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며칠 뒤.
레스티아는 날이 샐 무렵 일어나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목검을 챙겨 들었다.
레스티아의 작은 신체에 맞춰 특별히 제작된 목검은 얼마 전에 새로 산 것이라 작은 상처 하나 없이 반들반들했다.
‘좋아. 완벽해!’
레스티아는 오늘부터 리시언에게 선전포고(?)했던 대로 새벽 검술 수련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워낙 분주하게 움직인 탓일까.
옆방에서 상주하는 도라가 인기척을 눈치채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가씨?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신 거예요? 세상에 옷까지 챙겨 입으시고. 어디를 가시려고요?”
“어? 깼어요? 더 자도 돼요! 검술 수련장에 가는 것뿐인걸요.”
“네? 검술 수련장이요? 이 새벽부터요?”
도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레스티아는 한창 성장기였다.
늦게까지 푹 자도 부족한데, 이렇게 새벽부터 일어나 움직이다니.
걱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가씨, 매일같이 말하는 거지만 무리하시면 안 돼요!”
“너무 걱정 마요. 저, 도라가 신경 써 준 덕분에 엄청 튼튼해졌잖아요!”
레스티아가 방긋 웃어 보였다.
확실히 요즘은 베르체스터 공작가에 처음 왔을 때와는 달랐다.
영양가 좋은 음식을 먹고 체계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많이 한 덕일까.
푸석푸석하던 피부와 머리카락도 제 나이에 걸맞게 보송보송하고 생기롭게 변해 있었다.
삐쩍 말랐던 몸도 살이 보기 좋게 올라왔고, 일전에 납치당했을 때 입었던 상처도 지금은 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하는 거 잊지 마세요! 아가씨는 도련님들과 체력이 똑같지 않답니다!”
레스티아는 도라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두어 번 더 들은 후에야 검술 수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손에는 단단히 목검을 쥔 채였다.
“허어?”
“어억?”
“아가씨?”
레스티아의 호위 기사들은 평소처럼 새벽 훈련을 하러 나왔다가 뜻밖에도 레스티아를 마주하고 충격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아가씨! 검술 훈련 따위 쉬엄쉬엄해 달라고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이대로 소드 마스터가 되셔서 호위 기사 따위 필요 없다고 하시면 저희는 어쩌면 좋을지……!”
“혹시 저희가 못 미더우신 겁니까?”
호위 기사들은 훈련도 내팽개치고 레스티아의 주변을 삥 둘러싼 채 울먹거렸다.
“여, 여러분. 그런 게 아니에요!”
레스티아는 땀을 뻘뻘 흘리며 해명에 나서야 했다.
“검으로 이기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열심히 검술을 익혀야 하는 것뿐이에요.”
“예? 검으로 이기고 싶은 사람이 생기셨어요?”
호위 기사들의 눈이 일순간 살벌하게 변했다. 그리고 다 함께 입을 모아 속삭였다.
“저희가 있는 한 아가씨께서 직접 손을 더럽히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녀석을 제거하고 싶으십니까.”
“표적은 말씀만 하세요, 아가씨.”
아무래도 누군가를 살해하기 위해 세운 목표라 착각한 모양이었다.
레스티아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곤란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레스티아?”
리시언이 레스티아를 발견하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레스티아 역시 리시언을 발견하고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리시언 님! 좋은 아침이에요!”
하지만 리시언은 레스티아를 전혀 반기지 않았다.
“너. 설마 정말로 새벽마다 여기에 올 생각이야?”
“네? 당연하죠. 저는 말뿐이 아닌걸요.”
“…….”
“이길 거라고 했잖아요. 두고 봐요!”
레스티아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미소지었다.
그 말에 호위 기사들은 숨을 들이켰다.
“허억. 그 표적이 리시언 님이었어?”
“역시 우리 아가씨야. 리시언 님 정도면 목표로 둘 만하지.”
대견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여간.”
리시언은 팔짱을 낀 채 기민한 눈초리로 레스티아의 상태를 살폈다.
들고 나온 목검이 딱히 레스티아에게 무리를 줄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아침 운동 정도는 해도 괜찮을지도.
그래서 짧게 말했다.
“마음대로 해. 하지만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둬.”
“네!”
레스티아는 착한 아이처럼 대답했다.
하지만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거짓말쟁이에 허풍쟁이로 남고 싶지 않았다.
리시언이 줄곧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 주는 것처럼, 자신 또한 리시언에게 했던 말을 최대한 지켜 볼 생각이었다.
“휴…… 그럼.”
레스티아는 작은 손에 목검을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일전에 검술 스승님께 배운 대로 열심히 도움닫기를 하며 목검으로 열심히 허공을 갈랐다.
그 열중하는 모습이 꽤나 사랑스러웠기에…….
“미……미치겠다. 우리 아가씨.”
“크흑……. 고통스러운 새벽 훈련이 이렇게 심장에 해롭다니.”
“우리 아가씨는 천재가 아닐까? 봐 봐, 아가씨의 목검에서 검기 같은 게 나오는 것 같아. 난 저 검에 맞으면 즉사할 거야.”
