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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52화 (52/132)

52화

리시언은 아버지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아빠……?”

하지만 아버지는 설명도 해 주지 않은 채, 리시언을 품에 안고 다급하게 밖으로 벗어났다.

지하 수로는 이미 반파되어 천장 위로 밤하늘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상태였다.

맑은 공기를 쐬자, 리시언은 그제야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콜록콜록 기침을 두어 번 내뱉고는 아버지의 옷깃을 끌어당기며 질문했다.

“엄마는? 유모는 어디 있어?”

“…….”

아버지는 리시언의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잠시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더니, 리시언을 안고 있는 남은 한쪽 팔에 힘을 조금 더 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몸을 낮추고 달리기 시작했다.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멀리멀리.

그렇게 한참을 달리기만 하던 아버지가 숲 사이 비탈길에 우뚝 멈추어 섰다.

도착한 곳에는 검은색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곧바로 마차의 문이 열리고, 옅은 레몬 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어 올린 귀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체스터 공작 부인, 아르멜다였다.

그녀는 리시언과 그의 아버지를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당신! 괜찮아요? 팔이…….”

“아르멜다,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르멜다의 품으로 리시언을 넘겼다.

아르멜다는 리시언을 안아 들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 아이가 황녀님의…….”

“예, 절반은 제 피를 이었으나, 황족입니다.”

아르멜다의 품에 안긴 아이는 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와 똑같은 금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흑단 같은 새까만 머리카락과 고귀함이 느껴지는 외모는 황녀를 그대로 닮아 있었다.

아르멜다는 인상을 찌푸리고 다급하게 되물었다.

“황녀님은 어디에 계시죠? 3년 만의 재회가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어요.”

아르멜다는 아주 어려서부터 황녀의 시녀로서 그녀와 친하게 왕래하던 사이였다.

하지만 말이 시녀였지, 아르멜다의 건강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되레 황녀가 그녀를 챙겨야 할 때가 더 많았다.

그동안 사교계 활동을 하며 크고 작게 입은 은혜가 너무 많았기에, 아르멜다는 황녀를 자신의 친자매처럼 생각해 왔다.

그랬던 황녀가 3년 전 말도 없이 갑작스레 수도에서 모습을 감춘 탓에 여간 섭섭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아르멜다가 건강상의 문제로 요양을 위해 남부 지역에 내려온 오늘에야 연락이 닿았다.

도피를 도와 달라는 이야기였다.

자칫하면 정치 싸움에 얽혀 위험에 처할 수 있었으나, 아르멜다는 기꺼이 나섰다.

하지만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황녀는 보이지 않고, 그녀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제 품에 쥐어졌다.

그것도 황가가 만들어 낸 괴물이라 불리던 남자와의 아이였다.

황녀가 그 괴물과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헛소문이 정말로 사실이었던 건지.

머릿속이 혼란한 와중에 그 괴물이 말했다.

“……황녀님께서는 끝까지 이 아이를 지키려 노력하셨습니다.”

그 말에 함축된 의미가 너무나도 많아서, 아르멜다는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품 안에는 황녀의 아이가 안겨 있었다.

“그럼, 아이를 부탁합니다.”

“……당신은? 당신도 몸을 피해야 하지 않나요?”

“추적당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아이가 안전할 수 있도록 끝을 내야 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투박한 손가락으로 리시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주 느릿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엄중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공작 부인을 따라가거라, 리시언.”

리시언은 충격받은 듯 눈을 크게 뜨고 작은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싫어. 엄마는? 유모는 어디 갔어?”

하지만 대답 대신 당부의 말이 돌아왔다.

“명심하거라. 아무도 너를 찾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숨죽여 살아야 한다.”

“싫어!”

리시언은 두려웠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유모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두 번 다시 아버지를 못 볼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양손으로 떨어져 나가는 아버지의 커다란 손을 붙잡은 채 놓지 않았다.

“같이 가. 같이 갈 거 아니면 가지 마. 혼자는 싫단 말야!”

“안 돼. 가거라! 어서.”

하지만 아버지는 리시언의 작은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늘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처음으로 보는 냉정한 모습이었다.

표정은 험악하고 단호했다.

리시언은 아버지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항상 느슨하게 풀린 표정으로 어머니의 말 한마디에 꼼짝도 못 하고 허허실실 웃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차갑게 리시언의 손을 뿌리치고는 그대로 어두운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리시언은 멍하니 그 어둠을 응시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럴 수는 없었다.

“이리 오세요, 공자.”

아르멜다가 마차 안으로 리시언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싫어! 안 가!”

리시언은 맹렬히 거부했다.

이대로 가족들을 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어른을 상대로 할 수 있는 반항은 전무했다.

작은 소년은 마차 안에 강제로 태워졌고, 마차는 그와 동시에 거칠게 비탈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리시언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법과 검기가 맞부딪히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마법과 브리엔의 검기였다.

