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그리고 며칠 후, 리시언과 레스티아는 수도로 향했다.
아카데미의 졸업식을 일주일 남겨 둔 때였다.
“리티! 리티! 여기야 여기!”
“어서 와, 레스티아, 내 동생. 이렇게 직접 축하하러 와 주고 정말 고마워.”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조엘과 마티어스가 달려와 레스티아를 맞이해 주었다.
1년 만에 돌아온 베르체스터 저택은 불에 탄 이후로 재건축을 해서 더욱 웅장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경비가 삼엄했다.
“원래 저택을 지키는 기사들이 이렇게 많았던가요?”
레스티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리시언은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레스티아를 위해 철옹성에 가까운 방어진을 구축해 둔 모양이었다.
항시 레스티아의 곁을 지키도록 되어 있는 세 명의 호위 기사들의 표정도 날카롭게 변해 있었고 말이다.
그러나 그 철벽같은 방어진도 입소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니, 외려 그 결벽에 가까운 호위가 소문을 더 부추긴 모양새가 되었다.
베르체스터 공작가가 이 정도로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경우는 단 하나뿐이지 않겠는가.
베르체스터 형제들이 그렇게도 아낀다는 막냇동생.
이미 귀족 사회에는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아가씨가 수도에 왔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저택으로 수많은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모두가 레스티아의 방문을 바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레스티아, 인기가 많은걸.”
조엘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레스티아의 앞에 수북하게 쌓인 초대장을 보며 인상을 썼다.
대놓고 레스티아를 혼약 상대로 노리는 듯한 이들의 초대장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티, 전부 거절해. 나랑 놀 시간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랑 만나서 놀겠다는 거야?”
마티어스 역시 불편한 심기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어머나, 이 오라버니들 좀 봐요. 꼬마 아가씨를 집구석에 숨겨 놓고 친구도 없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걸까?”
카트리나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쯧쯧 혀를 찼다.
카트리나는 레스티아가 수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저택을 방문한 상태였다.
그래서 지금 조엘, 마티어스와 함께 테라스에서 브런치 타임을 즐기며 레스티아의 앞으로 온 초대장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꼬마 아가씨, 수도에서 친구를 사귀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랍니다. 어떤 유형의 사람을 친구로 삼곤 하나요?”
카트리나가 질문을 건네며 오믈렛을 나이프로 썰어 입속에 넣고 우물거렸다.
“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친구는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요.”
레스티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삼촌과 지낼 때는 친구를 사귈 수 없는 환경이었고, 베르체스터 성에는 레스티아 또래의 아이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말에 조엘과 마티어스는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레스티아의 곁에 또래 친구를 한 명도 붙여 두지 않았다는 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막연하게 리시언이 곁에 있으면 됐겠지, 싶었지만 동성 친구와는 또 다른 문제니까 말이다.
“뭐야. 정말 문제 있네. 하여간 베르체스터의 남자들이란 인정머리가 없어.”
카트리나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포크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레스티아의 앞에 있는 초대장들을 카드를 정리하듯 추려 내기 시작했다.
“내가 이래 봬도 수도의 사교계는 다 꿰고 있거든. 마안의 록베스트가 필요한 일이 여간 많아야지. 그러니까, 지금 꼬마 아가씨가 사귀어도 좋을 만한 친구는 이 정도일 거예요.”
얼마 지나지 않아 수북했던 초대장 사이에서 대여섯 장의 초대장이 추려져 레스티아의 눈앞에 놓였다.
“자, 한번 골라서 만나 봐요. 무척 재미있을 테니까. 친구랑 수다 떨다 보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무척 좋아.”
“뭐야! 눈도 안 좋으면서 이걸 어떻게 골라낸 거야?”
마티어스가 신기한 듯 그 모습을 바라봤다.
“손끝으로 가문의 인장 정도는 읽을 수 있단다.”
카트리나는 편지를 빼앗아 가려는 마티어스를 저지하고는 레스티아의 손에 편지를 쥐여주었다.
레스티아는 얼떨결에 편지 꾸러미를 받아 들고 그것을 한 장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중에 레스티아의 시선을 사로잡은 초대장이 하나 있었다.
다른 초대장에 적혀 있는 유려한 글씨들과 달리, 삐뚤빼뚤 어설픈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베르체스터 영애, 꼭 만나 뵙고 싶어요.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글라리엔 저택에 방문해 주시겠어요?
무척이나 어설펐지만, 신경 써서 적어 내려간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기묘한 편지였다.
레스티아가 한참을 그 편지를 바라보자, 카트리나가 말했다.
“꼬마 아가씨, 그 초대장이 마음에 들어요? 어디 보자, 안젤라 글라리엔이 보낸 초대장이네요.”
“글라리엔?”
가문의 이름을 들은 조엘과 마티어스가 그 편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글라리엔.
미래를 예언할 수 있으나, 인생의 절반 이상을 제 의지와 상관없이 잠들어 있어야 하는 마법사 가문이었다.
“안젤라는 글라리엔 백작가의 외동딸이랍니다. 꼬마 아가씨랑 동갑이고 꽤 귀여운 아이야. 최근 3년간 잠들어 있다가 이제 깨어난 모양이네.”
“네? 3년이나 잠들어 있었다고요?”
레스티아는 깜짝 놀랐다.
