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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위험한 오빠들-50화 (50/132)

50화

“아가씨! 오셨습니까!”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이제는 아가씨가 검술 수련장에 안 계시면 섭섭할 것 같습니다!”

호위 기사들이 검술 수련장으로 나온 레스티아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레스티아도 최대한 밝게 미소 지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인사를 받은 호위 기사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리시언 역시 레스티아를 보자마자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

“너.”

심지어 리시언은 조금 화가 나 보였다.

레스티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했기 때문이었다.

핏기 하나 없이 백지장 같은 얼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레스티아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리시언 님? 왜 그러세요?”

“나 봐 봐.”

레스티아의 앞으로 리시언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왜, 왜요?”

레스티아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리시언은 양손으로 도망치려는 레스티아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지금 아픈 거잖아.”

“아, 아니에요. 아프지 않아요.”

“아니긴.”

리시언은 어금니를 꾹 깨물더니, 손을 뻗어 레스티아의 이마를 짚었다.

“읏.”

이마에 닿은 리시언의 손이 너무나도 차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평소에는 따뜻한 리시언의 손이었는데.

황금빛 눈동자도 변함없이 예쁘고 따뜻한데.

왜 손이 이렇게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거지?

“레스티아.”

레스티아의 이마를 짚은 리시언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너, 지금 열이 심해. 이런 몸으로 훈련을 하겠다고 나온 거야?”

“네? 그게…….”

레스티아는 필사적으로 변명 거리를 찾았다.

하지만 변명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짧게 순응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가 아니야. 가서 쉬어.”

“괜찮은데…….”

그 말을 끝으로 리시언이 목소리를 높였다.

“괜찮기는……! 너 지금 전혀 괜찮지 않아. 가자. 방까지 데려다줄 테니.”

리시언이 이렇게 화를 내는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아, 아니에요. 혼자 갈게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리시언이 자신을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레스티아는 화들짝 놀라서 재빨리 뒤돌아섰다.

그런데 그것과 동시에 온 세상이 뿌옇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하늘이 핑그르 돌았다.

코끝이 찡하고 비릿한 향기가 났다.

몸을 지탱하고 있는 실이 끊어지는 것처럼 레스티아는 제 몸의 근육이 느슨하게 풀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레스티아!”

안개가 낀 듯 희미해진 시야에 리시언의 고함에 가까운 외침만이 귓가에 메아리처럼 웅웅 울려 퍼졌다.

* * *

‘몸이 무거워.’

레스티아는 거대한 중력이 느껴지는 물에 푹 잠겨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는 어디지?’

힘겹게 눈을 떠 보니 레스티아는 새카만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깊고 거대한 바다였다.

바다 위를 뒤덮고 있는 하늘 역시 별 한 점 없이 검기만 했다.

‘아, 이건 꿈인 것 같아.’

레스티아는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것도 지독한 악몽이었다.

몸이 아파서 이런 꿈을 꾸게 된 걸까?

드넓고 넓은 바다는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 내며 요란하게 요동쳤다.

그럴 때마다 레스티아는 그냥 그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동동 떠다니기만 했다.

‘바다…… 추워.’

온몸이 으스스 떨렸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감각이 낯설었다.

늘 듣기 좋아했던 파도 소리는 이상하게도 거슬리고 시끄러웠다.

‘깨어나고 싶어. 이런 꿈, 너무 싫어.’

하지만 레스티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파도의 물결을 따라 맥없이 흔들렸다.

‘정말 이상한 악몽이야.’

아무것도 없는 바다는 외로웠다.

몸이 축 처지고 추운 것보다는 그것이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검기만 하던 하늘에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풍등……?’

일전에 리시언과 항구에서 날렸던 풍등이 하늘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꿈이야.’

그래도.

‘바다에 잘 도착했구나, 풍등아.’

어쩐지 대견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과 동시에 풍등이 서서히 바다 가까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

무어라 말릴 새도 없이 파도가 풍등을 집어삼켰다.

작은 빛 하나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안타까움과 함께 바다의 신에 대한 전설이 떠올랐다.

‘바다의 신은 바보야. 불씨를 가지고 싶으면 뭐 해. 결국 저렇게 꺼뜨릴 거면서.’

레스티아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바다가 답했다.

[너는 안 꺼뜨릴 것 같아?]

바다가 말을 하다니.

역시 이상한 꿈이야.

레스티아는 바다에 말했다.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그럼 해 봐.]

‘뭐?’

갑자기 하늘에 수많은 불나비가 생겨났다.

리시언이 몇 번이나 만들어 줬던 나비들이었다.

그리고 검은 파도가 그것들을 삼키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야!’

레스티아가 소리쳤다.

[너는 안 꺼뜨릴 거라며?]

파도 소리가 레스티아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안 돼!’

레스티아는 저 불나비들을 살리고 싶었다.

그런 간절한 생각을 하자, 손 위로 마도서가 나타났다.

‘정말 이상한 꿈이야.’

생각만으로 이런 것이 가능하다니.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레스티아는 마도서를 읽어 거대한 파도를 반으로 갈라냈다.

그러자 바다는 두 쪽으로 갈라지며 육지를 만들어 냈다.

바닷물에서 탈출한 불나비들이 레스티아의 곁을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봐 봐, 나는 지킬 수 있잖아.’

레스티아가 바다에 말했다.

