먹은 이였다.
그는 예리한 시선으로 리시언의 모습을 훑었다.
인제 보니 리시언의 골격과 풍채는 젊은 시절의 황제가 그려져 있는 초상화를 그대로 빼닮아 있었다.
황제를 닮았던 록산느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엇보다도 황금색으로 빛나는 아름답고 예리한 눈동자.
그건 록산느의 곁을 지켰던 그 괴물이라 불렸던 기사의 눈이었다.
게다가 그 괴물처럼 온갖 속성 마법을 쓰는 마법사라니.
과거에 황궁을 발칵 뒤집었었던 록산느와 그 괴물의 스캔들이 사실로 드러난 셈이었다.
“맙소사! 다들 검을 치워라!”
황실기사단장이 먼저 검을 바닥으로 내려놓는 것을 시작으로, 황실기사단은 일제히 바닥에 검을 내려놓았다.
세이튼 또한 상관의 명령을 따라 마검을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 * *
다음 날, 모르카티움 제국 전역이 들썩였다.
모두가 이미 오래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록산느 황녀의 아들이 황궁에 모습을 드러낸 일에 대하여 떠들어댔다.
모두가 입 밖으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으나, 공공연하게 황후가 록산느 황녀를 제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아들이 마치 그 일에 대한 복수를 하듯 황태자궁을 반파시키며 나타났다.
그것은 큰 화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분께서 속성 마법을 사용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요?”
“황녀 전하의 부군이 그 괴물이라고 하더군요.”
“어머, 예전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요.”
“그런데 정말로 황손이 맞다고 합니까?”
물론, 리시언이 황족임을 믿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카트리나 록베스트가 마안을 사용해 리시언이 황손임을 증명했다.
록베스트의 마안이 가진 공신력에 그 누구도 반발할 수 없었다.
그것은 황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서는 무사하답니까? 황태자궁이 엉망이 되었다면서요.”
“황후께서는 황태자가 크게 다치셨다는 이야기만 하셨다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그 이후로 황태자 전하를 못 보았다더군.”
황후는 황태자가 생존해 있다고 주장하며 황족 시해 죄로 리시언의 목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 말을 무시하고 리시언에게 짧은 근신만을 하명했을 뿐이었다.
황제는 황족간의 싸움에서 항상 승자의 편일 뿐이었다.
그렇게 에리히엔 밖에 남아있지 않던 유력한 황위 계승자가 한 명 더 생겨났다.
앞으로 일어날 황위 싸움에 귀족 사회가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엄청난 소식이 수도를 휩쓸자 글라리엔이 예언했던 레스티아의 미래는 어느새 까마득히 잊혔다.
베르체스터 공작가에 대한 이야기는 제라르가 리시언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는 것만이 거론되었을 뿐이었다.
그에 황후는 이 일이 베르체스터 공작가와도 연관이 있다 호소했다.
레스티아 베르체스터가 그 당시에 황태자와 만나고 있었다며 말이다.
그러나 베르체스터 공작가는 ‘황후께서 식사 초대 후 돌려 보내주신 여동생은 제시간에 집에 잘 돌아왔다.’라고 응답할 뿐이었다.
그 보증인으로 글라리엔 백작가가 나섰다.
황후는 결국 그 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꺼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 * *
황제는 큼지막한 황좌에 깊숙이 등을 파묻고는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리시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갑작스레 황태자궁에 나타나서 엄청난 사고를 친 이 불경한 손자는 조금의 긴장감도,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
덤덤하게 특유의 오만한 표정을 유지한 채 제국의 주인인 황제를 향해 똑바로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라.
황제는 리시언이 건방지다 느꼈다.
하지만 한편 대견하기도 했다.
모르카티움 제국을 호령하는 검은 독수리의 혈통이라면 저 정도의 기개는 갖춰야 하는 것이 맞으니 말이다.
하지만 빠르게 그 생각을 지웠다.
황손이라고 하나 어차피 궁 밖에서 나고 자란 들짐승이니 천박함을 숨길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리시언이 자신이 베르체스터 공작가에서 생활했다는 사실을 숨겼기 때문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마침내 리시언이 몸을 숙이며 황제에게 절을 올렸다.
그에 황제는 침음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과 달리 들짐승이라 폄하할 수 없을 정도로 무엇 하나 트집 잡을 수 없는 완벽한 예법이었다.
게다가 그 품위 있는 모습에서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딸, 록산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닮았구나. 그 애가 사내로 태어났다면 이런 모습이었겠어.”
황제는 그 말을 내뱉고는 자신이 지금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평생 동안 혈육의 정에는 무정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가슴 한구석을 찌르는 먹먹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줄곧 뛰어난 자질을 가진 자식을 잃어버려서 아깝다는 생각에 빠져있었기 때문일까.
이맛살에 자리 잡은 자글자글한 주름이 더욱더 깊어졌다.
하지만 황제는 이 나약한 생각을 겉으로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리시언을 향해 록산느 황녀의 못마땅했던 점을 늘어놓았다.
“네 어미는 짐의 말을 무엇 하나 곧이곧대로 따르는 법이 없었다.”
황제는 록산느가 아비인 자기 뜻대로 살아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황제와 다르게 너무나도 정의로웠고, 자신의 신념을 굽힐 줄 몰랐다.
빈번하게 선대들이 구축해둔 체계에 의문을 제시했고, 그 뜻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세웠다.
황제는 황권 강화를 중시했기에, 자신과 정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황녀를 점차 골칫덩어리라 여기게 되었다.
“게다가 너에게는 록산느 황녀의 피뿐만 아니라 천박한 괴물의 피도 섞인 듯하구나.”
결정적으로 록산느가 황제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그녀가 실험체 따위에 애정을 가진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화를 참을 수 없었고, 황후가 계획한 계략에 침묵했다.
이 정도에 죽을 자식이라면 어차피 필요치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도 담담하기만 했다.
하지만 막상 나이를 먹고, 스스로가 약해지고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록산느를 떠올렸다.
황좌가 최후의 승자가 얻게 되는 자리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정쟁 끝에 자신의 휘하에 남아 있는 유일한 후계자는 한참이나 부족해 보였다.
에리히엔이 어미의 치마폭에 안겨 망나니짓만 일삼아대는 것이 어찌나 한심한지.
차라리 록산느처럼 확고한 신념을 갖고 덤비는 것이 더 좋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 나타난 록산느의 아들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길 생각은 없었다.
황좌는 결국 최후의 승자의 것이니 말이다.
“너는 짐이 버린 가장 못난 황녀의 자식이다. 그런 녀석이 왜 황궁에 왔느냐.”
황제가 리시언을 향해 날카롭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