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56화 (56/132)

56화

레스티아는 침대 밖으로 나와 뽀득뽀득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물론, 그 과정 내내 도라의 걱정 어린 꾸지람을 몇 번 더 들어야 했다.

“아가씨,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아가씨의 몸을 도련님들과 똑같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도라,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이제는 정말로 무리하지 않을게요.”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도라의 꾸지람은 애정이 묻어 나와서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 도라에게는 말하면 안 되겠지?’

꾸지람을 들으면 반성부터 하는 게 맞는 건데.

레스티아는 불쑥 솟아난 죄책감을 꼭꼭 숨겼다. 그리고 앞으로는 푹 자고, 규칙적으로 휴식을 취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도라는 몇 번이나 당부를 받아 내고 나서야 레스티아가 방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 주었다.

“리티!”

“레스티아.”

문밖에서 마티어스와 조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카데미 제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확실히 아까 봤을 때보다는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몸은 좀 어떤 것 같아?”

“하나도 안 아파요. 이제 정말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레스티아가 방긋 웃으며 두어 걸음 걸었다. 그러자 마티어스가 질겁하며 부리나케 레스티아를 품 안에 덥석 안아 들었다.

“리티! 무리할 생각 하지 마!”

“네? 그냥 걸었을 뿐인걸요?”

“그러니까, 그러지 마. 이제 겨우 침대에서 일어난 거잖아.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떡해!”

“네에?”

레스티아는 그렇지 않다고 몇 번이나 항변했다. 하지만 마티어스는 호들갑을 떨 뿐, 레스티아를 품 안에서 내려 줄 생각이 없었다.

이번만큼은 조엘 역시 레스티아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 레스티아. 안정을 취해야지. 마티어스의 품이 싫다면 이리 오렴.”

“어딜! 리티는 내가 안고 다닐 거야!”

조엘이 손을 내밀자, 마티어스는 레스티아를 빼앗길 수 없다는 듯 품 안으로 더 꼬옥 안아 들었다.

결국 레스티아는 마티어스의 품 안에 얌전히 공주님처럼 안긴 채 성의 중앙 홀로 향해야 했다.

중앙 홀은 파티 준비로 분주했다. 길고 커다란 식탁이 행렬에 맞춰 설치되었고, 그 위로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많은 음식이 차려지고 있었다.

술이 가득 담긴 커다란 오크 통도 통째로 식탁 옆에 줄지어 놓였다.

한마디로 음식이 산처럼 쌓여 있었기에, 레스티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 이렇게 음식이 많은 건 처음 봐요.”

“성안의 모두가 즐겨야 하니, 이 정도 양은 되어야겠지.”

“승전 기념 파티는 이렇게 성안의 모두와 함께하는 건가요?”

레스티아의 질문에 마티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원래는 파티 자체를 안 해. 이 삭막한 집구석이 파티 같은 걸 할 리가 없는걸.”

“네? 그럼?”

조엘이 사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에 특별히 하는 거란다, 레스티아. 네가 베르체스터에 오고 난 이후의 첫 승전이잖아. 기념할 필요가 있지.”

“네에?”

레스티아는 깜짝 놀랐다.

레스티아가 기사들에게 접어 준 종이꽃 덕에 전쟁에서 이겼다고 제라르가 말해 준 것도 당혹스러웠는데,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파티까지 한다니.

하지만 과하다고 만류할 수도 없었다. 이 파티를 즐기는 이들은 전장에서 제라르와 함께 힘껏 싸워 준 기사들이니 말이다.

“……저, 그럼 기사님들도 모두 베르체스터 성으로 돌아오신 건가요?”

레스티아가 주변을 둘러보다 물었다.

“큰형님께서 먼저 오셨어. 나머지는 천천히 온다고 했으니, 이제 다들 슬슬 도착할 때가 됐겠는걸.”

“그래, 리티! 보러 가자! 인원이 많으니까 그것도 구경할 만해.”

마티어스가 신이 난 듯, 레스티아를 껴안고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높다란 테라스에서는 성 앞의 공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해가 지고 있는 공터는 어둑어둑했다.

하지만 잠시 후, 공터에 일순간 빛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 빛 무리가 거대한 마법진의 형태로 모양을 바꾸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진에서 사람들의 인영이 나타났다. 베르체스터 기사단이었다.

그들이 나타남과 동시에 성안이 금세 떠들썩해졌다.

“리티, 어때? 단체 이동 마법이야. 사람들이 많으니까 규모가 커서 볼만하지?”

“어, 그럼 이 많은 인원이 모두가 이동 마법을 써서 온 건가요? 그렇다면…….”

“레스티아, 다시 말하지만 돈이라든가, 안전 문제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란다.”

레스티아가 의문을 표하자 조엘이 딱 잘라 말했다.

“자, 그럼 리티! 파티를 즐기러 가 보자!”

마티어스 역시 그에 동의하듯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말이다.

쌍둥이들은 레스티아가 머리 아픈 일은 잊고 즐겁고 재미있는 부분만 취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희미해져 가는 마법진을 바라보며, 마석과 마도구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원리라서 위험한 걸까? 마석은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 거지? 마법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

쌍둥이들의 바람과 다르게, 이미 레스티아에게 이 세상은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더 알고 싶은 것들투성이로 보였다. 설령 그것이 위험하더라도 말이다.

* * *

중앙 홀은 금세 사람이 가득 들어차서 북적북적해졌다.