하지만 바다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불나비들이 레스티아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어? 다들 어디 가는 거야?’

소리를 쳐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게 왜 이렇게 슬픈지.

레스티아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싫어.

안 돼.

가지 마.

나를 두고 가지 마.

이 바다는 너무 춥고, 깊고, 외로워. 혼자 여기 남아 있는 건 싫어.

그렇게 외치며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꿈속임을 알고 있는데도 서럽고 또 서글펐다.

이렇게 열심히 지켜 냈는데 대답해 주지 않는 바다가 야속했다.

저를 두고 떠나는 불나비들이 밉기만 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레스티아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걱정 마. 아무 데도 안 가니까.”

누구지?

익숙한 목소리인데.

레스티아는 눈을 뜨려 애썼다.

꿈에서 깨어날 시간인 것 같았다.

그러자 그 목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눈뜨지 마. 괜찮아. 더 자.”

정말 그래도 돼?

내가 잠들면 버리고 가는 거 아니야?

“안 버려. 아무 데도 안 가.”

정말?

“그래.”

레스티아는 착한 아이처럼 그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악몽 같았던 검은 바다는 사라지고, 깊고 포근한 잠이 찾아왔다.

그리고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침대 맡에 리시언이 앉아 있었다.

“리시언 님……?”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손을 꼭 잡은 채 선잠에 빠져 있었다.

설마, 밤새 자신을 간호해 준 걸까.

까칠하게 상한 것처럼 느껴지는 잘생긴 얼굴이 신경 쓰였다.

“정말 죄송해요…….”

레스티아는 작게 사죄의 말을 건네며, 슬그머니 리시언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런데 리시언이 되레 세게 움켜잡았다.

“아얏.”

그래서 레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 비명 소리를 듣고 리시언이 상체를 일으키며 눈을 떴다.

“레스티아?”

“아, 리시언 님.”

리시언은 눈을 뜨기가 무섭게 레스티아의 둥그런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이내 안심한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열은 식은 것 같네.”

“네? 네…….”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무리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듣지 않았냐고 꾸중을 들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생각과 다르게 입가에 작은 미소를 만들어 낼 뿐이었다.

“별일 없어서 다행이야.”

그 미소가 여태까지 봤던 것보다 더 근사하게 느껴져서, 레스티아는 멍하니 리시언을 바라봤다.

손은 여전히 꽉 잡은 채 놓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더 자.”

“일어날래요. 저, 이제 괜찮은걸요…….”

“괜찮기는. 너 엄청 많이 아팠어. 이틀 동안 꼬박 잠들어 있었다고.”

“네? 그렇게 오래요?”

“그래. 그래도 다행히 큰 병이 아니라 스트레스성 몸살이라더라. 왜 그렇게 무리했던 거야?”

리시언은 그렇게 말하며 그제야 레스티아의 손을 놓았다.

“어…….”

따뜻하던 손이 사라져 버리는 감각이 공허하고 아쉬웠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너한테 약을 먹여야 해서 잠깐 놓는 거니까.”

역시,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속마음을 읽는 것이 분명했다.

“그, 그게요.”

조금이라도 변명하고 싶었는데,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됐고. 아, 해.”

리시언은 스푼 가득 갈색 약을 떠서 레스티아의 입속으로 건넸다.

레스티아는 반항 한 번 못해 보고 그것을 그대로 삼켜야 했다.

“윽, 써요.”

“몸에 좋은 약이 쓴 법이니까.”

리시언은 레스티아에게 약을 먹이고, 다시 이마를 짚어 열이 제대로 식었는지 확인했다.

“확실히 열은 많이 내렸네. 약 먹었으니까 한숨 더 자.”

다정한 목소리였다.

레스티아는 목 끝까지 이불을 덮고 누워 수줍게 말했다.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괜찮아.”

“바쁘시지는 않아요?”

“바쁜 거 없어.”

“……고마워요, 리시언 님.”

“안 고마워해도 돼.”

“너무 한심하죠?”

“한심하지도 않아.”

“……여기 계속 계실 거예요?”

“네가 가라고 해도 가지 않을 거니까. 어서 자.”

“고마워요…….”

레스티아는 잠투정을 하듯 웅얼거리더니 까무룩 잠들었다.

리시언은 수건에 물을 적셔 레스티아의 땀을 닦아 냈다.

“…….”

간호라니.

벌써 어울리지도 않는 일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제라르가 부탁했던 적당한 오빠 노릇이란 대체 뭘까.

이게 오빠 노릇이긴 한 걸까?

조엘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서 레스티아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오빠 노릇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단지.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 말만 하는 거야? 너는.”

레스티아가 끙끙 앓는 와중에 외친 말들이 신경 쓰였다.

싫어.

안 돼.

가지 마.

나를 두고 가지 마.

그렇게 외치던 말들이 리시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공작 부인을 따라가거라, 리시언. 아무도 너를 찾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 해. 명심하거라. 드러내지 말고 숨죽여 살아야 한다.

-싫어. 같이 가. 같이 갈 거 아니면 가지 마. 혼자는 싫단 말야!

-안 돼. 가거라! 어서!

윽박지르는 목소리.

그리고 버려지듯 뿌리쳐진 손.

누구도 다시는 잡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 손을 레스티아가 덥석 잡고 놓지 않았다.

리시언은 그 손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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