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담소를 나누는 동안 레스티아는 안젤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이유가 잠들어 있는 시간이 많아서 다리 근육 발달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안젤라의 성격이 또래보다 더 천진난만하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베르체스터 영애, 우리 안젤라가 조금 독특하지요?”
글라리엔 부인은 안젤라가 레스티아에게 폐를 끼칠까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레스티아의 눈에는 안젤라가 무척 사랑스러운 소녀로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활기차고, 엉뚱하면서도 신비로웠다.
“아니에요. 저는 글라리엔 영애가 좋은걸요.”
“글라리엔 영애라니. 레스티아, 네가 꿈에서처럼 나를 편하게 불러 주면 좋을 텐데. 지금은 나 혼자서만 친한 것 같아서 슬퍼.”
“꿈에서처럼요? 글라리엔 영애, 꿈 이야기를 자세히 해 주시겠어요?”
레스티아가 조곤조곤 질문을 건네자, 안젤라는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레스티아는 내 친구였어. 꿈에서 매일같이 놀았지. 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레스티아를 만나고 싶었어.”
3년 동안 잠들어 있었던 안젤라의 꿈 이야기는 환상적이기도 하고 기묘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참 동안 담소를 나누던 중, 안젤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그런데 여긴 현실이잖아. 레스티아와 친구로 지낼 수 없는 것 같아서 슬픈걸. 차라리 꿈에서 영원히 깨지 않으면 좋을 텐데. 나는 꿈에서 깨는 게 너무 싫어.”
안젤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챙그랑 하고 찻잔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의 곁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글라리엔 부인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어머나, 미안해라. 나도 모르게 실수해 버렸네.”
부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었으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레스티아는 부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도 놀랐을 거야.’
소중한 가족이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한다면 당연히 괴로울 것이다.
오라버니들 중에 한 명이라도 그런 말을 했다면, 레스티아 역시 똑같이 반응했을 게 분명했다.
레스티아는 안젤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글라리엔 영애, 저는 영애를 이렇게 꿈 밖에서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좋은걸요.”
안젤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왜?”
“꿈은 꿈일 뿐이잖아요. 진짜 친구가 되려면 이렇게 현실에서 만나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가?”
“그럼요. 이렇게 함께 맛있는 차를 마시면서 정원에서 햇볕을 쬘 수 있잖아요.”
“그건 그래.”
안젤라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끄덕였다.
하지만 곧바로 속상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도 아쉬운걸.”
“뭐가 아쉬운가요?”
“꿈에서 나는 이렇게 휠체어에 앉아 있지 않아. 레스티아가 책을 읽어 주면 회색 눈에 마법진이 반짝반짝 빛나고, 나는 항상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곤 했어.”
“네?”
안젤라가 흘린 듯 뱉어낸 말에 레스티아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마도서를 읽는다는 사실은 극소수만이 알고 있다.
그런데 안젤라가 자신이 마도서를 사용하는 상태와 비슷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 놀랍기만 했다.
순간 레스티아의 머릿속에 글라리엔이 예언을 하는 마법사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혹시 이것은 예언인 것 아닐까?
그렇다면 미래에 자신이 마도서를 해석해서 안젤라를 돕는 데 성공한 걸까?
레스티아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글라리엔 영애, 꿈에서 제가 어떤 마도서를 해석했나요? 혹시 제목이나…… 아니, 어떻게 생긴 마도서였는지 기억하시나요?”
하지만 안젤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도서? 그런 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걸.”
역시, 들었던 대로 글라리엔의 예언은 모호하기만 했다.
“아, 그렇군요. 죄송해요. 제가 흥분해서.”
레스티아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나자, 안젤라가 초조한 손짓으로 레스티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레스티아, 혹시 내가 그거 몰라서 화가 난 거야?”
“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럼 다행이야. 레스티아가 나를 싫어하는 건 싫은걸. 현실에서도 친구로 지내 줬으면 좋겠어. 안 될까……?”
레스티아는 안젤라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먼저 친구가 되자며 찾아온 이를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저야말로 안젤라의 친구가 되고 싶은걸요.”
“정말? 정말이지?”
안젤라는 꽃이 만개하듯 방긋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래도록 유리 정원에 앉아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글씨 쓰기를 연습하느라 힘들었다는 공감대를 나누고 나니,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밀감을 느꼈다. 마치 오래전부터 꼭 만났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 * *
그날 이후, 안젤라와 레스티아는 거의 매일같이 만나서 함께 놀았다.
안젤라가 자주 만나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또 언제 잠들지 알 수 없으니 어서 빨리 친해지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레스티아 역시 베르체스터 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안젤라와 함께 지내고 싶었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다행히 베르체스터 저택과 글라리엔 저택이 가까웠기에 딱히 문제가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안젤라가 베르체스터 저택에 놀러 올 때면 조엘이 천사처럼 웃으며 그녀를 맞이해 주었다.
“또 왔구나, 레스티아의 친구.”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를 내오라고 지시해 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안젤라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는 레스티아의 귓가에 속닥속닥 속삭였다.
“레스티아, 너희 오라버니는 엄청 멋지신 것 같아. 내가 만나 본 사람 중에 최고로 멋있어. 나도 오라버니 가지고 싶다!”