기사단을 비롯해 성내에 있는 대부분의 가신들이 착석했고, 레스티아 역시 마티어스, 조엘과 함께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얼마 안 가 제라르가 홀에 모습을 드러냈다.

좌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제라르에게로 집중됐다.

그는 상석으로 걸어와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헤일록이 건넨 술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높이 들었다.

그러자 가신들도 일제히 자신이 들고 있는 잔을 머리 위로 올렸다.

유리로 만들어진 잔들은 샹들리에가 발하는 빛을 받아 별 무리처럼 반짝였다.

레스티아가 그 광경을 보고 주변을 두리번대자, 조엘이 피식 웃으며 레스티아의 손에 작은 잔 하나를 건넸다.

“자, 레스티아는 이걸로.”

그 안에는 상큼한 향미를 풍기는 오렌지 주스가 가득 담겨 찰랑거렸다.

레스티아는 양손으로 주스 잔을 받아들고 머리까지 들어 올렸다.

혹여 쏟아질세라 그 자세에 바짝 집중해야 했기에 레스티아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사 귀환을 축하한다, 제군들.”

제라르가 짧게 축사를 건넸다.

그와 동시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서북의 사자에게 충성을!”

목청껏 쾌활하게 소리치는 이들의 얼굴에는 생동감이 가득했다.

레스티아는 그제야 모두가 안전하게 베르체스터 성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 축사를 시작으로 승전 기념 파티가 시작됐다.

모두가 준비된 음식을 즐겁게 먹으며 떠들썩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다들 어찌나 술을 잘하는지, 가득 쌓여 있던 술통들이 차례차례 바닥을 드러냈다.

어느새 아코디언을 베이스로 한 경쾌한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고, 그 음악에 맞춰 기사들과 사용인들이 한데 모여 다 함께 춤을 췄다.

더없이 유쾌하고 즐거운 풍경이었다.

“리티! 우리도 춤추자!”

마티어스가 콧김을 뿜으며 레스티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레스티아, 그럼 나도 다음 춤을 예약해도 될까?”

그에 질세라 조엘도 레스티아에게 춤을 신청했다.

하지만 레스티아는 그 누구와도 춤을 출 수 없었다.

“무리하지 마라.”

제라르가 칼같이 쌍둥이를 막아 세웠기 때문이었다.

“형?”

“형님?”

하지만 이번만큼은 두 사람도 제라르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확실히 레스티아는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몸이었으니 말이다.

분위기에 휩쓸려 레스티아의 첫 춤 상대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잠시 그 사실을 잊을 뻔했다.

“오라버니들, 저는 괜찮아요.”

레스티아가 수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제라르가 레스티아의 어깨를 살짝 잡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게 했다.

“전부 해낼 필요 없다. 내가 지시한 일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항상 해석이 필요한 제라르의 말이었는데, 레스티아는 이번만큼은 그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전에 노력하라고 했던 말을 신경 쓰고 계셨구나. 내가 아픈 건 제라르 오라버니의 탓이 아닌데.’

레스티아는 제라르의 말을 따라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네, 무리하지 않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씩씩한 대답에 제라르는 대답 대신 가볍게 제 턱을 쓰다듬었다.

“저, 그런데 부탁드릴 게 있어요.”

“부탁?”

처음으로 레스티아가 부탁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자, 세 명의 베르체스터들의 이목이 자연스레 집중됐다.

“오라버니들에 대해 잘 알고 싶어요.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는지, 생일은 언제인지 같은……. 가족이라면 알아야 할 것들이요. 제게 들려주실 수 있나요?”

“어렵지 않은 부탁인걸.”

“그래. 리티, 다 물어봐! 내가 전부 대답해 줄게!”

그 부탁을 시작으로 도란도란 이야기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머, 이렇게 베르체스터 일가가 모여서 화목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이렇게 승전 기념 파티를 하는 것도 신기했는데 말이지.”

“역시, 레스티아 아가씨가 오신 후부터 분위기가 확 바뀌었어.”

담소를 나누는 베르체스터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화기애애해 보였기에 가신들은 그 진풍경으로부터 시선을 떼어 내지 못했다.

“…….”

한편, 리시언은 중앙 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계단 난간에 팔을 기댄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스티아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제 오라버니들과 조곤조곤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네.’

리시언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네가 잠들어 있을 때, 네 오라버니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보여 줄 수 없어서 아쉬울 정도야.’

레스티아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하자마자 이렇게 단걸음에 모두가 달려올 줄은 몰랐다.

-리시어어언! 리티가 왜 아픈 거야! 설명해!

마티어스는 예상대로 세상이 떠나갈 듯 소리를 내질렀지만.

-역시…… 무리한 모양이군.

제라르는 처음으로 죄책감을 느낀 듯한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침울해 했다니, 속상한걸. 레스티아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어.

파티라고는 참석만 해 봤던 조엘이 승전 기념 파티를 열자는 제안을 했고 말이다.

리시언은 그제야 레스티아의 손을 놓아줄 수 있었다.

자신보다 진짜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그리고 자신 역시 그동안 레스티아의 병간호를 하느라 미루어 둔 일도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레스티아에게 말해주지 않고 자리를 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리시언 님! 항구에는 잘 다녀오셨어요?”

어느새 레스티아가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계단 위로 올라와 리시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계단 아래서 못마땅한 얼굴로 리시언을 바라보는 세 형제의 표정은 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