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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62화 (62/132)

62화

레스티아는 세이튼이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인지하지 못한 채 차창을 바라봤다.

어느새 마차 밖으로 황궁의 모습이 보였다.

모르카티움 제국의 황궁은 수도의 중앙에 있는 넓고 낮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거대한 절벽을 군림하듯 움켜쥐고 있는 베르체스터 성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가감 없이 드러낸 화려함과 부유함.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이곳의 주인을 우러러보게끔 만들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 같았다.

“베르체스터 영애. 이쪽으로.”

세이튼은 능숙하게 레스티아를 황후궁으로 안내했다.

사방이 백금과 대리석으로 장식된 황후궁은 아름다우면서도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레스티아는 황후가 기다리고 있다는 방문 앞에 서고 나서야 조금 긴장감을 느꼈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이건 공식적인 초대였으니까. 오라버니들도 집에 오시면 알게 될 거고.’

레스티아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예의를 갖추어 절을 올렸다.

“레스티아 베르체스터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반갑네. 베르체스터 영애.”

황후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서 느긋하게 레스티아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짧게 명령을 내렸다.

“편히 앉아도 좋네.”

그 말과 동시에 시녀들이 레스티아를 향해 의자를 내어주었다.

레스티아는 조심스레 의자에 앉아 황후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황후는 얼음 성에 사는 얼음 여왕 같았다.

푸른색에 가까운 옅은 하늘색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중년의 여인은 아름답지만 예민해서 금방이라도 잔뜩 벼려진 검처럼 돌변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레스티아를 향해서는 조금의 날도 세우지 않았다.

“아주 작고 귀여운 아가씨군그래.”

그저 이렇게 짧게 평가를 할 뿐이었다.

레스티아는 여전히 긴장한 채로 고개를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황후는 입꼬리를 우아하게 말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영애. 내가 왜 그대를 갑자기 이렇게 초대했는지 궁금하겠지. 사교계에 데뷔도 하지 않은 어린 아가씨를 말이야.”

그리고 시녀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레스티아와 황후 사이에 자리 잡은 널찍한 식탁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몇 시간 전에 글라리엔이 예언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네. 검은 독수리를 길들인다고 했다지. 재미있는 예언이지 않은가. 그 레스티아 베르체스터가 누구인지 빨리 확인해 보고 싶어서 이렇게 급하게 초대했네.”

황후에 입에서 글라리엔의 예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레스티아는 바짝 긴장했다.

안젤라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다.

“황후 폐하. 예언은 해석하기 나름이라 들었습니다. 검은 독수리가 황가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그러자 황후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베르체스터 영애. 어린 나이임에도 제국의 황후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아, 그게…… 송구합니다.”

레스티아는 아차 싶었다.

제 주변 사람이 걱정되면 용기가 불쑥 솟아나는 것은 여전했다.

“괜찮아. 송구할 필요 없네. 그대는 베르체스터니까.”

황후는 의뭉스럽게 와인 잔을 들어 입을 축이고 말했다.

“베르체스터의 마법은 제국에 무척이나 중요하지. 미래에 내 아들이 황좌에 앉은 후에도 중요할 것이고 말이야.”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그래 내 아들. 황태자 에리히엔은 무척이나 부족한 아이라네. 영애.”

레스티아는 갑작스레 황태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화들짝 놀랐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황태자의 부족함을 논하다니 무어라 말을 이어야 좋을지 몰랐다.

하지만 황후는 마치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자식이 참으로 내 마음처럼 되지 가 않아. 하지만 부족한 만큼 주변에 훌륭한 인재를 많이 두려고 노력하고 있지.”

황후는 그렇게 말하며 눈짓으로 문 앞에 석상처럼 서 있는 세이튼 온리드라스를 바라봤다.

“주로 마법사들로 말이야. 곁에 두면 쓸모가 많은 인재지.”

레스티아는 마치 마법사를 수집품처럼 취급하는 그 말과 행동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느꼈다.

하지만 황후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다정하기만 했다.

“그러니, 만일 그 예언 속 검은 독수리가 내 아들이라면, 베르체스터 영애. 부디 내 아들에게 도움을 주길 바라네.”

한참을 듣기만 하던 레스티아가 조심스레 말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저는 오라버니들처럼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여, 황태자 전하께 누가 될 것입니다.”

“그래. 영애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마도서를 학습하는 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는 들었네.”

황후는 이미 레스티아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한 후였다.

레스티아가 해석하는 자라는 사실은 알아내지 못했으나, 카트리나와 가깝게 지내며 공부를 하고 있다는 정보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다.

“제국을 위해 마도서를 연구하는 일 또한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지. 그건 마법사를 통제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과도 같으니까.”

황후의 말에 레스티아는 마력중화석을 떠올렸다. 불쑥 화가 치밀었다.