“그래. 글라리엔은 꿈속에서 미래를 보는 마법사들이니까, 제 의지와 다르게 잠들어 있을 수밖에 없답니다.”
그렇다면 편지에 쓰여 있는 삐뚤빼뚤한 글자체는 글씨 연습을 많이 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
안젤라의 시간은 잠들기 전의 시간에 멈추어 있는 게 분명했다.
레스티아는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으흠. 글라리엔이라면 곁에 두어도 나쁘지 않겠는걸. 마법사 가문 중에 제일 무탈하고 안전한 편이지.”
조엘이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글라리엔의 예언은 기묘했다.
지나치게 추상적이었기에 해석에 따라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록베스트가 가진 진실의 마안처럼 절대적인 공신력을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마법사 가문임에도 자연스럽게 한미한 가문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잘 놀다가 갑자기 잠들어 버리는 친구라니, 그게 무슨 재미야?”
마티어스는 레스티아가 안젤라를 만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레스티아가 정을 붙였다가 상처받을까 내심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스티아는 만나 보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저는 만나 보고 싶어요.”
분명 오랜만에 잠에서 깨어나서 하고 싶은 게 많았을 텐데, 자신을 꼭 만나고 싶다고 하니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삐뚤빼뚤한 글자체가 풍기는 분위기가 정겹게 느껴졌다.
얼마 전의 제 모습도 생각나고 말이다.
“같이 글공부를 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레스티아가 덧붙인 말에 모두가 피식 미소를 흘렸다.
“어머, 꼬마 아가씨. 친구를 만나 공부할 생각을 하다니, 그건 친구의 의사도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 그런가요?”
카트리나의 말에 레스티아의 볼이 수줍게 붉어졌다.
“그럼, 꼭 물어보고 할게요.”
레스티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차, 싶어 조엘과 마티어스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런데 오라버니들, 제가 글라리엔 영애를 만나러 가도 될까요?”
쌍둥이들은 동시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럼, 레스티아. 네가 못할 건 없단다.”
“맞아, 리티. 하루 정도는 양보해 줄게. 까짓 뭐, 친구가 생긴다고 해도 내가 리티랑 더 친하니까.”
레스티아가 어떤 귀한 선물을 건넸을 때보다도 기대하는 모습을 보이니, 진작 친구를 사귀게 해 줄걸 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 * *
다음 날, 레스티아는 안젤라를 만나기 위해 글라리엔 저택을 방문했다.
그러자 글라리엔 부인이 직접 저택의 문 앞까지 나와 레스티아를 맞이해 주었다.
“이렇게 초대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베르체스터 영애. 저는 안젤라의 어머니 되는 사람입니다. 안젤라의 몸이 안 좋아서 제가 대신 마중 나왔어요.”
글라리엔 부인은 작은 키에 표정 가득 인자함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쓸쓸해 보이는 그늘이 살짝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레스티아는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건네고는 가지고 온 쿠키 상자를 내밀었다.
“어머? 이건……?”
“글라리엔 영애와 함께 먹으려고 가지고 왔어요.”
“고마워라. 맛있는 차와 함께 내가도록 할게요. 유리 온실에 다과 자리를 마련해 두었답니다.”
글라리엔 부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레스티아를 유리 온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첨언했다.
“베르체스터 영애, 안젤라를 소개해 드리기 전에 양해를 구할 것이 있어요.”
“네?”
“알고 계시겠지만, 안젤라는 오랜 시간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해서…… 베르체스터 영애와 동갑이지만 무척 어리숙하답니다. 그 점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들은 레스티아는 손사래 쳤다.
“아니에요. 저 또한 미숙한걸요.”
“베르체스터 영애는 상냥한 분 같네요.”
글라리엔 부인은 레스티아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얼마 안 가 레스티아는 사방이 유리로 뒤덮인 정원에 발을 들여놓았다.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투명한 유리 벽들과 무수히 다양한 식물, 정원 바깥보다 조금 더 높은 온도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레스티아는 그곳에서 휠체어에 타고 있는 소녀와 마주했다.
단발로 자른 짙은 청색 머리카락이 신비한 느낌을 주는 소녀였다.
소녀는 반짝거리는 분홍색 홍채를 레스티아에게 빤히 고정하고 있었다.
레스티아는 그 눈에서 마력을 느끼고는 단숨에 이 소녀가 안젤라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글라리엔 영애.”
그러자 안젤라가 잔뜩 흥분한 듯이 큰 소리로 레스티아의 이름을 외쳤다.
“레스티아!”
“네? 네, 맞아요. 제가 레스티아 베르체스터예요.”
“어떡해! 정말 레스티아야!”
그리고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글라리엔 부인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어머, 안젤라! 이게 무슨 짓이니. 이렇게 예의 없이 굴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미안해요, 베르체스터 영애.”
레스티아는 당황해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글라리엔 영애, 괜찮으세요?”
“응! 난 괜찮아!”
안젤라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밝게 웃었다. 그리고 레스티아의 손을 꼭 잡고는 알쏭달쏭한 말을 내뱉었다.
“꿈 밖에서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게 돼서 너무 기뻐.”
그러자 글라리엔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베르체스터 영애. 제가 곁에 있어도 될까요?”
“네, 저는 상관없습니다.”
레스티아는 글라리엔 모녀와 함께 유리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