하지만 그 반대로 마티어스를 보게 되면 오만상을 쓰며 전혀 다른 말을 속삭였다.
“그런데 마티어스 님은 왜 저래? 조엘 님이랑 닮았는데 성격은 전혀 안 똑같아! 저런 오라버니는 가지고 싶지 않아.”
“뭐라는 거야, 요 꼬맹이가.”
마티어스는 안젤라를 레스티아 옆에 매달린 귀찮은 혹 정도로 여겼기에 두 사람 사이는 좋지 못했다.
“이렇게 성격이 다른 오빠가 둘이나 있다니 너무 신기해. 내가 외동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야. 나도 가끔 신기한걸.”
레스티아는 그렇게 대답하며 쿡쿡 웃었다.
1년 전만 해도 자신도 이렇게 오라버니들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다음에는 다른 오라버니들도 소개해 줄게.”
레스티아는 안젤라에게 리시언도 소개시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리시언은 수도에 온 이후에도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나 집에 돌아왔기에 안젤라와 좀처럼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리시언 님은 정말 뭘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는걸. 괜히 수도에 같이 오자고 한 걸까.’
리시언에 관한 레스티아의 고민은 나날이 깊어져 가기만 했다.
“맞아! 레스티아!”
안젤라가 들뜬 목소리로 레스티아를 불러 세웠다.
“점심에 번화가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지 않을래?”
“레스토랑?”
“응! 거기 엄청 커다란 초콜릿 분수가 있대! 꼭 가 보고 싶어.”
초콜릿이 솟아나는 분수라니.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는 두 친구는 동시에 “가자!”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각자 호위 기사들을 거느리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안젤라가 알아 온 레스토랑은 귀족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고급 식당이었다.
커다란 규모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돋보였는데, 두 소녀를 가장 설레게 만든 것은 기대했던 대로 중앙에 설치된 커다란 초콜릿 분수였다.
“초콜릿 향기 너무 좋아!”
“나도!”
두 사람은 까르륵 웃으며,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이것저것 시켰다.
“난 핫초코를 두 잔 마실 거야!”
“그럼 나는 오믈렛에 치즈를 가득 추가할래.”
어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둘이서 이렇게 놀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곳은 아이들만을 위한 레스토랑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레스토랑에 들어오자마자 레스토랑에 있던 귀족들은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푸른 머리카락의 분홍색 눈동자. 타고 있는 휠체어. 딱 봐도 글라리엔 영애네요.”
“그렇다면, 그 옆에 있는 아가씨는 수도에 오자마자 모든 초대장을 거절하고, 글라리엔 영애와만 어울리고 있다는 베르체스터 영애인가요?”
“세상에. 소문대로 베르체스터 영애는 조금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어요. 하필이면 사귀는 친구가 덜떨어진 글라리엔이라니.”
“소문 못 들었어요? 베르체스터 영애는 빈민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귀족 사회에 적응하는 데 힘겨워 한다던데.”
“어머나, 정말요?”
작게 수군거리던 목소리들은 어느새 레스티아와 안젤라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커진 상태였다.
보호자가 없는 어린아이 두 명은 뒷배가 대단하다 해도 수군거림을 멈추게 할 만큼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이봐요!”
레스티아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안젤라가 더 빨랐다.
레스티아가 그들을 돌아봤을 때, 이미 안젤라는 뒷말을 쏟아 내는 어른들을 향해 손에 든 음료를 흩뿌린 상태였다.
컵 안에 가득 차 있던 눅진눅진한 핫초코가 사방으로 튀며 달큼한 향을 풍겼다.
“야! 네까짓 것들이 뭔데 내 친구를 흉봐!”
안젤라는 분에 찬 듯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나는 흉봐도 돼! 하지만 레스티아는 사납고 고귀한 검은 독수리를 길들이게 될 거란 말이야! 세상에서 제일 귀한 여인이 될 거라고! 내가 꿈속에서 다 봤단 말이야! 너희들이 수군댈 사람이 아니야!”
안젤라의 말에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던 귀족들 모두가 얼어붙었다.
모두 안젤라가 글라리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그 글라리엔이 미래를 예언한 것이다.
이 자리에 검은 독수리가 모르카티움 제국의 황족을 뜻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베르체스터 영애가 검은 독수리를 길들이게 된다고……? 이건 베르체스터와 황가의 결혼을 뜻하는 건가?”
“하지만 지금 모르카티움 제국에 있는 검은 독수리는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뿐이잖아.”
“그리고 황태자 전하는 혼인을 하셔서 이미 황태자비가 계시지.”
“뭐가 돼도 흥미롭겠는데? 글라리엔의 예언이 이번에 맞을지 아닐지 궁금해지는걸.”
레스티아는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안젤라와 함께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한번 새어 나간 예언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제국의 사교계에 쫙 퍼졌다.
그리고 황태자 에리히엔은 그 이야기를 듣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언젠가를 기약하고 기다려 왔던 일이 생각보다 재미나게 돌아가게 생긴 것이다.
글라리엔의 예언이라.
왜 신은 이리도 항상 자신의 편인지, 타고난 자에게 세상은 왜 이리 자애로운지. 불행한 이들에게 동정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뭐, 어린 신부를 키워 보는 것도 즐겁겠지. 그것도 제라르의 여동생이라니. 재미있겠어.”
에리히엔은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 가며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