그러기를 몇 번.

리시언은 더 이상 브리엔의 검기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력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그 감각이 너무나 오싹하고 무서워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리시언의 기분이나 상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마차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반나절 이상 멈추지도 않고, 달리고 달렸다.

아르멜다는 몸이 안 좋은 듯 연신 식은땀을 흘렸지만, 멈추지 않고 리시언을 품에 안은 채 속삭였다.

“이제부터 저를 어머니라고 부르셔야 합니다.”

그 말에 리시언은 울컥해서 소리쳤다.

“아니야. 엄마가 아니야!”

리시언의 어머니는 오직 한 사람이었다.

유모라 부를 수 있는 사람도 한 사람뿐이었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도 한 사람뿐이었다.

다른 누군가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그럴수록 리시언을 품에 더 꼭 끌어안았다.

“저를 따라가기로 아버지와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약속한 적 없어.”

“지금이라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요.”

희생이라는 단어가 익숙지 않아서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그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리시언은 알 것만 같았다.

도망치라고 소리치던 어머니의 절박한 표정.

숨바꼭질이 끝날 때까지 숨어 있으라는 유모의 부탁.

아무에게도 정체를 들키지 말라 말하던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

그 모든 것들이 마음의 빚이 되어 무겁게 자리 잡았다.

* * *

“공자, 이제부터 그대를 아들 대하듯 하겠어요.”

마음을 졸인 끝에 안전하게 베르체스터 성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탄 아르멜다가 리시언을 마주했다.

“…….”

리시언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르멜다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리시언,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니?”

그녀는 리시언의 앞에 속성 마력 중화석을 꺼내 들었다.

물, 불, 땅, 바람.

총 네 가지의 마력 중화석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탁자 위에 놓였다.

이것들은 베르체스터 가문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앉아 있는 금안의 소년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리시언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것을 바라봤다.

“사용해 보렴.”

아르멜다가 말을 꺼내자마자, 리시언이 작은 손을 뻗어 마력 중화석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중화석들이 일제히 빛을 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안에 담긴 마력들이 일제히 리시언의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중화석들은 모두 잿빛으로 변해 버렸다.

“좋아. 잘했어. 잘 알고 있구나.”

아르멜다는 칭찬의 말을 건네고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리시언의 모습은 제 아버지와 똑같았다.

그는 황가가 만들어 낸 괴물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황가가 모든 인간이 마법을 쓸 수 있었던 고대의 과거를 재현해 내겠다고 자행했던 인체 실험.

그 남자는 그 반인륜적인 인체 실험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성공작이었다.

아니, 성공작이라고 단언하기엔 어려웠다. 역사책에 나오는 과거의 인간들처럼 모든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대신 그는 속성 마력 중화석에 담긴 힘을 제 것으로 흡수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베르체스터 공작가는 그런 그를 경멸했다.

자신들과 닮았으면서도 기이한 모양새이지 않은가.

하지만 아르멜다는 왜 황녀가 자신에게 리시언을 맡길 생각을 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이토록 비슷하니, 숨겨 두기에 딱 적절해 보였다.

‘황녀님이 그 괴물에게 흥미를 가진 건 잠깐의 충동이라고 생각했는데.’

리시언의 아버지는 괴물이라 불렸지만, 그의 껍데기는 상당히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은발과 금안을 가진,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남자로 이런저런 공로를 세워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는 황가의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황녀가 그런 미천한 자와 아이를 낳을 줄이야.

그것도 괴물의 특성을 그대로 이은 아이를.

마법은 피로 전승된다.

익히 아는 것이었으나, 그 괴물의 피도 이렇게 전승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왜 황녀님께서 수도에서 모습을 감추었는지 알 것 같아.’

리시언은 여러모로 출신 성분이 복잡한 아이였다.

황족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황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괴물의 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황가의 마법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아이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부모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에 더더욱 위험했다.

아르멜다는 마음을 굳게 다잡으며 리시언에게 부탁했다.

“리시언, 네 금안은 너무 눈에 띄어. 눈의 색을 바꿀 수 있겠니? 네 아버지는 할 수 있던 걸로 알아. 마력은 눈에 드러나니까, 드러나게끔 바꿀 수도 있다고 했었지.”

“……무슨 색으로?”

리시언이 짧게 물었다.

아르멜다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붉은색으로 바꿔 보렴.”

이 아이가 베르체스터로서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는 현 베르체스터 공작인 자신의 남편을 닮아야 설득력이 있었다.

“…….”

리시언은 아르멜다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금안은 사라지고 선명한 홍안이 드러났다.

흑발에 붉은 홍채가 남편과 닮은 모양새라 아르멜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적당히 말을 맞추면 크게 의심을 살 일은 없을 것이다.

“당분간은 이런 모습으로 지내 주면 좋겠구나.”

“불편해.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해?”

리시언의 물음에, 아르멜다는 기약 없는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베르체스터에 있는 동안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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