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개강을 맞이한 황립 아카데미는 분주했다. 어린 신입생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고, 재학생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조엘이 있었다.
그는 대강당에 서서 재학생들을 대표해 새 학기를 맞이하는 짧은 연설을 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단번에 좌중을 사로잡는 그 연설에 재학생은 물론이고 교수, 교직원 들까지 모두 넋을 놓고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지 못했다.
“세상에, 조엘 님은 방학 사이에 더 멋져지신 것 같아.”
“정말 말도 안 돼. 어떻게 저렇게 해가 갈수록 빛나시는 걸까?”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감탄사를 터뜨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조엘 님은 조기 졸업이 가능하시지 않아? 이미 오래전에 모든 과목을 섭렵하셨다고 들었는데.”
“몰랐어? 학생 시절을 평범하게 즐기고 싶다고 조기 졸업은 거절하셨잖아.”
“정말? 역시 대단하신 분이야.”
조엘은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싶었으나, 이미 모두가 조엘이 평범한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뛰어난 두뇌, 수려한 외모, 사교성과 천재성까지 두루 갖춘 인재가 평범할 리 없었다.
거기에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마법사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어? 그런데 저분은 누구지? 조엘 님과 닮았는데?”
“세, 세상에. 저분을 아카데미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의외의 인물이 대강당 복도에 서 있었다. 바로 마티어스였다.
그것도 아카데미 제복 차림에, 가방까지 메고 있는 모양새였다.
약간 느슨하게 풀어 둔 넥타이와 양쪽 귀에 잔뜩 끼고 있는 녹색 피어싱이 아니었다면, 조엘과 헷갈릴 지경이었다.
“저기, 마티어스 님은 자퇴하신 것 아니었나?”
“나도 이제 알았는데, 복학하셨대.”
“어? 어쩌다가?”
“그건 잘 모르겠는데, 분위기가 많이 바뀌신 것 같지 않아?”
확실히 마티어스는 이전과 다르게 차분한 상태였다.
과거에는 아카데미 제복도 제대로 안 입고, 수업도 잘 안 나왔었다. 특히나 이런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기분이 나쁘면 기물 파손도 아무렇지 않게 해 버렸기에, 감히 다가설 수 없는 존재로 악명이 높았다.
학생들은 그 기물 파손이 땅 속성 마법사의 기분이 저절로 마법으로 발현된 결과라는 걸 몰랐기에 마티어스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려고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조엘과 닮았으면서도 정반대의 위험한 매력을 가진 터라 시선을 쉽게 떼어 낼 수 없었다.
그때, 시선을 느낀 마티어스가 한걸음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학생들에게로 다가섰다.
“뭘 봐?”
마티어스를 힐끗힐끗 훔쳐보다 딱 걸린 학우는 울상이 되어 버렸다.
“아, 아니 그게…… 너무 멋지셔서 저도 모르게 쳐다봤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마티어스는 새하얀 치아가 훤히 보이도록 히쭉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 가방 되게 멋지지?”
“네?”
“막냇동생이 사 준 거야.”
마티어스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등에 매달려 있는 가방을 그 학생이 더 잘 볼 수 있도록 뒤돌아섰다.
“부럽지? 이해해.”
그러고는 훌쩍 지나쳐 버렸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마티어스 베르체스터가 어린아이처럼 가방을 자랑하고 떠나다니.
모두가 입을 떡 벌리고 마티어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 *
“조엘 님! 오늘 연설도 수고하셨어요!”
조엘은 연설을 끝마치고, 자신을 둘러싼 학우들과 가볍게 담소를 주고받았다.
그들 대다수는 조엘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귀족 영애들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조엘은 훌륭한 신랑감이었으니 말이다.
“고맙습니다, 영애. 오늘 착용하신 머리띠가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어머, 정말요?”
조엘이 건넨 칭찬의 말을 들은 귀족 영애의 볼이 붉어졌다.
평소에도 신사적인 태도로 대화를 잘 받아주는 조엘이었으나, 이런 식으로 장신구나 옷을 칭찬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의 칭찬을 받은 귀족 영애는 조엘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인가 하여 설렜다.
하지만 조엘의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이 가득했다.
‘저 머리띠는 레스티아에게도 잘 어울리겠는걸. 더 좋은 걸로 하나 사서 보내야겠어.’
관심이 있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한껏 꾸민 여자 학우들 사이에 서 있으니 저도 모르게 레스티아에게 줄 선물들이 줄줄 떠올랐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레스티아에게 입혀 보고 싶은 것들투성이였다.
“참, 조엘 님! 여동생이 생기셨다면서요? 베르체스터 공작가에 여자아이라니. 정말 신기하네요.”
귀족 영애 하나가 화제를 바꿨다. 조엘의 눈꼬리가 저절로 부드럽게 말아 휘었다.
“벌써 소문이 돌았나 봅니다.”
누가 레스티아에 관한 소문을 이리도 자세히 알고 퍼뜨린 것일까.
생각보다 조용하게 지내고 있는 황태자가 신경 쓰였으나, 조엘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럼요! 얼마 전에 베르체스터 공작 영애의 이름으로 장난감 공방을 하나 인수하셨다고 들었어요. 제 동생도 그곳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 한답니다.”
“맞아요, 그 공방. 돈을 몇 배를 불렀는데도, 장난감을 팔지 않는다더군요. 고아들에게 우선 제공되기 때문이라니. 저희는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제 동생의 뜻이 그러하니까요.”
