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역시, 그건 아닌 것 같아.’
리시언이 진짜로 자신을 싫어한다고 해도, 리시언에게 다가가고 싶은 제 마음은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카트리나 님, 괜찮아요. 진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레스티아의 말에 카트리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가요? 뭐, 나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진실에는 눈을 꼬옥 감곤 한답니다.”
레스티아가 카트리나를 바라보며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네? 카트리나 님도 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나요?”
“그러엄. 마법사에게 마법이 본능적인 거라고 해도, 나는 인간인걸. 본능을 거스르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지요.”
카트리나는 양손을 모아서 기지개를 쭈욱 켜고는 말을 이었다.
“으흠, 나는 주로 나쁜 남자를 마주할 때 그래요.”
“나쁜 남자요?”
나쁜 남자라는 말에 레스티아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리시언이 떠올랐다.
위협적으로 타오르는 뜨거운 불꽃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흑발의 소년.
신비로운 금안과 오만한 표정.
너, 라고 부를 때마다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사람.
‘무, 무슨! 아니야! 리시언 님은 좋은 분인걸. 왜 이런 생각을 한 거지. 고작 답장 좀 늦게 받았을 뿐인데!’
레스티아는 자신이 떠올린 괘씸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래, 나쁜 남자. 꼬마 아가씨, 인생의 선배로서 말하건대 나쁜 남자한테 빠지지 말아요. 나처럼 망한다?”
“네? 카트리나 님처럼요?”
카트리나 님은 제라르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것 아니었나?
그녀는 툭하면 제라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종종 제라르를 보러 가야 한다며 수업을 일찍 끝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레스티아는 자연스럽게 카트리나가 제라르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라르 오라버니는 무뚝뚝할 뿐, 나쁜 분이 아닌데.’
레스티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정말 망해요. 그런데 나쁜 남자가 매력적인 걸 어쩌면 좋아.”
하지만 카트리나는 레스티아를 이해시킬 생각이 없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거 참, 아가씨가 이야기를 잘 들어 줘서 자꾸만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되네요. 아가씨가 5살만 많았어도 이것저것 다 말해 버렸을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스스로 결심하듯 말했다.
“뭐, 이미 빠져 버린 이상 별수 있나. 후회할 거리만 남기지 않으면 되는 거겠지.”
“…….”
그 말이 레스티아에게 인상 깊게 남았다.
레스티아가 리시언을 구하기 위해 불이 난 저택에 뛰어들 때도 비슷한 마음이었지 않았던가.
‘맞아. 후회하고 싶지 않아. 리시언 님이 싫다고 분명하게 거절하지 않는 이상…… 곁에 있고 싶어.’
레스티아는 무릎 위에 올라가 있는 두 손을 슬며시 말아 쥐었다.
“자, 수다는 여기까지. 다음 페이지 읽어 볼까요?”
카트리나는 자신이 눈앞의 소녀에게 어떤 가르침을 줬는지 알지 못한 채 수업을 계속 진행했다.
* * *
이튿날, 오후 늦게 집사 헤일록이 레스티아를 찾아왔다.
“아가씨, 무구점에서 주문하셨다는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일전에 리시언에게 선물하기 위해 주문해 둔 소드 노트가 완성되어 베르체스터 성에 도착한 것이었다.
소드 노트는 고급스러운 은색 상자에 깔끔하게 포장된 상태였다.
레스티아는 그것을 품 안으로 꼬옥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헤일록에게 질문했다.
“헤일록, 리시언 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아, 리시언 님께서는 외출하셨습니다. 오늘도 늦으실 거라고 하시더군요. 밤이 늦었으니, 선물은 제가 전해 드릴까요?”
레스티아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베르체스터 영지에 온 이후, 리시언은 너무 자주 외출을 하는 것 같았다.
바로 선물할 수 없어서 아쉬웠으나,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는 생각이 꺾일 정도는 아니었다.
“저, 헤일록. 리시언 님이 오실 때까지 리시언 님의 방 근처에서 기다려도 될까요?”
“예?”
헤일록은 당황했다.
예의범절에 대해 배우고 난 이후부터는, 교과서에서 튀어나온 표본처럼 행동하던 레스티아 아니던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는데’ 싶은 부분까지 철저히 실천해 내는 아가씨였는데, 오늘은 평소 같지 않았다.
“저,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이 선물은 꼭 제가 전해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안 될까요?”
레스티아는 수줍은 듯 볼을 붉히고 부탁했다.
헤일록이 빙그레 웃었다.
레스티아의 모습이 딱 제 나이의 아이처럼 자연스러워 보여서 좋았다.
“예, 아가씨. 리시언 님의 방 근처에 있는 응접실을 이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예의에도 어긋나지 않지요.”
“고마워요, 헤일록!”
레스티아는 그렇게 리시언의 방 근처 응접실에 앉아서 리시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늘도 생각보다 늦으시는걸.’
이번에도 어디쯤 오고 있을까 궁금해서 까치발을 들고 창밖을 내다봤다.
하지만 리시언의 방이 있는 위치에서는 도로가 보이지 않았다.
창밖에는 어두운 망망대해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리시언님의 방은 너무 외곽에 있는걸. 외롭지 않으신 걸까?’