호위 기사들은 훈련을 까마득히 있고 주접을 떠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뭣들 하는 거야. 집중해.”
하지만 리시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적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기사의 본분을 되찾고 훈련 태세에 몰입했다.
레스티아는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만큼 최선을 다해 연습했다.
그렇게 레스티아는 정신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검술 훈련뿐만 아니었다.
카트리나가 내준 숙제를 하기 위해 마도서를 공부하는 것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이미 시중에서 연구가 끝난 마도서에 대한 것들이었다.
마석을 사용해서 만들 수 있는 마도구나 마법의 원리가 주 내용이었다.
하지만 레스티아가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는 분야는 마력 중화석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음…… 마도서의 이 내용대로 주문을 외우면, 허공에 떠다니는 마력이 뭉쳐져서 마석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아.’
레스티아는 서재에 조용히 앉아 마석을 만드는 마도서를 읽어 내렸다.
그러자 예전처럼 새까만 마석이 만들어졌다.
‘여기서 불순물을 거르는 것처럼, 일정한 마력만 뽑아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마력 중화석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이론만큼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구현해 내야 하는 점에 있어서, 그 간극이 레스티아의 예상보다 크고 넓었다.
‘역시 마력 중화석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적힌 마도서가 필요한 걸까…….’
마석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갈증은 깊어 갔다.
‘결국, 오늘도 여기까지야.’
레스티아는 한숨을 내뱉으며 마도서를 덮었다.
그때, 똑똑, 하고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집사 헤일록의 목소리였다.
“아, 헤일록. 들어오세요! 무슨 일이에요?”
“초상화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아!”
드디어 그렇게 공들이던 초상화가 완성된 것이었다.
헤일록이 고갯짓을 하자, 화가들이 크고 작은 캔버스를 여러 개 들고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레스티아는 당황했다.
“어……? 주문한 초상화가 이렇게 많았나요?”
“예, 공작님께서 아가씨께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여러 장 그려 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네에?”
한 장인 줄 알았던 초상화가 이렇게 많이 그려졌을 줄이야.
“그럼 완성작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캔버스 위를 덮고 있던 하얀 천을 끌어 내리자 완성된 초상화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레스티아는 완성된 초상화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아, 엄청 잘 그렸어요!”
여러 가지 옷차림새와 자세로 생기롭게 웃고 있는 소녀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저 같지 않은걸요. 저보다 훨씬 예뻐요.”
그 말에 헤일록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그림들은 아가씨의 귀여움과 우아함, 아름다움을 조금도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디에 걸어 둘까요? 정해 주시겠습니까?”
레스티아는 당황한 눈초리로 헤일록을 바라봤다.
“네? 어디에 걸어 둘지 제가 결정해야 하나요?”
“예, 공작님께서는 베르체스터 일가가 모두 자리를 비웠을 때, 성의 모든 결정권은 아가씨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결정권이 제게 있다고요?”
레스티아는 의아했다.
리시언이 있을 텐데, 왜 자신에게 그런 엄청난 것을 맡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자신이 리시언보다 잘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레스티아의 표정에 곤란한 기색이 비치자, 헤일록이 재빨리 말했다.
“아가씨,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은 제가 대부분 처리할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이 초상화들을 어디에 전시해 둘지 정해 주시면 됩니다.”
“음…… 그게요.”
레스티아는 고민에 빠졌다.
초상화는 모두 완성도 높게 그려졌지만, 전부 레스티아가 모델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딱히 전시해 두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헤일록은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인자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마티어스 도련님께서는 성문에 전시해 두었으면 좋겠다고 하시긴 했습니다. 어떠십니까? 저는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싫어요!”
레스티아가 소리쳤다.
그런데 화가들이 슬퍼하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레스티아는 아차, 싶어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초상화는 무척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고, 저희 가족들만 볼 수 있는 곳에 보관해 두고 싶어요. 방법이 없을까요?”
“예, 아가씨. 그럼 지하 금고에 보관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지하 금고요?”
“예, 베르체스터 가문의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입니다. 초상화들도 보관하고 있지요. 함께 가 보시겠습니까?”
베르체스터 성에 그런 곳이 있었다니.
레스티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헤일록이 짝짝 박수를 두어 번 쳤다.
초상화들은 방 안으로 들어왔던 그대로 포장되어 지하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레스티아는 헤일록과 함께 지하 금고로 향했다.
돌로 만들어진 육중한 문이 열리고 미로와 같은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마법 등이 일제히 켜지자, 온갖 보물들이 휘황찬란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레스티아는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화들짝 놀랐다.
각종 그림에 조각품, 무구류에 보석까지. 무엇 하나 존귀해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헤일록은 익숙하다는 듯, 여유롭게 레스티아에게 금고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이쪽부터 저 복도 끝까지는 선대 베르체스터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걸어 두겠습니다, 아가씨.”
레스티아는 전문 관리인의 의견에 따라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레스티아는 이곳에 초상화를 두기로 결정하기를 잘했다 싶었다.
그 덕에 선대 베르체스터 가문의 사람들의 초상화까지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