조엘은 그들의 투정 어린 목소리에 짧게 대답했다.
내심 레스티아가 얼마나 대견한 생각을 가지고 공방을 인수했는지, 잔뜩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더 이상 레스티아에 대한 정보를 타인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대답을 곤란함으로 잘못 해석한 이가 허튼 말을 내뱉고 말았다.
“조엘 님, 우려가 크시겠어요. 역시 동생분 출신이…… 빈민가에서 오래 살았던 분이라 그런지 생활이나 사고방식 같은 것이 귀족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것이겠지요.”
조엘의 시선이 저절로 그 말을 내뱉은 이에게 고정됐다.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숨을 멎게 할 정도로 냉담한 기운에, 실언을 한 학우는 그 자리에 굳은 채 멈추었다.
“시, 실언했습니다. 사죄드릴게요.”
“무례는 이번 한 번만 용서하도록 하겠습니다. 착한 제 여동생을 봐서 말입니다.”
조엘은 싸늘한 기운을 감추지 않으며 그 무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것과 동시에 차가운 칼바람이 무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사교적인 조엘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 아카데미가 종일 들썩였다.
베르체스터 공작가에 나타난 막내 여동생이 그들에게 어떤 존재길래, 항상 다정하던 조엘이 여동생 이야기에 일순간에 차가워지고, 아무도 길들일 수 없는 존재라 여겨졌던 마티어스가 여동생 얘기를 꺼낼 때마다 온순한 양이 되는 건지.
레스티아에 대한 소문은 야금야금 커지고 있었다.
* * *
조엘과 마티어스는 수업이 끝나는 대로 기숙사로 돌아왔다.
수도에 있는 대저택에서 지내도 되는 일이었으나, 평범한 학창 시절을 누리기로 결정한 조엘은 기숙사 생활을 선택했다.
마티어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조엘의 곁에 함께했고 말이다.
두 사람은 기숙사에 들어오자마자 자신들의 앞으로 온 우편물을 살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레스티아의 편지를 추려 냈다.
“리티! 내 동생! 또 이렇게 답장을 해 주다니! 너무 좋아!”
마티어스는 레스티아의 편지를 손에 들고 방방 뛰었다.
“마티어스, 진정하고 앉아. 편지를 읽는데 정신 사납잖아.”
요즘 조엘과 마티어스의 아카데미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과는 레스티아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갈수록 수려해지는 레스티아의 글씨체와 단어 사용이 어찌나 신기하고 귀여운지, 지켜보는 보람이 나날이 커졌다.
“조엘! 봐 봐. 리티가 이번에 나한테 편지를 세 장이나 써 줬어. 너는 몇 장이야?”
“나도 세 장이야.”
레스티아는 두 사람에게 항상 동등한 분량으로 편지를 보내 왔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건만, 이리도 신경 쓰다니.
그 마음 씀씀이가 상냥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조엘은 레스티아의 편지를 읽고는 곱게 다시 접어 봉투 안에 넣었다.
그리고 천으로 꽁꽁 싸여 배달 온 우편물을 잡아 들었다.
“조엘, 그건 뭐야?”
마티어스가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다. 조엘이 대답 대신 천을 풀었다.
그러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캔버스에 담긴 레스티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뭐야! 이거 리티 초상화잖아!”
“헤일록에게 완성되는 대로 한 점 보내라고 했지.”
“뭐? 치사하게 너만?”
“마티어스, 동생의 귀여움은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거야.”
조엘은 그렇게 말하며, 바람의 마법을 써서 레스티아의 초상화를 둥실둥실 띄워 자신의 책상 위로 올라가게끔 했다.
자신만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말이다.
“너, 원래 이렇게 치사했던가?”
마티어스는 줄곧 자신이 조엘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쌍둥이니까.
그런데 요즘 들어 도통 모르겠다 싶었다.
레스티아에 대한 일에는 유독 치졸하게 구는 것 같았다.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됐다, 됐어. 나는 헤일록에게 더 큰 거 보내 달라고 할 거니까.”
마티어스는 콧방귀를 뀌며, 레스티아에게 답장을 보내기 위해 필기구를 꺼내 들었다.
나머지 우편물은 확인도 안 한 채였다.
오로지 조엘만이 우편물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다가 붉은 봉투에 들어있는 속달 우편물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건, 리시언에게 온 편지군.”
“리시언이? 웬일이래? 몰라. 리티가 보낸 편지 아니면 관심 없어.”
마티어스의 상체가 탁자 위로 털썩 쓰러졌다.
“아, 리티 보고 싶다! 머리카락 쓰담쓰담 하고 싶어. 방학까지 언제 기다리지? 다시 자퇴하고 싶다!”
그리고 손을 쭉 뻗고 허공에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조엘은 그런 마티어스가 한심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리시언이 보낸 편지를 뜯었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뜨더니, 편지를 그대로 내팽개치다시피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뭐야? 조엘? 왜 그래?”
마티어스는 의아해 하며 심드렁하게 편지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조엘의 뒤를 쫓았다.
“나도 같이 가!”
리시언이 보내온 편지 속에는 레스티아가 아프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물론, 단순한 몸살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는 이야기도 덧붙어 있었다.
하지만 쌍둥이들은 생각보다 몸이 더 먼저 움직였다.
레스티아가 정말 건강한지 본인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