레스티아는 리시언이 성 외곽에 위치한 이곳에서 매일같이 저 새카만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모습을 잠시 상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외로울 것 같았다.
그렇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기를 한참.
“넌 바다를 보는 게 질리지도 않나 봐.”
뒤편에서 리시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 리시언 님! 오셨어요?”
레스티아는 화들짝 놀라서 리시언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선물 상자를 재빨리 등 뒤로 감추었다.
“뭘 그렇게 놀라.”
“아, 아니에요! 제, 제가 놀란 것처럼 보이나요?”
매우 놀란 것처럼 보였다.
딸꾹질을 시작하지 않은 게 기특할 지경이었다.
“…….”
하지만 리시언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레스티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응접실 한쪽에 놓인 소파 스툴을 들어 레스티아가 서 있는 창가로 가져갔다.
레스티아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소파 스툴과 리시언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기다리는 내내 창가에 서 있었던 것 같아서. 이제라도 편하게 앉아서 보라고.”
리시언이 설명했다.
“아! 괜찮은데…….”
“앉아.”
“……네에.”
결국 레스티아는 리시언의 말대로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이렇게 앉고 보니, 뒤늦게 까치발을 들고 있던 발이 얼얼한 상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리시언 님은 좋은 분인걸. 카트리나 님이 말한, 나쁜 남자 같은 게 아니야.’
레스티아는 고개를 들어 리시언을 바라봤다.
리시언은 팔짱을 낀 채, 창가에 기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오늘 리시언은 레스티아를 상대해 줄 모양이었다.
일전에 유령이 나온다는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다르게 말이다.
‘……이번에도 그냥 가 버리실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레스티아는 들고 있는 상자를 꼼지락거리며 만지다가, 용기를 내서 리시언에게 말을 건넸다.
“리시언 님, 제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헤일록이 말해 주던데.”
리시언이 짧게 대답했다.
“아……! 그랬군요.”
레스티아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하긴 헤일록이 말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 선물을 건네주러 왔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걸까?
들고 있던 선물을 등 뒤로 감춘 일이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답장은 이미 줬잖아.”
하지만 다행히 헤일록이 선물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레스티아는 손에 쥐고 있던 상자를 리시언을 향해 쑥 내밀었다.
“이건 뭐야?”
리시언의 눈이 당황한 듯 조금 크게 벌어졌다.
“그게, 리시언 님께 드리고 싶어서 선물을 하나 샀거든요.”
“선물?”
“네, 리시언 님 것만 산 건 아니에요! 이미 다른 오라버니들께도 드렸어요.”
“…….”
“그러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받아 주세요.”
레스티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리시언은 레스티아의 작은 손에 놓인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선물을 받아 들어 포장지를 뜯었다.
그러자 리시언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과 똑 닮은 새카만 가죽을 엮어 만든 소드 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한 디자인에 작은 가넷이 장식된, 실용적이고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
리시언은 가만히 그것을 바라봤다.
“저기, 마음에 안 드시나요?”
리시언이 다른 오라버니들과는 다르게 크게 반응이 없자, 레스티아는 초조해졌다.
“이상한가요? 다른 기사님들이 쓰는 것처럼 화려한 걸 살 걸 그랬나 봐요. 하지만 화려한 건 리시언 님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어.”
리시언은 짧게 답했다.
그리고는 제 허리춤에 있던 검을 빼내 소드 노트를 엮었다.
새카만 가죽은 리시언의 심플한 은색 검에 꽤나 잘 어울렸다.
“정말이야. 그러니까 고개 들어.”
리시언이 고개를 숙인 채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레스티아를 향해 다시 한번 말했다.
그제야 레스티아의 긴장 어린 표정이 해사하게 풀렸다.
“휴, 정말 다행이에요.”
고개를 든 레스티아와 마주하자 리시언은 작게 굳었다.
구름같이 새하얀 머리카락과 수줍게 말려 올라간 입 꼬리, 그 위를 잘 익은 복숭아처럼 물들이고 있는 도톰한 볼살이 사랑스러웠다.
누가 이 아이를 빈민가에서 꽃을 팔던 아이라고 생각할까.
타고난 귀티는 점점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었고, 선물로 골라 온 물건에서는 안목이 묻어 나왔다.
확실히 이제 레스티아는 베르체스터 공작가의 사랑받는 막내가 되어 있었다.
“…….”
리시언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제라르가 찾아와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레스티아가 이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질 때까지, 네가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한다.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그렇게 허락하니 거리를 두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적당히 오빠 노릇을 해 주란 뜻이다.
적당한 오빠 노릇이라…… 그렇다면…….
“고맙다.”
리시언이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득이나 큰 레스티아의 눈이 더 커졌다.
“벼, 별거 아닌걸요.”
“아니, 정말 고마워. 너는 늘 내게 뭔가 주네. 너는 뭔가 가지고 싶은 거 없어?”
그 말에 레스티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가지고 싶은 건 없어요. 그 질문에 대답하는 건 매번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리시언에게 답장도 받았겠다, 이제 정말로 가지고 싶은 게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리시언은 마티어스, 조엘, 제라르 못지않게 집요하게 질문해 왔다.
“그럼, 하고 싶은 건? 뭐라도 말해 봐. 내가 이 선물에 보답할 수 있도록.”