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황궁에 도착한 리시언은 수하들로부터 조엘과 마티어스가 황궁으로 잠입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벌써 안으로 들어가 버렸군.’
리시언은 마티어스가 마법을 사용해 변형시킨 것이 분명해 보이는 성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진흙처럼 변해버린 성벽은 황궁의 높은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낸 상태였다.
분명, 이 통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마티어스와 조엘이 있는 곳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안은 황궁이었다.
리시언이 절대로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곳.
쳐다보아서도 안 되고, 도망쳐야 할 금기의 공간.
‘…….’
리시언은 양쪽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안으로 들어설 것인가, 아니면 왔던 길을 되돌아갈 것인가.
지금 이 앞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동안 숨바꼭질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조엘, 마티어스가 황궁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면 설득해서 조금 더 현명한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을 텐데,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더 개입해서는 안 돼.’
이건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일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아니, 해서도 안 돼.’
이성이 냉철한 판단을 종용했다.
하지만 정작 두 발은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멈춰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쿵! 쿵!
굉음이 울려 퍼지고, 땅이 위아래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리시언은 어렵지 않게 그것이 마티어스의 마법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매번 화가 나면 지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지축을 뒤틀어 댔으니까 말이다.
‘이 멍청이가. 황궁을 전부 부수기라도 하려는 건가.’
이미 이런 식으로 황궁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만으로도 문제가 큰데, 이렇게 대놓고 마법을 사용하다니.
모든 것이 염려스러웠다.
그래도 조엘이 곁에 있으니까 괜찮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곧바로 태풍에 가까울 정도로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이것은 조엘의 마법이었다.
‘조엘? 너까지. 왜?’
마티어스는 그렇다고 쳐도, 조엘이 이 정도로 과격하게 마법을 쓰는 일은 본 적이 없었다.
마법이나 무력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협상을 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 조엘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런 조엘이 이렇게 난폭하게 마법을 사용할 정도라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쌍둥이가 동시에 이성을 잃을 정도로 큰일이.
‘……설마.’
레스티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확실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심 레스티아가 안전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황태자도 아닌, 황후가 베르체스터 공작가를 상대로 이렇게 수가 보이는 허튼짓을 할 리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것으로 모든 것들이 불확실해져 버렸다.
심장이 통제를 잃고 급격히 쿵쿵 뛰어댔다.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콱 막혀오는 것 같았다.
불현듯, 손가락에 걸려 있는 마력 중화석 반지가 답답하도록 거슬리고 화끈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반지를 자신에게 건네주기 위해 불길을 달려왔던 레스티아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위험하도록 새까맣게 그을린 잿더미 속에서 천진난만하게 웃던 아이.
앞으로는 이렇게 위험한 짓을 하지 말라 말했더니 무어라 했던가.
볼을 통통하게 부풀리면서 화를 냈었지.
-그렇지만, 리시언 님은 제게 소중한걸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왜?
-우리는 베르체스터니까요.
고작 그런 이유로.
자신은 진짜 베르체스터도 아닌데.
하지만 리시언은 그 사실을 레스티아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 애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느껴진다는 그 감각이 내심 좋았다.
그리고 그것을 잃고 싶지 않다는 욕심도 들었었던 것 같다.
“나는.”
리시언은 황궁을 노려보듯 바라봤다.
“나는 도망쳐야 해.”
그리고 일부러 입 밖으로 자신이 줄곧 지켜왔던 그 말을 내뱉었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몸이 이미 한걸음 황궁을 향해 나아갔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럴 필요는 없어.”
그러나 리시언은 어느새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레스티아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향해 달려왔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소중해서 그랬다는 것.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자신 또한 소중한 이를 잃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대로 도망치면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리시언은 이제 무력하게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악몽 속을 헤매는 어린아이이고 싶지 않았다.
리시언은 어느새 황궁 안으로, 조엘과 마티어스의 마력이 느껴지는 황태자 궁으로, 레스티아가 있을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 *
“크윽!”
에리히엔은 사신처럼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조엘과 마티어스를 노려보며 뒷걸음질 쳤다.
두 사람이 사용한 마법에 의해 이미 사방은 쑥대밭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이 정도로 난리가 날 정도면, 황태자궁을 호위하고 있는 황실 기사단이 당장이라도 달려와야 하건만 이상하게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에리히엔이 초조하게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살피자, 조엘이 천사처럼 빙그레 미소지었다.
“황태자 전하. 바람으로 장벽을 쳤습니다. 아무도 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 이 개자식아, 유부남 주제에 이제 12살밖에 안 된 내 동생한테 청혼서를 쓰라고 해? 미친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빨리 설명해!”
처음 쌍둥이들은 조용히 잠입해서 레스티아를 데리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 생각은 없어졌다.
