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잘 놀다가 여기는 왜 올라왔어? 다시 내려가 봐.”
리시언은 망설임 없이 레스티아에게서 등을 돌렸다.
오빠 노릇은 진짜 오빠들이 있을 때는 할 필요가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리시언이 시킨다고 얌전히 물러갈 레스티아가 아니었다.
레스티아는 잠깐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었다가 평소처럼 조잘조잘 떠들며 리시언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리시언 님도 같이 가요. 식사는 하셨어요? 사과랑 같이 구워 낸 오리 훈제가 있는데 무척 맛있었어요. 리시언 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내려가서 같이 먹어요.”
리시언은 몇 걸음 더 걷다가, 베르체스터 형제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그리고 레스티아를 돌아보며 내심 궁금했던 말을 툭 내던졌다.
“수프 말고 다른 것을 먹은 걸 보니, 이제 안 아픈 모양이야?”
레스티아는 자신을 정면으로 또렷하게 응시하는 황금색 눈을 올려다봤다.
레스티아를 앓아눕게 만들 정도로 수많은 의문점을 만들어 낸 리시언의 홍채는 여전히 신비롭고 아름답기만 했다.
비밀이 숨겨져 있기에 이렇게 특별하게 보였던 걸까.
그 특별한 시선이 레스티아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레스티아는 아차, 싶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네,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어요! 도라에게 들었어요. 계속 간호해 주셨다면서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는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건넸다.
“…….”
원래 이런 식으로 인사했던가.
레스티아가 평소와 다르게 격식을 차린 인사를 건네자, 리시언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갑자기 왜 이렇게 인사해?”
“아, 저도 모르게 그만……. 그, 요즘 예법 연습을 너무 열심히 했나 봐요.”
레스티아는 또 아차, 싶어 허둥거렸다. 이제 리시언을 다른 오라버니들처럼 편하게 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리시언은 여전히 비밀을 감추고 있었고, 레스티아는 그 비밀을 아주 조금 엿본 것만으로 여태까지 쌓아 온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리시언이 무어라 해도, 레스티아에게 리시언은 여전히 소중한 존재였다. 절대로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답지 않게 왜 이렇게 허둥거려. 혹시, 열이 아직 남아 있는 건 아니지?”
리시언이 손을 뻗어 능숙하게 레스티아의 동그란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레스티아는 움찔하며 뒤로 멀어졌다.
리시언은 곧장 미간을 좁혔다.
“왜 그래?”
레스티아가 아주 조금 물러났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그 거리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는 손을 꼭 붙잡고 가지 말라더니만.
“아, 벼, 별거 아니에요! 안 아프다는데, 오라버니들이 자꾸 아프냐고 물어보며 이마를 짚어서 저도 모르게 그랬어요.”
“그래……?”
리시언은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내친김에 신경 쓰였던 것을 더 물었다.
“그런데……무슨 악몽을 꾼 거야?”
“네?”
“너, 아픈 내내 나쁜 꿈을 꾸는 것 같았어. 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지.”
“그게요…….”
레스티아는 볼을 붉히며 자신의 꿈 이야기를 리시언에게 도란도란 털어놓았다.
일전에 날렸던 풍등을 바다가 삼켜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신이 리시언이 만들어 낸 불꽃 나비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는 부러 뺐다. 어쩐지 낯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행이야. 악몽은 아닌 것 같네.”
리시언이 레스티아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는 대답했다.
“네? 악몽이 아닌가요?”
“그래. 바다에 풍등이 도착했다며, 그 덕에 바다의 신이 소원을 들어준 모양이야.”
하긴, 불꽃 나비에 대한 이야기를 빼 버리면 악몽이라 부르기 애매한 꿈이었다.
“봐, 네가 소원을 빌었던 것처럼 모두가 안전하게 베르체스터로 돌아왔잖아. 예지몽이었을 수도 있겠네.”
리시언의 말이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안전하게 돌아왔으니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저는 분명 리시언 님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소원도 빌었는걸요…….’
소원이 이루어졌다면, 왜 리시언은 이렇게 모두와 떨어져서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걸까.
이 모습은 행복한 모습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면, 리시언을 뒤덮고 있는 이 어둑한 분위기가 사라져 버려야 하는 것 아닌가.
리시언의 비밀과 연관이 있을 것 같은 이 음울한 공기가 말이다.
“리시언 님.”
레스티아가 입을 열었다.
“왜?”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이내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리시언에게 묻고 싶은 질문들이 여전히 머릿속에 맴돌았으나,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리시언 님이 숨기고 계신 건 뭔가요?’
역시, 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일어날 일들이 여전히 두려웠다.
오늘은 행복한 하루였다.
오라버니들이 몸이 아픈 자신을 걱정하며 달려와 주었다.
도라의 꾸지람도 다정했고, 처음으로 파티도 해봤다.
음식도 맛있었고, 걱정했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사라진 날이었다.
그리고 리시언은 여전히 자신에게 따뜻하고 자상하기만 했다.
방금 전에도 자신을 피하는 듯했으나, 이내 뒤돌아서서 별것 없는 꿈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고 말이다.
레스티아는 이 모든 것에 조금의 균열도 없기를 바랐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처음 베르체스터 공작가에 오기로 결심했을 때는 자신이 불나방이라고 생각했다.