황후의 말이 자신의 편에서 마법사들의 약점 잡는 것을 도우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베르체스터가 마법사 가문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인내하며 대답했다.

“숙지하도록 하겠습니다.”

황후는 그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빙그레 웃었다.

“그럼, 식사하지. 황실 요리장이 준비한 것이니 부디 즐기고 돌아가시게.”

그렇게 말하며 자상하게 웃는 황후는 마냥 좋은 어른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레스티아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불편하기만 했다.

* * *

황후가 레스티아와 식사를 하는 동안, 에리히엔은 황후가 레스티아를 황궁으로 초대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뭐? 어머니께서 베르체스터 영애를 황궁으로 초대하셨다고?”

“예. 함께 석찬을 들고 계시다 합니다.”

“하하. 이거, 참.”

더욱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별도의 초대장을 넣을 생각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빠르게 제 곁에 굴러 들어올 줄이야.

역시 세상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럼, 어디 직접 맞이하러 가볼까.”

* * *

레스티아는 짧은 식사를 끝내고 황후궁 밖으로 나왔다.

세이튼이 황궁에 왔던 것처럼 바래다주겠다며 따라 나왔다.

그런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황궁 마차가 아니었다.

마차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화려한 자수가 놓인 새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에리히엔이었다.

세이튼이 설핏 미간을 좁히곤,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하지만 에리히엔은 세이튼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레스티아를 확인하고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 그대가 레스티아 베르체스터 인가.”

화려한 용모에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새카만 홍채.

모든 것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함이 깃든 시선.

레스티아는 문득 에히리엔의 모습에서 리시언을 떠올렸다. 하지만 빠르게 생각을 지웠다.

어딘지 속내가 잔뜩 뒤틀린 듯한 눈빛이, 올곧은 기개가 느껴지는 리시언과는 영 딴판으로 흉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선 침착하게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레스티아 베르체스터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남자의 가슴팍에 달린 황가의 인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것은 모르카티움 제국의 황태자만이 달 수 있는 장신구였으니까.

언젠가 예법과 귀족 가계도를 공부하며 익혔던 그 황태자 에리히엔을 이런 식으로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안젤라의 예언 한마디에, 이렇게 제국의 황족들을 차례대로 만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에리히엔은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느릿한 눈짓으로 레스티아의 전신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을 뿐이었다.

“으흠. 입매가 제라르를 좀 닮은 것 같기는 한데.”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품평하는 듯한 말을 연달아 내뱉었다.

“하지만 생각보단 괜찮군. 크면 미인이 되겠어. 아직 어리니까 이것저것 손볼수록 내 취향에 맞춰 키울 수 있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레스티아는 그 시선과 말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초면에 제국의 황태자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것이 예의가 아니라 배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스티아를 대신해서 세이튼이 말을 꺼냈다.

“전하. 베르체스터 영애는 황후 폐하의 손님이십니다. 예의를 갖추어 주십시오.”

그러자 에리히엔의 미간이 와락 좁혀졌다.

“세이튼. 네가 내 말을 가로막아도 됐던가?”

무례하게도.

그 말과 동시에 세이튼이 목을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커헉.”

세이튼은 마치 숨을 쉴 수 없는 것처럼 헐떡거리며 목걸이를 쥐어 잡고 있었다.

“세상에! 온리드라스 경? 무슨 일이에요!”

“아. 놀라지 말게 베르체스터 영애. 황가가 광 검사를 다루는 방법일 뿐이니.”

에리히엔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흐릿하게 말을 흘렸다.

“이런 것을 베르체스터에도 달아야 하는데, 아쉽게도.”

레스티아는 그제야 세이튼의 목에 있는 가죽 목걸이가 광 검사인 온리드라스를 통제하기 위해 황실이 만들어낸 마도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런 걸, 오라버니들에게도 달겠다고?’

레스티아는 미간을 와락 좁혔다.

그러나 에리히엔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레스티아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베르체스터 영애. 그대와 둘이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황태자궁으로 가지.”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제게 집으로 돌아가라 명하셨습니다.”

레스티아는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하지만 에리히엔은 그 말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어머니는 한 번도 내게 화를 내신 적이 없으니까.”

그러고는 레스티아를 잡고 있는 손에 더 강하게 힘을 주었다.

“놓, 놓아주세요!”

“이런, 영애. 내 아내가 된다면 조금 더 고분고분해지는 게 좋을 거야.”

레스티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황태자비가 엄연히 있는데, 자신이 에리히엔의 아내가 된다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미 혼인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하지만 황태자비와 나 사이에는 아직 애가 없거든. 이혼 후에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는 어린 신부를 미리 키워 결혼할 생각이야. 어머니도 이해하겠지.”

에리히엔의 입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오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세이튼도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내가 청혼하면 모양새가 좋지 못하니. 베르체스터 영애. 그대가 내게 청혼하는 것으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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