황태자가 레스티아를 함부로 만지려 한 것도, 청혼서를 쓰게끔 강요한 것도 모두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두 사람은 이번 일은 물론이고, 지난번 납치사건에 대한 일까지 자백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다소 폭력적인 마법을 써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에리히엔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히쭉 웃으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건방진 것들. 감히 내 앞에서 마법을 사용한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에리히엔은 품 안에서 꺼낸 작은 병을 주저 없이 조엘과 마티어스의 앞으로 내던졌다.
순식간에 검은색 연기가 피어나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초조하게 조엘과 마티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레스티아가 그것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안 돼! 저건! 위험해요!”
저 연기는 분명 1년 전에 삼촌이 자신에게 던졌던 상자에 들어있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리시언이 저 연기를 태우고는 위험에 처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조엘과 마티어스의 마법이 본능적으로 그 검은색 연기를 공격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과 동시에 갑작스레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몰아치고, 땅이 흔들렸다.
“이건?”
“제기랄? 이게 뭐야!”
조엘과 마티어스는 처음으로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 마법에 당혹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력 중화석에 담긴 힘이 순식간에 고갈되기 시작했다.
“하하! 마력 증폭제다! 너희 같은 마법사들에게는 위험한 물건이지! 마력을 전부 쏟아내고 죽거라!”
에리히엔이 즐겁다는 듯 낄낄거렸다.
그러나 곧바로 주먹 모양의 거대한 바위가 솟아나 에리히엔을 내리쳤다.
“크, 크헉!”
“너, 내가 죽더라도 네 자식은 죽이고 죽는다.”
마티어스가 이를 악물었다.
그와 동시에 귀에 다닥다닥 박혀 있는 녹색 마력 중화석이 순식간에 회색으로 변해버렸다.
에리히엔은 기어서라도 도망치려고 했으나, 조엘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아하. 그렇군요. 이런 식으로 저택에 불이 나게 만드신 것이었나 봅니다.”
조엘 역시 이성을 잃고 바람으로 만든 채찍을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손목에 매달려 있는 붉은색 마력 중화석이 석류알 터지듯 회색으로 변해갔다.
이미 에리히엔은 정신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진 상태였지만 두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안 돼요! 오라버니들 참으세요! 더 이상 마법을 쓰는 건 위험해요!”
레스티아가 목청껏 소리치며 만류했다.
하지만 이미 폭주하기 시작한 두 사람은 레스티아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지 않는 듯했다.
‘어, 어떻게 해! 이대로는 안 돼! 오라버니들이 위험해!’
레스티아는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바람과 흔들리는 대지 위에 서 있었다.
바람과 땅의 마력이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탓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조엘과 마티어스도 이 상황에 취해 이성을 잃어버린 듯했다.
‘우선 이 마력들을 어떻게든 해야 해.’
레스티아는 폭발하듯 넘쳐나는 이 에너지들을 어딘가에 가두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러자, 마석을 만들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여기에 어떤 힘을 담고 싶어?]
여기 이렇게 넘쳐나는 속성 마력들을 담아서 봉인할 수만 있다면.
‘이 힘으로 마석을 만들 수 있을까?’
그 생각에 도달한 레스티아는 이미 몇 번이고 읽어서 외워버린 마도서의 내용을 읊조렸다.
곧바로 은회색의 눈에 황금색 마법진이 떠오르고, 발아래에 거대한 마법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예의 질문과 마주했다.
[여기에 어떤 힘을 담고 싶어?]
레스티아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여기, 이렇게 사방에 넘쳐나는 땅의 마력과 바람의 마력을 담아내고 싶어.”
[충분해.]
순식간에 사방으로 날뛰던 땅의 마력과 바람의 마력이 일제히 멈추었다.
폭주하듯 마법을 사용하던 조엘과 마티어스 역시 갑자기 찾아온 평화에 제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동시에 이 평화를 만들어낸 이를 바라봤다.
“레스티아?”
“리티?”
레스티아가 황금색 마법진 위에 서서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마력들이 동그란 물방울처럼 결정의 모양새로 응집해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 마석이 만들어져서는 땅으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쌍둥이들은 손을 뻗어 그 구슬 같은 마석을 손에 쥐었다.
“이건 마석?”
“하지만, 마석 같지 않은걸?”
이번에 레스티아가 만들어낸 마석들은 새카맣지 않았다.
땅의 힘과 바람의 힘을 담은 듯, 조엘과 마티어스의 홍채처럼 자수정과 에메랄드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폭주하던 마력들을 원했던 것처럼 마석에 담아 봉인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레스티아는 사방을 뒤덮은 알록달록한 마석들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 오라버니들 괜찮으세요?”
하지만 이내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숨이 벅차오르고, 지나친 피로감이 온몸을 덮쳤기 때문이었다.
“레스티아!”
“리티!”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마티어스와 조엘이 단걸음에 레스티아에게로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