따뜻하고 빛나는 불꽃에 뭣 모르고 달려들어 타들어 가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여겼는데.
그랬는데, 이제는 처음으로 얻게 된 이 온기들을 아주 조금이라도 놓쳐 버리고 싶지 않았다.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앞에 서서 시끌벅적한 베르체스터 성의 소음들을 머릿속에 새겨 넣듯이 찬찬히 귀담아들었다.
그리고 카트리나가 조언해 준 대로 두 눈을 천천히, 꼬옥 감았다.
지금은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 리시언 님의 일은…… 어른이 되었을 때 물어봐도 늦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리시언의 비밀을 함께 지켜 주기로 결심했다.
“리시언 님.”
“왜 또?”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머릿속에 담긴 생각을 조금도 몰랐기에, 재미있다는 듯이 입매를 비틀었다.
이렇게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레스티아를 보는 것은 어느새 즐거운 일이 되어 버렸다.
“저, 앞으로는 검술 수련을 예전처럼 열심히 못 할 것 같아요. 무리하지 않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래, 다행이네.”
리시언의 무심한 대답에, 레스티아의 아랫입술이 살짝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너무해요. 조금은 아쉬운 척이라도 해 주실 줄 알았는데요.”
“하하, 그래, 아쉽네. 그래서?”
“그러니까 일전에 말씀드렸던 일들은 아주 천천히 해야 할 것 같아요.”
“흐음? 무슨 일?”
“네? 잊으신 거예요? 제가 리시언 님을 검으로 이길 거라니까요!”
“아, 그랬지.”
“마력 중화석도 만들 거라니까요? 그것도 잊으셨어요?”
“그래, 그래. 그랬던 기억이 나네.”
일부러 모르는 척할수록 레스티아의 아랫입술이 통통하게 불어났고, 눈동자가 그렁그렁해졌다.
그 모든 것들이 깜찍해서 리시언은 저도 모르게 놀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까,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기다려 주셔야 해요. 네?”
레스티아의 표정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부탁드릴게요.”
“…….”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부탁이라니. 리시언은 대답을 망설였다.
어차피 1년 후에 베르체스터를 떠날 생각인데, 이런 기약 없는 약속은 모두 의미 없는 것인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을 레스티아에게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아주 조용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것이니까.
레스티아가 베르체스터에 완전히 적응할 그 때에 말이다.
그래서 무심하게 적당히 둘러댔다.
“그래, 천천히 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대답에 레스티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활짝 피어나서, 리시언은 심장이 덜컥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이죠? 기다려 주시는 거예요! 약속한 거예요!”
지금이라도 정정해야 덜 상처 받는 것 아닐까. 그러나 엎지른 말을 주워 담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리티! 거기서 뭐 해!”
“레스티아! 이리 내려오렴.”
계단 아래서 조엘과 마티어스가 레스티아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시야에서 사라진 두 사람이 어지간히도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봐 봐. 다들 너를 찾고 있어. 가 봐.”
리시언이 다시 돌아섰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꿈쩍도 하지 않고 리시언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리시언 님도 가셔야지요.”
“난 안 가. 피곤해.”
“그럼 저도 안 갈래요.”
“파티를 즐겨. 처음 하는 파티잖아. 조엘이 엄청 신경 썼다고.”
“하지만, 그렇지만, 저는 리시언 님이 신경 쓰이는걸요. 그래서 즐길 수가 없다고요.”
언제 이렇게 고집까지 피울 수 있게 된 건지.
리시언에게 레스티아는 나날이 새롭기만 했다.
“……정말, 어쩔 수 없네. 가자. 데려다줄 테니까.”
결국 리시언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계단을 향해 걸음을 되돌렸다.
“고마워요, 리시언 님.”
레스티아는 활짝 미소 지으며 리시언의 뒤를 다시 쫓았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레스티아가 실수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어어?”
균형이 무너지며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넘어지지 않았다.
리시언이 곧장 레스티아를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리시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레스티아의 허리를 들어 안전하게 땅바닥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불꽃 나비를 만들어 사방을 밝게 밝혔다.
“어두워. 계단을 내려갈 때는 조심해야겠어.”
“네…….”
“그러고 보니 파티장도 생각보다 어둡네. 아무래도 파티가 열린 적이 없는 곳이라 더 그런 것이겠지.”
리시언은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중앙 홀 가득히 불꽃 나비가 나타나 자유롭게 유영하며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간이 폭죽놀이를 하듯 오색 빛을 터뜨렸다.
“와아아!”
“신기해!”
사방에서 감탄사가 쏟아졌고, 흥겨운 음악과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기 시작했다.
레스티아 역시 리시언이 만들어 낸 반짝이는 불꽃들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홀 전체가 다 보이는 계단 위에서는 그 모습이 마치 빛무리로 내려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자, 가자. 또 넘어지지 말고 손잡아.”
리시언이 손을 내밀었다.
“네!”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손을 잡고 그 오색찬란한 빛이 넘실거리는 파티장으로 향했다.
레스티아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고, 리시언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함께 손을 잡고 계단 아래로 향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동화책 속의 해피엔딩을 맞이한 왕자와 공주처럼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